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오륜의 삼강을 모두 갖추어서 집안의 여러 가족들의 충효절의 정문을 받은 집안

[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기] 8 소상진과 삼강문의 자랑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보성군 복내면 원봉리 마을 입구에는 자그마하지만 눈에 번쩍 뜨이는 정문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삼강문]이라 새긴 현판이 또렷하고 아름답게 단청으로 채색이 된 작은 건물에 달려 있어서 더 이채롭다.
삼강문이란 우리가 유교 국가로 지내온 조선시대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삼강오륜]이라는 말에서 인간의 도리로 여기는 첫머리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규정한 도덕기준이 아니던가?
 
[삼강오륜 : 유교(儒敎)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 임금과 신하,) ·부위자강(父爲子綱 : 어버이와 자식,) ·부위부강(夫爲婦綱 : 남편과 아내) 이것은 글자 그대로 인간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부자유친(父子有親) :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군신유의(君臣有義) :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유별(夫婦有別):부부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 :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강오륜 [三綱五倫] (두산백과)

▲ 삼강문의 현판


이러한 삼강오륜 중에서 삼강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집안이라는 정문이니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동시에 나왔다는 표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상진의 집안에는 어떤 충신과 효자와 열녀들이 있다는 것일까?
그 내력을 살펴보면 소상진의병장은 우리 조상이 되는 김성일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고, 경상도 땅 청송군에서 우리 군 출신의 임계영 장군의 별장으로 출전을 한 분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미리 겁을 먹게 한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날리셨으며, 1592년 12월 성주 전투에서 순국하신분이다.
그 이후 집안에서 두 효자가 났다. 蘇震國․ 蘇哲根 두 사람은 효행이 널리 알려져 포상을 받고 정문이 허락된 효자들로 1충 2효를 이룬 셈이다.
이에 질세라 부녀들 또한 집안의 내력에 부응하는 분들이어서, 네 분의 열녀가 나왔으니, 소몽삼의 처, 소동하의 처, 소안국의 처, 소철근의 처 이렇게 네 분의 열녀가 상을 받아 3강을 완성하면서 온 집안이 유교적인 가르침에 모범이 되는 집안이 된 것이다.
    
蘇尙眞과 三綱門
 
◆ 蘇尙眞
○ 1548(명종 3)~1592. 12. 13. 복내면 용동리 內洞에서 출생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勤王을 위해 上京하다 三禮(전라
북도)에서 招諭使 金誠一을 만나 募義하여 嶺南으로 내려 가
眞寶郡守(경북 청송군) 任啓英의 의병부대에서 別將이 되어 紅衣를
입고 승승장구하므로 왜적에게 紅衣將軍이라 불리었으며, 同年 12월
星州(경북) 전투에서 분전하다 흉탄에 맞아 순국
○ 1687년(숙종 13) 通政大夫 禮曹參議를 증직하고 1717년(숙종 43)
보성 儒林들의 청으로 羅州 貞烈祠에 배향
 
◆ 三綱門
◇ 위치 : 복내면 복내리 圓峰마을
◇晉州 蘇氏 문중에서 배출된 1忠․ 2孝․ 4烈의 행실이 귀감이 되도록
삼강문을 세워 뜻을 기리고 있음
◇ 1忠 : 蘇尙眞
○ 2孝 : 蘇震國․ 蘇哲根
○ 4烈․ :소몽삼의 처, 소동하의 처, 소안국의 처, 소철근의 처 4명

 
이러한 전통 있고 모범적인 집안의 정문이 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 마을의 역사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렇게 훌륭한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정문으로서는 그 규모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정문에 까지도 후손들이 얼마나 많이 늘어났으며, 얼마나 넉넉하게 살고 있는지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지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으로는 이 정문을 지킬 소씨들의 수가 보성군에서 그리 많지 않다고 알고 있기에, 조상들을 좀 더 잘 모실 후손들이 부족하기에 그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삼강문의 정문

 
홍의장군 소상진과 삼강문


소상진 용장은 임진왜란 때에 적을 박멸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그 용맹을 영호남에서 크게 떨친 보성 출신 우의장 임계영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또한 충절이 남달라 후세에 귀감이 되고 크게 추앙받고 있다.
공은 진주 소씨의 후예로, 자는 실보<實甫>이며, 호는 서암<西庵>이다. 판도 판서 소을란의 후세이며 만호 ‘소규’의 아들로 복내에서 태어났다.
담력과 지략이 뛰어 났고, 용기도 있어서 사행감 주부를 지냈으며, 임진난이 일어나 왜적의 침입으로 자기의 고장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내어주고 있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단 한필의 말로 임금님을 따르는 길에 올랐다.
삼례역에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우의장 임계영이 영남에서 선전 중임을 듣고, 그 막하에 들어가 합세한다. 별장이 되어 항상 홍의를 입고 선봉에 서서 돌진하여 연전연승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이에 놀란 왜적들을 홍의만 보면 홍의장군이라고 겁에 질려 그의 예봉을 피하여 도망을 쳤다.
장군에 대한 진중 일화가 남아 있으니, 부장인 장윤이 공의 용맹을 보고 말하기를 “국가가 믿는 바는 의병뿐이요. 의병이 믿는 바는 오직 공 밖에 없으니 자중하여 적을 멸하는데 대비하자.”고 하니 공이 답하기를 “장부가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랴, 국난에 순국하는 것이 나의 뜻일 뿐이라.”고 하였다.

임진년 12월 13일 성주대전에서 불과 100여 장병으로 천여 명의 왜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많은 적을 당할 수가 없어 퇴군하려고 하자 칼을 뽑아 높이 들고 “적을 보고 피하는 자, 어찌 의병이랴” 하면서 혼자서 적진에 뛰어들어 좌충우돌로 분전하였다. 이를 본 의병들이 별장의 용맹함에 사기가 충천하니 전세는 역전이 되고,  적의 대장 “모리휘원<毛利輝元>이 도망을 치자 이를 추격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히 순절하였다.
정란후 조정에서는 그의 숭고한 정충보국의 무공을 기리어 통정대부예조참의를 증하고 나주 정렬사에 모셔졌다.
숙종임금 때에
[一忠(상진), 二孝(행룡준위부호군 진국 학생 철근), 四烈<만호 몽참 처 전씨, 학생 안국 처 황씨, 동하 처 조씨, 철근 처 고씨>]
 
첫째 (1 충)나라에 충성을 다한 충신을 상진
둘째 (2 효자)부모님께 효성을 다한 두 효자, 행룡준위부호군 진국 과 철근
세째 (4 열녀)만호 몽참 처 전씨, 학생 안국 처 황씨, 동하 처 조씨, 철근 처 고씨.
 
이렇게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함께 나온 집안은 전국에서도 드문 일이다. 오직 우리 보성의 ‘소’씨 가문에서만 있고, 그것도 모두 합하면 7사람이나 함께 칭찬받아 정문을 세운 것은 대한민국에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이렇게 모두 일곱 분의 훌륭한 행실이 모범이 되어 정려를 세워 포상하여 삼강문을 복내면 원봉리에 세워 인간의 지난사인 충효열이 소씨 문중에 셋 모두 갖추었으니 이를 길이 빛내고 후세의 본이 되게 하였다.
<참고 : 湖南倡義錄, 全南道誌, 山陽三綱傳, 보성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7매>
 
***전자책 본문보기***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전국 어디에도 없는 삼강문을 세운 보성에 사시는 소씨 문중에 깊은 존경을 보내면서 전국에 유일한 삼강문이라는 자부심을 한껏 가질 수 있게 좀 더 크고 우람한 정문으로 다시 지어 드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7.12.03.20:56‘<25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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