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도읍지의 이동

평양성이야기는 고구려의 실존 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참고합니다.

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동명성왕 주몽에 관한 내용은 세곳의 출처에서 거의 일치합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각 왕들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오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중국 자료에 근거하였습니다.

기원전, 중국의 전한 말기에 동명성왕(재위 BC 37~BC 19)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한 후, 홀본(졸본)에서 소서노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부여에서 자란 주몽의 큰아들 유리명이 들어와 태자가 되자, 소서노는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대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아마도 주몽을 따르는 세력과 홀본부여의 소서노 세력이 갈라지고, 건국 경험이 있던 소서노는 자기 세력을 이끌고 요동을 지나 한반도로 들어온듯 합니다. 비류는 인천지역의 미추홀에 정착을 하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자리를 잡습니다. 비류가 자리 잡은 미추홀의 환경이 열악하여 백성들이 온조의 위례성으로 떠납니다. 한강과 임진강 유역을 선점한 온조는 이후 해양세력으로 크게 성장을 하지요.

여기서 소서노 일행이 통과한 지역이 중국사서에서 한사군으로 언급한 지역입니다. 대규모의 가솔을 거느린 집단이 이동을 하는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봐야합니다.

소서노 세력이 떠난 홀본에서 유리왕도 남하를 합니다.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삼국사기)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만 기록이 되어있지요.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지안(集安, 광개토왕릉비와 장군총이 있는 지역)으로 추측합니다.

만약 광개토대왕릉비가 나오지 않았다면 대동강 평양 부근으로 유리왕이 들어와 고생하는 이야기 줄거리가 중국 사료와 어울렸지요. 이 지안을 일본 쪽 자료에서는 환도성으로 보고, 중국에서는 평양으로 보기도합니다. 25대 평원왕이 천도한 장안성을 대동강유역 평양으로 보기 때문이지요.

▲ 일본에서는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반도를 지배하였다고 본다. 국내성과 환도성을 같이 본 듯. 사진: 위키피디아(ASIAN HISTORY)

요동반도를 유리왕 때부터 고구려가 지배하였다고 하면 모든 역사서가 뒤엉킵니다. 광개토대왕 이전의 자료들을 보면 요동을 건드렸다가 엄청 당합니다. 11대 동천왕(재위 227~248)은 유주자사 관구검의 반격으로 환도성을 뺏기고 남옥저로 도망갔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킨 15대 미천왕(재위 300~331)의 아들 16대 고국원왕(재위 331~371)은 후연의 공격을 받아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 왕비를 빼앗깁니다. 나중에 조공을 바치고 다시 찾아오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리고 371년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전투에서 싸우다 죽지요. 이렇게 사서에서는 턱없이 허약한 고구려가 1차 세계대전 이전 최대의 병력을 동원한 수나라와 당나라를 상대로 버텨냅니다. 그것도 전성기가 한참 지난 고구려를 상대로 자기네들 땅이라고 기록하는 요하와 요동반도로 들어가지도 못하고요. 그래서 편집을 한 내용이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에 있다가 광개토대왕이 요동반도를 차지하였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런데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공격하거나 중국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글이 안 나옵니다. 아버지의 빛나는 전공을 비석에 새기면서 왜 만주벌판 요동반도 저 너머 거대한 땅을 정복한 기록은 없고, 하찮게 여기는 백제와 왜를 정복한 기록만 있을까요?

중국 사서를 보고 써내려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기록과 아버지 사후 2년 만에 비석을 세운 비문 내용을 비교하면 어떤 자료가 진실에 가깝겠습니까? 후세 학자들은 비문이 과장되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볼 근거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만 보면 한사군 특히 낙랑은 대동강 유역 평양이 확실합니다. 거기에다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요. 그럼에도 삼국사기에는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매번 요동을 공격하면서, 중국을 방어하기 위해 요서에다가 성을 쌓는다고 나오거나, 요동성에 동명성왕의 사당이 있다는 곳도 보입니다. 자세한 기술을 생략하는 대신 실제 중국의 군현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큰 틀을 알아야 작은 부분의 진위를 가릴 수 있지요.

유방이 한나라를 통일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하는 한나라 무제 때까지는 과거의 봉건적인 군현제였습니다. 건국공신들에게 몇 개의 현이 딸린 군을 봉읍지로 주었습니다. 행정상으로 군의 우두머리는 군수(郡守)지만 태수(太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기의 제후들은 군수나 태수 대신 과거 봉건제와 마찬가지로 왕이라 칭했습니다.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는 황제는 제후가 죽으면 일부 현을 빼앗아 봉토를 줄였습니다. 그러자 불안한 제후들이 뭉쳐 반란을 일으켰지요.

전한 경제 때(BC 154년) 오와 초를 포함한 7개 나라(군)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오초7국의 난이라 하며 아주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지요. 난을 진압한 후 제후들에게 상속을 인정하는 대신 봉토를 장자상속이 아닌 자식들에게 분배하게 합니다. 아들들이 같은 영토를 가지고 나누다보면 자연히 분란이 생기고 힘은 약해지지요. 한 무제는 군현을 중앙정부에서 통제하고자 군현 위에 주(州)를 설치합니다. 전국의 모든 군현을 13개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중앙에서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군권을 행사하도록 명실상부한 군현제를 만들었습니다. 자사는 한국의 도지사와 유사하며 군을 지휘합니다. 무제가 만든 이 13주의 자사는 후한 이후에야 실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13개 주의 동쪽 끝에는 유주(幽州)가 있어 한사군 등이 모두 포함되었지요. 그러다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를 만들고 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편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요동군과 낙랑군 등을 공손도가 점령했지요. 자사는 당나라 때 절도사로 바뀌면서 안록산, 사사명 등의 군벌세력으로 성장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서야 요서(현 조양시)지역을 실제로 통치합니다. 그러면서 평주 오른쪽으로 새로운 주가 설치되는데 바로 영주(營州)입니다. 즉 이전의 요서지역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중국이 아니라 한사군 혹은 요동국(군)이거나 고구려 혹은 다른 홍산문명을 공유했던 민족이었을 것입니다.

▲ 고구려 도읍지의 이동경로 (빨간 화살선). 좌측 원의 영주는 수와 당이 통일하면서 추가된 지배영역. 사진: 위키피디어 (고구려와 당의 전쟁도)

유리왕이 북쪽의 홀본부여에서 요하를 따라 남하하여 ‘국내로 천도하여 위나암성을 쌓은 곳’은 지안(集安)이라기보다는 요동반도안의 요동성과 그 위성으로 보입니다. 요동성은 평지에 있는 도성으로 서울의 한양도성과 같은 의미이고, 주변의 신성, 현도성, 개모성, 백암성 안시성은 도성을 방어하는 위성으로 봐야합니다. 즉 서울의 남한산성, 북한산성, 행주산성과 같은 개념이지요.

평양은 평지에 있는 비옥한 땅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시조왕인 동명성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성의 의미로 썼다고 여깁니다. 고구려에서는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고 하고, 중국 사서들에서는 국내성, 환도성, 동황성, 장안성등으로 다르게 표현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초창기는 요동성을 평양이라고 했고, 15대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군을 멸한 뒤 중국 쪽의 잦은 침략과 도발에 위협을 느껴 16대 고국원왕 때 동쪽 지안(集安)의 환도성으로 옮겼다고 보입니다. 이곳에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요동반도의 해안 전역과 한반도의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나서 현재의 평양인 장안성으로 25대 평원왕이 천도를 합니다.

삼국사기에 도읍을 옮겼다는 고구려 왕들은 2대 유리왕, 10대 산상왕, 11대 동천왕, 16대 고국원왕, 20대 장수왕 마지막으로 25대 평원왕이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장수왕의 평양천도입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옮겼다가 죽을 때 지안(集安)으로 가서 묻힐 장군총을 쌓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평원왕이 옮긴 장안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대동강 평양입니다.

따라서 장수왕은 지안(集安) 환도성의 위성에서 도성을 다시 정비하고 동명성왕의 사당을 옮겨온 후 다시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고 해석을 해야겠지요.

광개토대왕비문에 첫 전공기록이 영락(광개토대왕 연호) 5년 패려를 공격하여 3개 마을과 600~700개 군영을 격파하고 무수한 우, 마, 양떼를 노획합니다. 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 候城、力城、北豊、王備獵 遊觀土境,田獵而還 -개선하는 길에 양평 큰길을 지나 동쪽으로 후성, 역성, 북풍으로 왔다. 왕은 사냥을 준비하고 자기의 영토 경계를 유람한 후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고 하였습니다.

비문에는 익숙한 한자 지명이 거의 없는데, 우리가 알 수 있는 한자 지명이 양평입니다. 양평은 요동군에 속하며 동이도위부가 설치된 평주의 치소(治所)로 미천왕이 낙랑을 멸하자 요서로 옮겼다고 진서 지리지에서 언급하지요. 또한 구성(九城)현도 요동군에 속했습니다. 이를 보면 요동반도는 광개토대왕 이전에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평주, 즉 요서지방은 서류에서만 중국이 지배하는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1980년대 대만에 가서 보니 자유중국 총통은 전체 중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국무회의를 하면 중국전역의 성장들이(대만사람) 모두 참석을 하지요. 대만에는 따로 대만성정부가 있고, 성도는 난터우(南投)시에 있습니다. 타이베이의 총통부는 중국을 통치하는 행정부였습니다. 고궁박물원에는 원, 명, 청의 황궁이었던 자금성안의 모든 유물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또한 1971년까지는 대만이 유엔의 상임이사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만이 실질적으로 중국을 지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영락 5년 이후 비문의 대부분은 백제를 토벌하는 내용입니다.

영락 6년 백제를 쳐서 58성 700개 마을을 점령하고, 영락 8년 가태라성에서 300명을 잡아오고, 영락 14년 왜가 대방을 침입하자 왜구를 격파하고, 17년 백제 사구성을 치고, 20년 동부여를 치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비문에는 평양을 3번 언급합니다. 사용한 한자도 땅, 흙을 의미하는 壤 대신 볏짚을 뜻하는 穰을 사용했습니다. 3번 사용한 평양 중에서 마지막 한 번은 사후 묘지기를 차출하는데 평양성민중에서 11가구를 뽑으라는 내용이고 나머지 두 번은 광개토대왕이 정벌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1) 영락 9년(339)기해년에-百殘違誓與倭[和]通。王巡下平穰-백제가 약속을 어기고 왜와 내통하자 대왕이 평양으로 내려간다. (환도성에서 요동성으로 간 듯)

2) 영락 14년(404) 갑진년에 왜와 백제가 대방을 공격하자-王躬率□□ 從平穰□□□鋒相遇-대왕이 몸소 □□를 거느리고 평양을 떠나 □□선봉병력과 맞닥뜨리자 크게 격퇴했다는 내용입니다. (대방은 요하 서쪽으로 추측)

이 내용을 보면 평양이 백제의 영역과 가까이 있었고 자주 충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백제는 백잔(百殘, 포악한 놈), 왜는 왜구(倭寇, 도적)라고 부르는 걸 보면,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와 왜였습니다.

아마도 백제는 당시 서해, 요동해, 발해 지역의 해상을 완전히 장악한 강력한 해양국가로 보입니다. 광개토대왕에 이어 고구려 최 전성기의 장수왕도 계속 백제를 압박해 남으로 내려갑니다.

고구려 국력이 전성기를 지난 26대 영양왕 때인 598년 장군 강이식이 산해관, 당시의 임유관을 선제공격하여 수문제가 30만 병력을 끌고 침공하지만 요동성을 넘지 못하지요.

한국고대사-유물이야기를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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