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4] 허창무 주주통신원

암문(暗門)

낙산구간에서 처음 맞는 암문으로 들어간다. 한문으로는 어두운 문이라는 뜻인데 어두운 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숨겨진 문 또는 비밀의 문이다. 그래서 영어로 표기하면 Hidden Gate라고 쓴다. 전시에 가까운 곳에 진주한 적을 야음을 틈타 기습공격하거나, 적군 몰래 군수물자를 반입하기 위한 비밀의 문이다. 그러나 평화 시에는 도성 안으로 생필품 등 물자를 들이기 위한 문으로 사용했다. 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 사이에 모두 8개의 암문이 있다. 낙산구간에는 모두 3개가 있다.

도성 안으로 들어오면 왕족이 된다. 나는 참가자들에게 왕족이 되면 왕족다운 품위를 지키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홍덕이밭

낙산공원 안 놀이광장은 넓다. 성곽 쪽에는 정자가 있고, 서쪽 경사진 숲속나무 계단 밑으로 내려가면 ‘홍덕(弘德)이 밭’이 있다.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다. 그때 홍덕이라는 궁녀가 따라가 봉림대군에게 시중을 들고, 김치를 담가주었다.

김치가 없는 청나라에서 봉림대군이 먹은 김치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맛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환국하여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볼모시절의 김치 맛을 잊지 못하고, 낙산 자락의 밭뙈기를 홍덕이에게 주어 배추를 기르고 김치를 담가오게 했다. 주인공들은 모두 가고 없지만, 고사에서 유래된 땅은 그대로 남아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곳에서 소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인 인조는 8년간이나 종주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귀국한 세자를 왜 그토록 미워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세자는 그 당시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를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판단했다.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신하나라로 전락한 후에도 조정은 하릴없는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볼모시절의 쓰라린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분보다는 오직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러자면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방어력을 잃은 수십만의 백성들이 머나먼 이국땅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했다. 어려운 이국의 환경에서도 세자는 동족을 구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아비인 인조는 그의 노력을 전혀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임금에게는 세자가 청나라의 앞잡이로만 보였다.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환국한 여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에게 씌워진 것은 환향녀라는 수치스런 멍에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여인들이 자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락산의 정상에서

예전에 낙산은 천연의 숲이 아름답고 군데군데 모양 좋은 바위와 약수터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쌍봉낙타의 유방처럼 보이는 낙산 서쪽 산록의 약수터 일대는 쌍계동(雙溪洞)이라고 불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이곳을 삼청, 인왕, 백운, 청학과 더불어 도성 안 5대 명승지로 꼽았다.

놀이광장 바로 위 낙산정으로 가는 길옆 성벽을 잘라 도로를 만들었다. 옛 낙산시민아파트의 소방도로가 지금은 성안 종점정류장으로 들락거리는 마을버스의 통로가 되었다. 성벽이 끊긴 곳에는 보기에도 을씨년스럽게 굴착의 상흔이 뚜렷하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개발시대의 유산이다. 이렇게 큰 상처가 생긴 까닭은 1969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낙산 정상에 세운 낙산시민아파트 때문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은 성안으로 굳이 마을버스가 들어와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성 밖 바로 아래 빈터에 버스정류장을 두면 될 텐데 말이다.

낙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40~50m 정도 내려오면 관목 숲에 가려진 성벽에 좌룡정(左龍亭)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이곳에 활터가 있었다는 증거다. 이밖에도 도성 안에는 여러 곳의 사정(射亭)이 있었다.

먼저 도성안의 5대 사정을 들면,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옥인동의 등룡정(登龍亭), 필운동의 등과정(登科亭), 누상동의 백호정(白虎亭), 삼청동의 운룡정(雲龍亭)이 모두 종로구에 있다. 가회동의 일가정(一可亭), 마포의 화수정(華水亭), 천연동의 서호정(西虎亭), 장충동의 석호정(石虎亭) 등도 유명한 사정들이었다.

왜 이렇게 많은 활터가 도성 안팎에 있었을까? 활쏘기가 단순한 무술이 아니라 선비가 배워야할 여섯 가지 중요한 교육과목의 한 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육예란 예(禮),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인데, 예는 예절,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 타기, 서는 글씨 쓰기, 수는 수학을 말한다.

테니스장을 지나 낙산정에 이른다. 샛길 안쪽 깊이 들어선 큼직한 정자가 언제 보아도 고즈넉이 서있다. 조선시대에는 전망이 좋은 그곳에서 왕족이나 사족들이 시조나 한시를 읊었을 것이다. 돌 계단을 올라서면 50여 평의 공지에 등나무시렁이 있고, 시렁을 가득 메운 등나무가 층층이 뻗어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낙산정 언덕에서 바라보는 시내의 조망이 십년 묵은 체증도 뚫리게 한다. 사방이 막힌 데 없이 탁 트였다. 서쪽으로는 인왕산, 북쪽으로는 백악산, 남쪽으로는 목멱산이 거칠 것 없이 보인다. 거기서 내려다보면, 서울 도심은 녹지대가 대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한양의 도성 안은 모두 궁궐이고, 종묘고, 사직단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도성 안을 기준으로 보면 런던의 하이드파크나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부럽지 않은 푸른 도시다. 가까운 곳으로부터 짚어나가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뒤가 종묘다. 종묘 위쪽 감사원 동쪽으로 동궐, 즉 창덕궁과 창경궁이 자리 잡고 있다. 동궐 건너 백악산 밑 청와대 앞에는 경복궁이 있다. 그리고 좀 더 멀리 인왕산 밑에 사직단이 있다.

녹지대는 백악산으로부터 동궐을 지나 종묘를 거쳐 도성 안을 누비고 남산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세운상가가 있어 끊어지지만, 낙산정에서 바라보면 녹지가 단절된 부분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남산에 이르기까지 녹지대를 복원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도성 안의 생태축이 형성되어 서울은 세계 유수의 생태도시가 될 것이다. 산토끼와 고라니와 노루가 도심 가운데서 뛰놀 것이다.

남산 즉 목멱산은 꼭대기에 서울타워를 두고, 서쪽으로 누에머리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를 짓기 위해 서쪽 끝을 훼손했다는 누에머리(蠶頭峰)는 지금도 그때의 상흔이 쓰라린 듯 아스라한 침묵 속에 도성을 내려다보고 있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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