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 학술세미나

김종선 주주통신원l승인2018.04.08l수정2018.04.1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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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는 2016년 발족하면서 제 1회 학술세미나를 가진 이래로 올해에 제 3회 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었다.

기념사업회가 발전하면서 학술적인 분야도 함께 깊고 넓은 범위의 학술적 역량을 갖추어 가고 있다. 특히 금년에는 2019년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대학로의 흥사단에서 많은 학자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참여하였으며, 특히 세 분의 학자는 ‘①1880년대~1910년대 북간도 지역 중국의 행정기구 설립과 변천 ②1910년~1920년대 연변지역 조선인 사회의 사회문화적 배경 ③1910년~1920년대 독립군 기지 조성과 봉오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북간도가 역사적 공간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공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귀중한 시간으로 구성하였다.

첫 발제자로 나선 김태국 연변대학교 교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중국(청-중국)이 북간도 지역에 설립하였던 행정기구들의 설치와 변천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고찰하였다.

중국에서 북간도에 행정기구를 설치하게 된 동기는 변방위기 극복과 국가의 이익에 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 북간도 지역 인구구성의 7할을 차지한 이주 조선인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세력이 누가 되느냐가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다. 행정기구 설치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러시아의 북간도 지역 침략에 대비한 청의 변방위기 극복과 지역사회의 안정을 위한 조치로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1880년대에는 훈춘부도통 승격과 돈화현을 설립하였다. 원래는 한인(漢人)들을 중국의 관내에서 이민시키는 이민실변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실효성이 없자 이주 조선인들의 두발과 복장을 변형시켜 한인화(漢人化)하려고 하였다.

두 번째는 1902년 10월 연길청을 설립하여 러시아의 침략으로 나타난 북간도 지역의 행정적인 마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의 북간도 침략에 맞서기 위해 연길변무공서를 출범시켰다. 이 시기 청의 정책은 여러 이주민에 대한 자국민화를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추진하였다. 즉, 조선인의 한인전간구 설치, 조선인에 대한 치발역복과 전민제도, 국적제도 정비 등을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과 이범윤의 사포대 활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북간도 지역에 세력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간도문제와 조선인에 대한 생명재산 보호 그리고 영사재판권을 앞세워 이주조선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러일 삼국의 간도지배 정책에 맞서 조선인 사회는 스스로 자립하기 위한 자치권을 키워나가는 한편 중러일과의 적당한 협상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자치권 획득을 위하여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그리고 조선인민회 등 사회단체를 설립하고 자체의 민족교육을 하면서 힘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힘을 발판으로 1919년에는 3.1운동을 시작으로 북간도 전역에 20여개에 달하는 독립군 단체가 건립되어 실질적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역할을 하였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조정우교수는 일본인들이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간도라는 지역이 역사적 정치적으로 어떤 공간이었으며 어떻게 무장 항일투쟁의 본거지가 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만주는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만주족의 청조(淸朝)가 등장하면서 중국의 영토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청조의 수립과 더불어 대다수 만주족이 중국의 관내(關內)로 이주하면서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게 변하였으며, 1930년대 중엽까지도 배타적 영토주권을 주장하는 국가가 없었기에 빈한한 러시아와 중국인들, 특히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만주로 들어왔다. 많은 조선인들의 이주는 만주지역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구성원을 이루게 되었다. 1910년도에 일본인들이 만주지역을 조사한 ‘국경지방시찰복명서(國境地方視察復命書 )에 의한 인구구성은 아래의 표와 같았다.

 

일본정부의 조사

중국정부의 조사

일본인

425

조선인

160,499

141,025

중국인

41,340

52,750

러시아인

27

영국인

6

프랑스인

2

조선인들은 만주 지역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였지만, 토지소유에 있어서는 중국인들이 1인당 10정보(町步)를 소유하였다.

조선농민들은 인구 1인당 2정보(町步)를 겨우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이 중국인들에 비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농지소유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농민들은 조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물량도 적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만주지역에 산재해 있는 조선농민들과 항일운동 세력 간의 관계를 끊기 위해 1909년 ‘간도협약’을 맺어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고, 1915년에는 ‘만몽조약’을 맺어 만주의 주요지역에 총영사관을 설치하고 영사재판권을 획득하였다. 1908년에 일본농민이 조선에서 경작할 토지를 수용하기 위해서 세운 동양척식회사는 1918년 간도사정(間島事情)이라는 방대한 간도지역 종합보고서를 편찬하여 동척이 만주진출을 위한 기초조사로 활용하였다.

조선은행은 1917년 간도출장소를 개설하여 활동하였고, 1921년에 ‘만주지방 조선인의 경제 및 금융상황’을 조사하였다. 간도의 조선상인들은 1920년 일본 본토의 경제가 위축되자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와 일본인들의 갖은 방해 속에서도 조선인들은 항일독립군들을 지원하여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세 번째 발제자인 신주백교수는 국내외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을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전쟁론과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혁명론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한인사회가 가장 잘 형성된 용정과 국자가는 민족운동가들의 북간도 기지가 되었고, 서간도는 이희영 일가와 안동의 석주 이상룡 등이 이주하여 기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은 1911년에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교육과 논밭을 경작하였고, 1912년에는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교육에 매진하였다. 동만주인 북간도에서는 다수의 조선인이 이미 터를 잡고서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1913년에는 간민회를 결성하여 자치활동을 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1919년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노령의 대한인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합하고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도 민족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1919년 한 해에만 60여개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새로 결성된 단체에는 국내외에서 모인 많은 청년들이 가입하였다. 임시정부에서도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방책으로 1919년 11월 서로군성서, 12월 대한군정서를 편성하여 군사제도를 갖추려 하였고, 만주에 파견원을 보내 통일조직을 만들려고도 하였다. 만주에서의 대중적인 애국열은 독립군의 활동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고, 그 중심에는 이동휘가 있었다. 이동휘는 동만주 일대의 민족운동 관계자들을 접촉하여 자신의 독립전쟁론으로 포섭하였고, 상해에서 온 이동녕을 만나 1919년 6월 길림에서 통합문제를 의논하였다.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독립전쟁론을 더욱 강화하였다. 동만주에서 이동휘의 독립전쟁론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홍범도였다.

최운산과 그의 형제들은 1910년 봉오동으로 이주하여 훈춘현 일대에 기반을 닦고 중국 군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광활한 토지를 경작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봉오동을 군사의 거점으로 개발할 수 있었다. 통합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제도와 체제정비에 나서자, 1920년 3월에 대한국민회와 군무도독부, 대한독립군 등 각 단체 40여명이 습마당(洽螞塘)의 상촌에 모여 통일문제를 토론하였다. 이즈음에 동만주 지역의 독립군은 국내에 진격하여 활동할 것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3월부터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많은 지역을 침투하여 일제의 통치기관과 친일파를 공격하자 일본은 동만주 지역을 ‘불령선인’의 소굴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6월 7일에는 일본군들이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왕청현 봉오동을 습격하였다. 봉오동에는 대한북로독군부 산하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독립투쟁을 위하여 연합하였으며 일본군의 습격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서간도와 북간도의 민족운동가들이 두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전쟁론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일치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전쟁론에 함께 공감을 하였고 동조하였다. 1920년의 독립전쟁론은 ‘전쟁준비’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그 기회를 포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뜻이었고, 봉오동 전투는 독립전쟁 준비의 첫 해에 동만주 독립군 조직의 군사적 통일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사건이었으며, 그때까지 나라의 독립에 의문을 품고 있던 백성과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세 학자의 발제 후에는 여러 학교에서 오신 교수들과 학생들, 그리고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간도지역과 그 구성원들의 성격이나 활동, 그리고 간도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다양한 사상적 기반, 임시정부와 독립투쟁 세력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문답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독립운동사나 만주에 관한 연구가 거시적인 연구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앞으로는 만주에 이주하거나 거주했던 한국인들의 실질적 삶과 생활, 그리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조직하고 활동했던 사실들 바탕 위에서 더욱 세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최운산의 형제들이 봉오동 지역을 피와 땀으로 일구고 그 지역의 구성원들과 함께 했던 운동은 일제시대에 북간도의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지만,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일제시대, 만주, 독립운동, 임시정부라는 의미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앞으로 역사 연구의 중요한 기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모든 참여자들이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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