---<눈빛들>

잡식성의 딜레마

---<눈빛들>

갈등의 연속이다. 육식과 채식 중 어느 것이 더 사람다움에 가까울까? 우리가 가장 흔히 먹는 육식동물 소는, 채식을 하여 인간에게 고기를 주는 비자발적 순환관계다. 인간처럼 잡식성인 돼지는 무엇이든 끊임없이 먹어 인간의 식탐에 묵묵히 부응하고 만다. 같은 잡식성 인간은 돼지의 속내와 합의한 적 없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관계는 단순한 힘의 논리이며, 선점의 우선권이다.

얼마 전 교육방송에서 독립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눈빛들>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돼지고기를 썩 즐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돼지사육을 디테일하게 보여주었다. 충격이었다. 대충 알았던 나의 상식은 틀렸었다. 어릴 때 보았던 돼지우리처럼, 더 넓은 대규모에서 여러 마리가 어울려 살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뉴스에서 대규모 돼지우리를 보았던 건 구제역파동 때였고, 무더기로 살처분되는 광경에 경악했다. 귀여운 아기돼지들이 대형자루 속에서 꿈틀거렸다. 오래 전 나는 “꼬마돼지 베이브”라는 영화가 무지 재밌어서 비디오로 빌려 네 번인가 보았다. 물론 돼지를 의인화한 영화지만 세상 어느 생명이든 새끼는 다 사랑스럽다. 뉴스를 볼 때마다 울었다. <눈빛들>을 보면서 내가 사람인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구제역 이후, 일 년 반 가량 일체의 육식을 끊었다. 외국서 온 가족들과 반가운 식사자리에서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미안함도 잊게 되고, 근년 들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다. 얼마 전 AI로 또 살처분이 전국에서 행해졌다. 다시 죄의식과 미안함이 송곳처럼 양심을 찔렀지만 구제역 때보다는 덜 했다.

<눈빛들>에서 오리를 살처분했던 현장 관리자들의 애환을 보여주었다. 자루에 담으려고 오리를 잡는 순간 손바닥에 전해지던 오리의 심장박동을 그들은 잊지 못했다. 놀라움은 감정이다. 인형처럼 귀여운 수 천 마리의 병아리들이 재잘거리며 폐기물처럼 담겨지는 광경, A4지 한 장보다 더 작은 공간에서, 일생 선 채로, 달걀을 낳아주던 닭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레기처럼 치워지던 잔혹함. 마음이 저려서 채널을 돌리는 게, 사람인 나의 잔인함이었다. 안 보인다고, 듣지 않는다고, 생명학살의 기억마저 사라지지 않음에도...

그러나 여기서 나의 딜레마에는 경중의 차이가 있다. 인간과 소와 돼지는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는 포유동물이다. 포유동물에게는 희로애락의 기본 감정이 있다. 물론 인간의 지능과 감정이 소나 돼지와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라는 무구한 존재 앞에서 나는 인지의 저울질을 할 생각이 없다.

초대형 자루에 담긴 돼지들의 몸부림을 내려 보며, 포크레인으로 묻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몇 몇 공무원들은 자살을 했다. 살기 위해 산 것을 생매장하는 모순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마치 인간은 죽어야 참되다는 글을 쓰던 쇼펜하우어가, 살던 마을에 전염병이 돌자 죽지 않기 위해 떠났 듯, 현실성이 도덕성을 지배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다. 

미련해 보이는 큰 덩치의 소도 잔등에 앉은 눈꼽만 한 쇠파리를 꼬리로 쫓는다. 감각이 행동을 지시하는 두뇌여서 가능하다. <눈빛들>에서 본 돼지들은 제 몸집과 유사한 크기의 스툴에 갇혀 있었다. 성돈이 된 뒤, 그 상태로 생을 보내야 했다. 돼지는 가려움증을 흙목욕으로 해결한다. 쇠창살의 틀에 갇힌 돼지는 가려움에 몸을 움찔거렸다. 몹시도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연신 비틀 뿐, 뒤를 돌아볼 수도, 돌아설 수도 없이, 차렷 자세로 섰다 앉는 것만 허용되었다. 몸집에 비해 작은 눈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돼지들도 있었다.

그 돼지들, 죄 없이 창살 속에서 일생 벌만 받는 건 아니었다. 동물의 동물적 본능 따위는 애초에 제외된 채 수의사의 손에 의한 인공수정으로 수태를 하고, 출산이 끝나면 다시 그 자리에서 인간의 먹이를 생산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출산 능력이 없으면 그들을 처분되었다.

<눈빛들>을 본 이후 시작된 나의 불면증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는다. 병아리들의 재잘거림, 영문 모르고 울부짖던 닭과 오리들의 함성, 스툴에서 너무나 애타게 사람을 바라보던 돼지들의 눈빛,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그래, 모든 육류는 사체다. 맞아, 사체가 변질되기 전의 미친 식탐이다. 이런 자괴감이 불쑥불쑥 잠을 방해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선잠에 든다. 초저녁까지 잘 웃고 지내는데,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눈빛들>의 장면들이 떠올라 잠은 점점 멀어진다.

언젠가 한겨레에서 읽은 독일의 ‘동물권리장전’이 무척 부럽다. 구제역이 유럽을 강타할 때 독일은 선진국답게 공장식축사를 금지했다. 말만 그렇지 누가 다 지키랴싶지만, 내가 본 독일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수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국민들 같았다. 그건 아주 중요한, 암묵의 약속이며 덕목이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인간이 먹거리를 포기하진 않되, 가축에게 최소한의 행동반경을 생명권리로 제공하는 것이다. ‘사는 동안’이라는 이 아름다운 합의를 우리는 언제쯤 받아들이려나.

와중에 며칠 전 고깃집에서 회식을 했다. 오랜만에 소고기 소금구이를 참숯불에 구워먹는 동안 간간이 ‘동물권리장전’을 떠올렸다. 고기 맛에 환장을 하는 혓바닥을 감추듯 소주를 마셨다. 소주도 나의 가공된 위선을 감싸주지 않았다. 소주 예닐곱 잔이면 한 병인데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 며칠 후, 오랜만에 재래시장에 들려 열무와 얼가리배추를 듬뿍 샀다. 강된장까지 만들어 몇 몇 지인들에게 속죄처럼 나누었다. 오늘은 마트의 식육코너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며 전복을 사서 장조림을 했다. 육류를 완전히 끊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대신 철저히 양을 줄이겠다는 약속은 자신 있다. 양질의 단백질이 함유된 두부도 자주 살 것이다. 두부가 감옥 앞에서 쓰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두부처럼, 죄의식의 무게를 덜고 싶다.

편집 : 심창식 부에디터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