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기] 10 염재보장군의 전적지 양가랭이재

안담살 장군의 부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분으로 보성의병 전투 중에서 가장 큰 전투마다 모두 참여한 용장 김선태 주주통신원l승인2018.04.16l수정2018.04.1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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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염재보 의병장은 안담살 장군의 부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분으로 보성의병 전투 중에서 가장 큰 전투마다 모두 참여한 용장이다.

한말 의병활동을 한 고장으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곳이 우리 보성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일어난 1907,8년의 의병활동은 우리 보성이 의향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항일의 기운이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1910년 한일 강제병탄을 당하자 우리 선조들은 의를 위해 다시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염재보 의병장은 안담살과 함께 을사늑약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선 의병장이다. 병탄이 이루어지기 두달 전인 1910년 6월10일 순국하셨으니 참으로 애달픈 시절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쓰신 선조이다.

▲ 염제보 의병장의 공적비 염제보 장군이 큰 공을 세운 동소산 입구에 서있는 공적비

염재보 의병장은 자신의 고향이자 늘 활동하던 무대인 양가랭이재<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때문에 양 가랑이를 벌린 형국이라고 붙여진 이름>에서 일본군을 끌어들였다. 두 갈래 길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길이 없어 갈팡질팡하는 일본군을 섬멸시키는 작전으로 크게 이겼다. 지리에 밝은 우리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였고, 일본군들이 낯설어하는 점을 활용하였으니, 이는 게릴라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작전이 아니겠는가?

군사학을 배우거나 전수 받지도 않은 의병으로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그 분들의 용기와 지혜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의병용장 염재보<簾在輔>의 혈전기 1

염재보는 1868년에 보성군 문덕면 내동 부락에서 염종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지는데 관심이 많았다. 직접 만드는 것도 좋아하였는데, 특히 총포에 관심이 많아 제작, 조립은 물론 사격에도 능수능란 백발백중의 묘기를 보일 정도였다.

성격은 강직하고 온유하여 강함에 억눌리지 않고, 약한 사람은 부축하여 주는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그가 30세에 접어들면서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사조약, 정미년 7월의 조약 등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횡포는 날로 노골화 되어 가고 있었다. 애국심에 불타는 공은 나라의 이런 꼴을 보고 의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몰래 동지들을 모으는데 온힘을 다하였다.

1906년에야 곡성의 면암 최익현 선생과 비로소 뜻이 통하여 의거를 맹세하고, 최익현 선생의 격문<의병으로 나서자는 통지문>을 널리 퍼뜨려 의병을 모은다. 1908년 봄에 지혜와 담력이 있는 안규홍을 대장으로 삼고 자신은 부장을 맡았다.

▲ 동소산 자락에 있는 저수지 둑에서 동소산을 배경으로 찍은 탐방단 일동

손덕오, 김도규, 임민호, 소천술, 장윤지, 염치명, 박활, 김구희, 임정현, 안군명,염규범, 안찬재, 임재명, 황봉대, 정기찬 등 50여 명의 찬동을 얻어 의병대를 창설하고, 무기를 정비하여 실제 전쟁에 나섰다. 그 후 직접 싸운 사실들 중 중요한 것들만 간추리면,

⓵ 1908년 3월에 미력면 석호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비밀을 지키는 법, 군으로서 할일, 적을 무찌르기 위한 전략, 어떻게 부하를 가르치고 이끌 것인가‘ 등을 가르쳤다. 실제로 병사들을 훈련 시켜서 단 시간 안에 어느 군사에 지지 않을 정예의병대를 만들었다.

⓶ 1908년 3월 중순 문덕면 동소산에서 의병대를 훈련하면서 방침을 확실히 정하였다. “국권수호<나라를 지켜내자>” 안민보호<국민을 편안하게 보호하자>“ ”토색엄금<권력을 휘두르며 백성을 괴롭히는 임을 엄히 금한다.>“ 간두<奸蠹:좀 같은 간신들>과 창도<창(亻+長)導<군을 갈팡질팡하게 이끄는 사람>을 죽이며, 왜구<倭寇>의 초류<噍類>(일본 도적들을 본받아 행하거나 말을 하는 일)도 금한다.

⓷ 1908년 3월 23일, 조성으로 행군하여 지방백성들을 괴롭힌 사람들을 몰아냈다.

⓸ 3월 26일 득량 파청의 비둘기 고개 대첩에서 맨 앞장을 서서 지휘하여 적 제8중대장 영호구웅<永戶久雄>을 비롯한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중대장 영호구웅의 지휘검을 비롯한 많은 무기를 빼앗아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대원사에 개선하였다.

⓹ 1908년 4월 29일 대원사에서 적 헌병기습부대의 활동을 사전에 대비하여 역으로 적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여러 명이 사살되자 도주하여 또다시 큰 전과를 올렸다.

⓺ 4월 7일에 문덕면 가령재에서 유격전을 벌여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⓻ 4월 13일 화순에 주둔한 적 헌병과 동복면 운월치에서 교전을 하였다. 12시간의 격전 끝에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아군도 우산리의 박활이 전사했다.

⓼ 4월 26일 복내 서봉산에서 새벽에 군대를 점호하고 있던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서 아군 조병기가 거느린 수명이 전사를 하였다. 안대장과 둘이서 고지를 점령하고 적 수명을 사살한 후 포위망을 돌파하여 퇴각시켰다.

⓽ 7월 28일 적 기마부대<도변정추부대>와 순천지구 주둔 헌병대가 힘을 합쳐 합동작전을 펴 우리 의병을 공격하였다. 이들을 문덕면 진산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우리 아군의 탄환이 떨어져 더 이상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⓾ 8월초 복내 원봉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기습하여 여러 명을 죽이고, 주둔 막사를 불태우니 적은 장흥으로 물러갔다.

파청, 진산, 대원사, 양가랭이재, 운월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서봉산 전투에서 크게 참패하였다. 이에 지지 않고 흩어진 진영을 다시 일으켜 원봉기마주둔소를 야간에 습격하여 일본주둔군을 사살하였고, 나주 남평까지 진출하여 거성동 전투에서 일본 헌병들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한일병탄이 강제로 이루어지기 꼭 1년 전인 1909년8월29일에 남한토벌대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었고, 이듬해<1910년> 6월 10일에 순국하였다.

▲ 큰 전적을 올린 양가랭이재의 현장. 양가랭이재는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을 이용하여 지리에 어두운 적들을 유인 큰 전과를 올린 곳이다

의병용장 염재보<簾在輔>의 혈전기 2

⑪ 9월 13일 보성, 순천 양 지구 주둔 병력과 문덕 외가령에서 적고 교전 수십 명을 포살하였다.

⑫ 11월 1일 아군 100여명을 인솔하여 흥양주둔 헌병청을 습격하여 소각하였다.

⑬ 11월 12일 화순주둔 헌병을 몰아내기 위해 행군을 하던 중에 정보가 누설되어 되돌아왔다.

⑭ 1909년 2월초 장흥 세무감독청이 보성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몰아내었다.

⑮ 장흥세무감독이 헌병의 호위를 받아 복내 평주에 주둔하며 민가 수십 호를 불 지르고 주민을 학살하는 등 민심을 교란시키자 곧장 기습작전을 벌여 소탕했다.

⑯ 2월 12일 어머니 상을 당하여 상을 치르는 중에 적군은 병력을 증강시켰다. 정탐과 수색을 하면서 친척과 부락민들을 압박하니 이 틈에도 변장을 하고 적들의 동태를 살피었다.

⑰ 4월4일 유우삼 분대를 비무장으로 복내시장에 몰래 들어가게 하여 적 3명을 방망이로 타살하고, 많은 병기를 빼앗았다.

⑱ 4월 20일 적 7중대와 득량 박실에서 교전하여 대장 평정탄시<平井灘市>이하 수십 명을 잡거나 사살하고, 많은 무기를 빼앗았다.

⑲ 6월 초순 흥양 헌병대와 마륜에서 맞붙어서 싸웠으나 싸움이 이롭지 못하자 물러섰다.

이외에도 여러 번의 싸움과 의병을 일으킨 전후로 많은 시체를 거두어 장례지내주고, 부상자는 손수 약을 조제하여 치료하여주었으며, 특히 총과 칼, 탄환까지 손수 만들어 보급해가면서 싸웠다.

겨우 50여명으로 시작한 의병활동은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많은 싸움에서 피 흘려가며 온 힘을 다했으나, 1909년 8월 왜적은 2개 연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각 지역을 포위하였다. 우리 의병들은 탄환도 떨어지고 군수물자도 공급이 되지 않아 적과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8월에 의병을 해산하고, 안대장에 이어 1909년 9월 12일에 붙잡혀 광주에 수감되었다. 1910년 3월 대구로 이송된 후 6월 12일 42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씨부인과 수옥, 승옥, 준옥 삼형제를 다 잃었으며, 적 8중대장의 지휘검은 3세손인 염철호가 보존하고 있다.

<참고 : 본 혈전기는 종군 서기장 염재업 의사의 “실전기”에서 발취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전자책 본문보기***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한겨레온>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79

양가랭이재를 지나 염재보 의병장의 비를 만났다. 역시 양가랭이재처럼 마을로 들어서는 세 갈래 길의 길가에 서 있는 장군의 비는 장군처럼 웅장하게 우뚝 서 있었다.

장군의 비에서 바라보이는 산이 염장군이 크게 싸워 이긴 동소산이다. 그러나 여러 번의 전투에서 싸우다보니, 이젠 더 이상 싸울 전쟁물자<총탄 등>도 없고, 오랜 전투에 지친 의병들로 정규군들과 더 이상의 싸움이 이롭지 못함을 깨닫고 의병을 해산하고 피해 있다가 1909년9월12일<일설에는 1909년8월29일로 알려짐> 남한토벌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광주에 수감 되어 있다가 대구로 이송되어서 이곳에서 1910년 6월10일에 순국을 하시고 말았다.

끝까지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오신 우리 고장의 의병용사들과 의병장들의 자랑스러운 의병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어른들의 임무가 아닐는지........

2017.12.03.22:52‘<3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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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paper.net/ksuntae/1110527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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