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헌에 등장하는 고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전의 우리역사서가 전해지지 않기에 중국 문헌을 찾아 고조선이야기를 씁니다. 우리나라에서 인정을 안 할지라도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니까요.

가장 먼저 조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주나라 무왕 때 이야기입니다. 무왕이 상나라 왕족인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다는 이야기가 사마천 사기에 등장합니다.

1.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보면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 그래서 무왕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

▲ ①주나라의 수도였으며 907년 당나라가 망할 때까지 2,000여년 중국 역사의 주 무대였던 서안 ②상나라의 수도 은의 위치. 바로 갑골이 발굴된 은허 ③만리장성 동쪽 최초의 관문 산해관의 위치 ④양평성의 위치      사진 : 구글지도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은 청나라 강희제에 의해 확장된 개념이고, 주나라시대에는 은과 서안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이 그들의 천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국가개념이 없었습니다. 천하를 자기들의 천자가 다스린다고 생각하였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자기들이 점령하였던 지역은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티베트도 과거에 자기들이 점령했었다는 이유만으로 모택동은 무력으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리장성 이북의 위구르도 마찬가지고요.

기자가 실존인물인지, 그리고 조선에 가서 왕을 했는지 지금은 누구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백이와 숙제 같은 현자들이 역성혁명이라며 극구 말려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상나라 왕족에게 군사를 내어주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주었을까요?

한나라 이후의 사서에 첨가하거나 주석에서 언급하는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다스렸다는 기자동래설. 마치 나당연합군에 패한 연개소문의 아들이 패잔병을 끌고 당나라 수도 장안이라도 점령하고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나요?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주나라 이전에 즉 상나라와 같은 시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였다는 것과, 자기들이 천하라고 여기는 중원의 안쪽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기의 내용을 인정한다고 해도, 명목상으로 상나라 유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을 수도 있겠지요.

관중의 어록을 후대에 모은 '관자'라는 책에 관중이 제나라에서 동쪽으로 8,000리 떨어진 곳에 조선이 있다는 표현을 합니다. 주나라 수도에서는 더 까마득한 거리입니다. 아마 태평양 건너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 알았다면 주 무왕은 기자를 미국의 제후로 봉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조선에 대한 위치가 어디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전국시대를 참고한 자료가 전국책이라고 기록합니다.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사마천보다 뒤에 활동한 한나라 유향이 다시 편찬한 전국책에 소진이 조선을 언급합니다. 소진은 장의와 더불어 전국시대 합종설과 연횡설을 주장한 유명한 유세객입니다.

2. 전국책 (원 저자는 모르고, BC 77~BC 6년 생존한 전한의 유향이 재편한 책)

蘇秦將爲從北設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沱易水-소진이 장차 합종을 도모하려고 북으로 유세를 떠나 연나라 문후에게 아뢰길,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 이수가 있습니다.(소진은 BC 284년 사망)

위만 조선이 망하기 200여 년 전에 연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개념의 국가와 지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쪽의 임호와 누번은 유목민들이 세운 나라 이름이며 후에 조나라에게 패하고 북쪽으로 도망가 흉노와 합치게 됩니다. 남쪽에 호타와 이수는 강희자전에 강이라고 설명합니다.

소진이 조선과 요동을 언급하면서 조선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만약 연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면 조선이 더 크고 힘이 센 나라일 것이고, 아니면 조선이 연나라와 요동 사이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 ① 만리장성 천하제1관인 산해관의 위치. ②연나라의 가장 동쪽 끝 요새가 있던 양평성(襄平城)의 위치. 고조선의 발원지 평양성으로 여겨짐. 고구려의 평양성과 요동성도 이곳으로 봄(한사군이야기에서 상술)            사진: 구글지도

3. 사기 흉노열전

《史記·匈奴列傳》: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郤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

이 원문을 참고로 위키백과에서 현대중국어로 편집한 글을 찾았습니다.

襄平城[编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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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平城是中国东北历史上第一个国家燕国的军事要塞。襄平城是前284年左右兴建的燕长城的东部堡垒,本为東胡、山戎與箕子朝鲜的重要城市。燕昭王時,有燕將秦開,在東胡作為燕國的人質,東胡人很信任他。秦開歸國後,起兵襲擊大破東胡,「東胡卻千餘里」,結果燕國邊境向東推進了一千多里,大大開拓了燕國的疆域,而燕國亦隨即開始修築北長城。北長城西端起自造陽(今河北省張家口市宣化縣東北),向東到達襄平城(今遼寧省遼陽市北面)。

양평성[편집]

위키백과, 자유백과전서

양평성은 역사상 중국동북 제일의 국가인 연나라의 군사요새. 양평성은 기원전 284년 전후로 건설한 연나라 장성의 보루. 원래는 동호, 산융, 기자조선의 중요도시.

연나라 소왕 때 진개라는 장군이 동호(주: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의 인질로 잡혀있었는데 동호인들의 신임을 크게 얻어서 귀국한 후, 군사를 데리고 가서 몰래 기습 대파한다. 천리를 물러가게 함. 그 결과 연나라 국경을 동으로 천리 이상 확보하고 연나라 강역을 크게 개척하였으며 북쪽 장성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서쪽의 조양에서 북쪽의 양평성에 이른다.(양평성은 현재 요령성 요양시 북쪽)

이 글을 보면 과거 고조선의 위치는 명확합니다. 적어도 양평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1,000여 리부터 고조선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만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한 의혹이 사라지지요.

또 하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진개를 중국 사가들은 현명한 장군 혹은 영웅이라 칭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중국의 역사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고대국가였음에도 최근의 동북공정을 통해 기자와 위만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을 중국역사에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들어 고구려통합을 중국역사의 마지막 완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족이고, 신라는 하층민인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조상으로 하는 나라로 오늘날 한국의 조상이라고 기술합니다.(三韓과 韓國은 동일한 韓자를 사용)

제가 부족한 역사지식임에도 이 글을 연이어 쓰는 이유입니다.

이어서 위만조선에 대한 문헌입니다.

1. 사기 (사마천이 BC 109~BC 91년 사이에 편찬) 조선열전: 朝鮮王滿者,故燕人也,,,,,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조선왕 만이란 사람은 원래 연나라 사람이다,,,,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고 변방으로 나갔다.

2. 한서 (반고가 AD 82년에 편찬)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BC 206~AD 24,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기 까지를 기록한 역사책입니다. 위씨조선(衛氏朝鮮) 언급.

3.삼국지(三國志) - 서진의 진수(AD 233~297)가 쓴 책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는 위만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 ‘진승(주: 진시황 사후 진승과 오광의 난)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 수만 명이 조선 땅으로 피했다. 燕人衛滿結夷服復來王之-연나라 위만은 상투를 틀고 동이의 복장을 하고 나라를 뒤집은 후 왕이 되었다.’

중국인들이 바라본 동이에는 9개의 큰 민족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었지요. 현재 이 조그만 대만에도 9개의 완전히 다른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각기 언어와 인종이 다른 민족입니다.

우리 한반도에는 간석기를 사용한 원시 조상의 유물이 35만 년 전으로 올라가고, 인류의 흔적은 50만 년 전까지도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기존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부족국가에 한두 명 외지인이 유입되었다고 그 씨족이 바뀌었다고 보면 안 되지요.

우리나라 학계에 상나라를 우리와 같은 동이족(오랑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문화의 시조가 우리고 한자도 우리가 만들었다고 주장을 하지요. 중국 사람들이 표기하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은 그저 오랑캐 야만인이란 의미입니다.

상나라를 세운 탕왕이 한반도에서 넘어갔나요? 한반도에 상나라보다 앞선 청동기와 옥기 문화 혹은 갑골이 있었나요? 아니면 상나라 폭군 주왕이 주나라 무왕에게 패하고 죽었는데 그 일족이 모든 상나라 백성을 거느리고 텅 비어있던 한반도에 넘어와서 고조선을 세웠나요?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 고선지는 장군이 되어 지금의 티베트를 점령하고 안서도호부를 두고 부도호가 됩니다. 그럼 티베트도 동이족이 되나요? 인터넷에서 어떤 지도를 보니 고구려 영역이 중국 전역의 2/3정도에 안서도호부도 포함을 시켰더군요. 고선지는 고구려 장군이 아니고 당나라 장군입니다.

후지모리 겐야라고 하는 일본의 이민 2세가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페루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부패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망쳤지요. 페루를 일본이 지배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페루가 일본종족이 세운 나라인가요? 최근 뉴스에는 후지모리의 아들과 딸이 패루의 대통령자리를 놓고 아버지의 특별사면에 대한 갈등으로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으로 상나라 후손뿐만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해왔지요. 또한 선진 문물도 유입이 됐고요. 풍습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의 텃세에 정면으로 대항했을 거라고 상상이 되나요? 비록 원나라나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였어도 우리 민족이 몽고족이나 왜족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국공내전으로 많은 산둥의 중국인들이 일시에 한반도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중국집 여는 거 말고 한국사회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습니까? 우리가 쓰는 언어는 소리글자이지 표의문자가 아닙니다. 한자를 우리 조상이 만들었다고 우길 이유가 없지요. 우리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한자문화가 널리 사용된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이후로 보입니다. 372년 불교가 들어오고, 태학을 세워 관리를 양성하지요.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세긴 광개토대왕비가 나옵니다. 그이전의 지명이나 사람이름은 여러 가지로 어색합니다. 경주의 원래 이름이 서라벌이고 후에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한사군 이야기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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