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급 학교설립과 항일

전국 군단위에서 가장 격렬한 항일운동을 펼쳤던 곳으로는 완도와 함경도의 북청, 경상도의 동래를 꼽는다. 완도는 외로운 외딴 섬이 아니라 민족정기가 횃불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던 항일운동의 성도(聖島)였다. 역사는 옳지 않고 부족한 것을 올바르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완도에서는 항일운동을 어떻게 하였을까? 앞의 글에서 대략 언급했지만 그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사진출처 : pixbay, 교육과 계몽으로 소안도 주민에게 항일의 횃불을 심다.

첫째, 교육과 계몽 운동을 펴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우선 간략하게 18개항으로 나누어 말하고자 한다.

1. 교육, 계몽운동의 전개와 신지도와 소안도의 폐교사건

완도의 항일운동은 각 면에서 교육과 계몽 사업을 착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립학교를 새우고 야학을 개설하여 모든 군민들로 하여금 불의에 눈을 뜨게 하였다. 따라서 이 교육, 계몽 사업은 곧 항일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교육, 계몽 사업은 첫째 항일의식 고취, 둘째 미신타파, 셋째 언어평등(양반 상민 간의 언어 평등), 넷째 남녀평등, 다섯째 조혼폐지 등이었다. 알지 못하면 누릴 수 없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래는 완도의 학교설립년도이다.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설립하였다.

▶1913년 사립소안중화학원(설립자 김사홍, 교사 송내호, 김경천, 황의보(신지도), 강사원, 빈광국(함경북도 상해와 청년동맹 활동), 강경환(함경북도), 송기호, 최홍길, 정창남등으로 운영해 오다가 1922년 사립소안학교로 승계되면서 신동희, 최형천, 김형곤, 백태윤, 김병섭, 김남곤, 문남균, 박득수, 이시완(서울청년회). 박영희, 이호견(대흥사 스님 내외), 강순저 (평안도), 김창선(여천, 해방 후 국회의원) 등이 부임하여 운영하였다.

▶1916년 사립노화 영흥학원(설립자 송내호)이 설립

▶1921년 조약도사립약산학교(설립자 최병준, 정충조, 교사 정환중, 김래유, 이한조)가 설립

▶1921년 사립신지학교(설립자 임재갑), 교사 강경환(함북), 송기호(소안), 김창선(여천)가 설립

▶1925년 군외사립교인학교(설립자 김영현, 교사 오석균, 박노길, 송기호, 김창선, 김생기, 김동섭, 이두성, 이흥용, 정남호)가 설립,

▶1932년에는 사립노화대성학교(설립자 천기정)와 사립금당학교(설립자 김석인, 교사 오원석) 설립

▶1932년 모도학원(설립자 장한준), 완도 대신학원 및 유치원(설립자 김병규), 노화중통학원(설립자 김성재), 노화충도학원(설립자 고성우, 김광재)등 설립

▶1926년에는 하도학원(설립자 용민홍), 방축리일신학원(설립자 박영배), 횡간학원(설립자 김상숙) 등 각 면의 마을단위에서 학원설립

사립학원의 설립자와 교사들은 당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함경북도 지방과 서울, 중국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명망가들이 자원해서 완도를 찾아 학교설립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소안학교와 신지학교간에는 교사의 교류는 물론 1923년에는 양교가 연합운동회까지 공동개최한 사실은 깊이 생각해 봐야겠다. 섬과 섬으로 되어있는 두 학교가 배를 타고 한곳에 모여 운동회를 열었다는 것은 감명 깊은 사건이다.

그러나 일제는 날로 성장해가는 사립학교들의 활동상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급기야 1924년 사립신지학교를, 1927년 사립소안학교를, 1934년 군외사립교인학교를 강제 폐쇄하기에 이른다. 신지학교 폐쇄 시에는 양양순외 학생 6명과 송기호외 교사 3명을 체포하여 장흥검사국으로 압송하는 등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검거 후 재판에 회부된 임재갑, 김정상, 송기호, 김창선은 1심판결에 불복하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했는데, 1925년 6월 27일 김정상에게 징역 1년, 임재갑에게 징역 10월, 송기호, 김창선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소안학교를 폐쇄하던 날은 경비선으로 무장경찰을 싣고 와 일체의 집회와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곤봉 같은 것의 소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 사진출처 : pixbay, 소안도를 뒤덮은 태극기 물결

그 후 각 면의 사립학교에는 일제의 간섭이 극심하였다.

그런데 신지학교와 소안학교의 강제 폐쇄 때는 이 문제가 전국으로 파급되어 각 지방 청년단체가 일제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고, 특히 일본에서는 1927년 6월 1일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등의 주도로 4,000여 군중이 모인 대중 집회를 갖고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규탄하였다, 이날 집회를 주도했던 정남국외 40여 명이 경찰에 구속되었다.

신지학교가 폐쇄되던 날에는 조선일보의 시평란에.... ‘조선인의 채면을 무시하는 횡포의 일단’이라 썼으며, 소안학교 폐쇄 때는 같은 시평란에 ‘오월에 때 아닌 서리가 웬 말이냐.... 흩날리는 한 잎 새 천하의 가을을 고한다’하고 썼다.

신지 소안하교 강제폐교 외에도 완도군 내 여러 학교가 일제의 탄압을 여러모로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1927년 동아일보 보도가 있다.

재 동경 완도향우회는 다음기사와 함께 8대 문제 결의하였다. ‘재동경완도향우회에서는 지난해 7월 20일 오후 7시 회관에서 결의대회를 가졌는데 정남국씨의 통탄한 개회사와 상무 최서일 군의 경과보고가 있은 후 아래와 같이 결의하고 밤 12시에 폐회하였다’

1, 장학기 군의 횡사사건은 철저히 규명한 후 대책을 강구할 것

2, 소안사립학교 복교동맹에 참가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할 것

3, 청산서부학교 문제에 대하여는 완도군수에게 경고문을 발송할 것

4, 자지도학교 문제는 지주 모모에 대하여 성토문을 발하는 동시에 금후 행동을 감시케 할 것

5, 여서도학교 폐쇄문제에 대하여는 주모자에게 성토문을 발송할 것

6, 고금면 수리조합사건은 철저히 조사하여 사실을 규명할 것

7, 완도중학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것

8, 본회 기관지 기별 출간은 내월 5일 내로 실현할 것

이렇듯 모든 국민이 무지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명제로 삼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시켰다. 총칼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그 정신을 우리는 높이 사고 다시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편집 : 김태평 객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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