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섬 소안도

마광남 주주통신원l승인2018.03.22l수정2018.03.2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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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섬 소안도(所安島)

소안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17.8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노화, 보길, 횡간, 자개(당사)도 등의 섬들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루고 있다. 고려 현종9년(1018)이래 영암현에 속해 있었고 달목도(達木島)라 하였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영암 편에는 주위가 56리 이고, 목장이 있다고 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는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물가운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명종 대(1546~1567)  처음으로 김해 김 씨와 동복 오 씨가 월항리에 입주함으로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소안도는 4개의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형성되어있다.

▲ 소안지도

이 섬은 항일운동의 일번지라고 불릴 정도로 널리 알려진 섬이기도 하다. 1920년 이 지역 출신 송내호를 중심으로 만세시위와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1922년 민족해방결사 조직인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배달청년회를 조직하고 농민운동, 소년운동, 여성운동, 교육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 전반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의 작은 섬에서 무려 57명의 애국지사가 나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완도 전역뿐만 아니라 완도와 인접한 해남의 일부까지 교육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소안도의 최고봉인 가학산(350m), 부흥산(227.9m), 대봉산(337.6m) 등 비교적 기복이 큰 산지로 이루어져있다. 본래는 남쪽과 북쪽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너비 500m, 길이1.3km되는 곳이 연결되어 하나로 되었다고 전한다. 문화재로는 미라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339), 맹선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340)이 있고 유적으로는 비자리에 조선시대인 1874년(고종11)에 설치된 소안진터와 항일기념탑이 있으며, 맹선리 해안에 왜구가 침입하여 지었던 움막집 터가 있다.

해수욕장으로는 과목해수욕장, 소강나루해수욕장, 진산리 해수욕장, 부상리 해수욕장 등이 있고 볼거리로는 미라팔경, 횡간도 사자바위, 당사도등대, 제주목사 기념비, 비자리 조개무지 등이 있다. 혹시라도 소안을 가시게 되면 꼭 찾아보시기 바란다. 특히 소안도에 속해 있는 당사도에는 1909년 처음으로 등대가 세워졌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약탈한 곡물을 싣고 가는 배들의 길잡이로 세워진 것인데 남에 나라에 와서 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분개하여 소안 출신 동학군 이준화 외 5명이 1909년 2월 24일 야음을 틈타 등대를 습격하여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완도군에서는 이 등대 옆에 1997년 전적비를 세웠다.

이 섬사람들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 있다. 즉 동지가 겨울에 잡혀가면 동지는 추운 바닥에서 지내는데 우리가 이불을 덮고 불을 지핀 방에서 잘 수는 없다고 불도 넣지 않는 방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잠을 자는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래는 일제강점기에 소안도에서 불리었던 여권신장가의 가사다. 1920년대에 소안의 여자들은 권리를 주장하였다.

천하에 어머니는 여자로구나/ 여자의 책임은 중하고 크다/ 책임은 중하나 권세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깨쳐라 찾어라 잃었던 권리를/ 완학한 남자의 압박 하에서/ 생명은 달렸으나 성명이 없고/ 생산은 할지라도 자식이 없다/ 집도 없고 재산 없는 여자신세는/ 남자의 노리개로 팔려 다닌다/ 깨쳐라 찾아라 잃었던 권리를/ 완학한 남자의 압박 하에서

또한 김정상의 논문 중에서 당시 소안 사람들은 무궁화를 무우게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일본 말로는 무쿠게라고 한단다. 입으로 전해지면서 무쿠게가 무우게로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무궁화의 색깔이 노랗다. 또한 섬 전체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이 그때 그 정신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본다.

▲ 노랑무궁화

 항쟁가

부모님이 기르실 때 금옥같이 기르니 어린마음 고운 얼굴 자랑 할 만 하도다

한 살 두 살 점점 자라 열서너 살 먹으니 일본 놈의 구박함은 더욱 설어 하노라

부모양친 일가친척 동무들이 많아도 나라 없는 이내몸은 항상 설움 이로다

의복음식 넉넉하고 고대광실 좋아도 나라 없는 이내몸은 항상 근심 이로다

조선천지 십삼도에 태극기가 빛난다 옳다 옳다 우리민족 원수 갚아 보겠다

손을 들어 만세 불러 태극기를 세우니 무지한 놈 왜놈들이 총과 칼로 찌른다

제주도 가는 길목의 소안도

제주도를 가는데는 이곳 소안도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우암 송시열도 이곳을 지나 제주도에 갔다. 승지 이수봉이 바닷길로 제주도에 들어가다가 바다 한 가운데에 이르러 시를 지어 이르기를,

닻을 푸니 소안도인데

피리 불며 뱃전에 앉았네

해는 노사이로 나오려하고

하늘은 대양으로 들어가려하네

막막해도 어디로 갈 줄은 알지만

이리저리 마음대로 되지는 않네

승지 이수봉(李壽鳳,1710~?)의 자는 의숙(儀叔), 호는 화천(花川), 영조16년(1740)중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47년 지평을 제수 받고 이어 정언, 필선, 헌납, 사간, 장령 등을 거쳐 1760년 집의가 되었다. 이때 왕세자의 서연에 민간의 학사를 출강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757년 경상도의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안핵사로 갔으며 같은 해 역모사건이 일어난 제주도의 도민을 위무하기 위하여 홍봉한(洪鳳漢)의 추천으로 제주위유어사(濟州慰諭御史)로 갔다. 1767년 동지정사(冬至正使) 전은군(全恩君)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조영순(趙榮順)을 탄핵하는 계를 정지시켰다가 1773년 사직당하고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양갔다가 곧 풀려나 다시 승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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