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 생활이 어려워 고모님 댁에 의지하여 살던 법화리 고모 집. 이 고모 댁의 골목 입구에 안 장군이 살던 집터가 있었으나, 너무 작아서 동네골목길을 확장하면서 사라져 버리고 두 사람이 설 수 있을 만큼 정도의 작은 터가 남아 있었다.

의병장 안규홍은 안담살 장군, 담살이 장군 등의 별칭이 붙은 의병장이다.

본래 안 씨들의 집성촌인 택촌에서 태어났지만, 10살이 채 안 된 어린 시절에 택촌을 떠나 문덕면 동산리 법화 마을에 사는 고모 집으로 어머니와 함께 오게 된다.

고모 집은 법화마을에서 가장 논밭이 많은 부잣집이어서 머슴과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까지 두고 살았다. 어린 규홍은 아무리 고모 집이라지만, 그냥 얻어먹고 사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신 어머니의 말씀대로 어리지만 집안일을 하는 담살이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담살이란 우리 고장에서는 나이가 어리고 약해서 어른들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할 수가 없는 어린 머슴을 일컫는 말이다. 대부분은 그의 기운이나 몸의 자람에 따라 새경<머슴의 품삯>이 결정 되는데, 아주 어린 12~14세 정도는 어른의 1/5 ~ 1/3정도<쌀 2~3가마>이고, 조금 더 나이 들어서 청년 축에 들기 전인 14~17세는 절반 정도<쌀 5~6가마>를 받고, 17~18세가 되어서 기운이 세어지면 시험을 보게 된다.

보통 어느 마을에나 정자나무 아래에 들독(드는 돌)이라고 부르는 돌멩이가 하나씩 있는데, 한 아름 정도나 되는 크고 무거운 돌을 놓아두고 있었다. 이 돌이 바로 어른으로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를 결정하는 시험도구이었다. 나이가 되어 이 돌을 어깨에 올리거나 등 뒤로 집어 던질 수 있으면 이제 상 일군<어른일군>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래서 젊은 청년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 돌을 들어 올리는 시합을 하곤 하였다. 물론 이 돌을 든다고 모두 어른으로 대우하고 새경도 12가마 정도를 다 받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농사일을 할 때 품앗이를 하면 어른들과 동등한 1:1의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어린 규홍은 어려부터 고모 집의 담살이 생활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어른이 다 되도록 까지 본명보다는 ‘담살이’로 통했던 것이다.

▲ 안규홍부대의 사진. 어떻게 남아있는 사진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안규홍 부대의 사진으로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 안규홍(安圭洪)의 의병활동연혁

○ 1871(고종 16)1911. 5. 5. 보성읍 우산리 택촌(宅村)에서 출생하였다.

○ 1908년(융희 2) 2월 동소산(桐巢山,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뒷산)에서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된다. 부장에 염재보(廉在輔), 참모장에 송기휴(宋基休), 선봉장에 이관회(李寬會), 좌익부장, 유격장, 좌우참모, 서기, 포량관 등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보성을 중심으로 고흥․장흥․순천․여수․곡성․남원․구례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 1908. 3. 8 파청(巴靑, 예당1리 버들고개, 일명 구현) 전투와 진산(眞山, 문덕면 귀산리)전투에서 승전하였고, 원봉(圓峰, 복내면 복내리)에 주둔 중인 헌병기마주둔소를 기습하여 적 50여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3. 29 대원사(大原寺, 문덕면 죽산리)전투를 비롯하여 운월치(雲月峙, 화순군 동복면) 전투에서 일본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5. 19 서봉산(棲鳳山, 복내면 진봉리)전투에서 참패하자 은거하였다. 9. 13 다시 일어나 가령치(可嶺峙, 문덕면 병치)전투에서 대승을 하였다.

○ 1909(융희 3). 3. 8 인근의 전해산(全海山), 심남일(沈南一)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펴 나주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일본 헌병 7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 같은 해 8. 29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9. 25 귀향하는 길에 부장 염재보 등과 법화마을에서 체포되었다.

○ 1911. 5. 5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시었다.

○ 득량면 예당 1리 파청(巴靑)에 승첩비를 세우고,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규홍은 마을 청년들과 어울려 동소산에 자주 가서 화목작업을 하였기에 동소산 지리에 밝았다. 의병장이 되어 일본의 헌병이나 군인들과 전쟁을 치를 때에 익숙한 지리 조건은 승전을 위한 좋은 정보가 되었다. 동소산 전투와 양가랭이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이런 지리적인 정보를 가진 덕분이었다. 적을 유인하고 공격할 장소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승전할 수 있었다.

◆ 동소산(桐巢山)

○ 위치 :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뒷산

○ 1908년(융희 2). 2월 담산(澹山) 안규홍 의병대장이 창의(倡義)하여 의병부대 를 편성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한 의병의 산실.

▲ 당시 상당한 재산가였던 안규홍 의병장 고모의 집

무신 창의의 안규홍<安圭洪>의병장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은 뒤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왜병들은 지방까지 나타나서 감시를 하곤 하던 1907년<융희원년> 정미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보성읍 우산리 출생이었지만, 문덕면 법화리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던 안규홍이 젊은 나무꾼 10여 명과 같이 나무를 하러 가던 중에 왜병 5명이 총을 세워놓고 식사를 하다가 이들을 보고 의병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들은 대답을 하는 척 가까이 다가가서 총을 빼앗아 왜군들을 죽인 후, 의병활동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300여 명의 의병들이 함께 모여 대장에 안규홍, 부장에 염재보, 참모장에 송기휴, 양동훈, 선봉장에 이관회, 좌우를 담당할 장수에는 김도규, 임민호, 손덕호, 정기찬, 송경회, 장재창을 그리고 유격장에 안택환, 소휘천, 참모에 오주일, 라창운, 서기에는 임정현, 군수 책임자인 군수장에는 박제현, 연락과 첩보에는 유우삼 등으로 결정을 하여 군부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여러 곳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공을 세웠는데, 3월 26일 적의 중대장 영호구웅(永戶久雄)이 인솔하는 왜병 육군 8중대가 순천에서 보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듣고, 득량면 파청 부락 앞의 비들고개<鳩峙>에 전 병력이 매복을 하였다가 지나가려는 왜병장 영호대장 외에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의병의 고장 보성군에서 가장 유명한 파청대첩이다.

안대장은 이곳에서 왜병들에게서 빼앗은 무기 등 수많은 전리품을 안고 문덕면 대원사로 향하였다. 그 후 문덕면 양가랭이재, 동복 운월치, 복내 서봉산 등의 대소 접전에서 왜적들을 수없이 체포하거나 사살하였고, 그해 7월 28일 순천지구 주둔헌병대와 기마대 대장 도변연추(渡邊廷秋)가 합동으로 우리 의병을 습격하자, 이들을 문덕면 윗 진산으로 끌어 들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파청대첩에 이은 큰 전공으로 기록되었다.

그 후로도 십여 차례의 격전을 치루면서 많은 의병은 물론 라창운, 박활, 이관회, 안택환, 임정현, 이영삼, 소휘천, 박우진, 송기휴 등의 간부들도 전사하자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왜적들이 전술을 바꾸어 의병들의 가족들에게 갖은 협박을 가할 뿐만 아니라, 탄환과 군수물자가 끊기어 더 이상 싸울 힘을 잃자 1909년 8월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 해 9월에 문덕면 법화리에서 정기찬, 손덕호와 함께 왜병에게 체포되었고, 1912년 5월5일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담산 안규홍대장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내의 대가인 복내면 반곡 안극 참봉과 미력면 송림 박보현 참판이 안규홍의 창의에 찬동하여 그 배후에서 군수품을 공급하였는데, 이를 숨기기 위하여 안 참봉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학장소인 일송정을 불 지르는 등 두 분에게 거짓 협박도 하였다.

또 파청대첩 이후에 합세한 강성인이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고 군사의 규칙을 자주어기니, 안 대장은 강의 목을 배어 의병을 일으킨 정신과 군사의 규율을 다시 바로 잡았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 파청대첩지에는 전승비를 세웠고, 정부에서는 1963년 2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을 그 손자에게 수여하여 안대장의 충성스러움을 칭찬하여 영원히 빛나게 하였다.

<참고 : 韓國獨立運動史, 全羅南道史, 澹山實記, 寶城郡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전자책 본문보기***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한겨레온>[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사] 25. 무신 창의 안규홍(安圭洪) 의병장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76

안담살 장군은 일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전장에서

“안담살이 나타났다!”고만 외쳐도 일본 군인이나 헌병들은 기가 죽어서 피하기만 할 정도 이었다.

이러한 안담살의 위력은 보성 주변의 고흥, 화순, 장흥까지 미치게 되어서 안담살 장군의 부대는 하루사이에 장흥과 고흥에서 전투를 하는 등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활약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담살 장군의 전승 기록을 보면 실제로 안담살이 없어도 안담살이 나타났다는 말만으로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가기도 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서울에선 고관대작들이 나라야 어찌되든 일제에 협력하여 남작이니 공작이니 일제의 벼슬을 받고, 수만 평의 농토를 은사 받았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활보할 때에, 국가의 은혜는커녕 핍박을 받고 살던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나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것이 한말의병정신이었다. 그런 대부분의 한말의병들은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고, 임금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어선 것이었다.

임란이나 호란 때에는 내 고장 내 부모 내 가족을 외적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지만, 한말의 의병은 그보다는 오직 나라를 구한다는 애국충정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안담살의병장은 우리나라 어느 고장에서도 볼 수 없는 하층민에 속한다할 머슴이라는 신분으로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섰다. 담산 안규홍은 우리 의병의 가장 빛나는 별이요. 우리 역사에 가장 위대한 결심을 한 분이라고 추겨 세워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분일 것이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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