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임란의사 추모백일장

  

지난 5월 12일 토요일, 경주 황성공원 내 임란의사(壬亂義士) 추모탑 아래에서 제11회 추모백일장이 개최되었다.

경주문인협회 박완규회장님의 개회사

임란 당시, 경주는 남북한 통틀어 전국에서 최초의 의병(네이버 위키백과 참조)을 조직한 곳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침략자는 우연히 삽시에 모인 무리가 아니다. 철저한 계략과 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왜군들은 삽시에 우리나라 전역을 짓밟았다. 경주성도 무참히 함락되고 말았다. 그 해 6월 9일, 경주 12개 읍면 대표 132명은 문천(현재의 남천)에서 은밀히 모였다. 문천은 신라의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반월성 아래를 휘감아 도는 물길이다. 수심이 깊지 않고 모래벌판으로 이뤄진 문천은 각지에서의 접근성이 용이했을 것이다.

이들은 나라를 되찾아야한다는 일념으로 창의(創意)를 맹세했다. 전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자발적 의병들의 회맹(會盟)이었다. 전문적인 훈련조차 못 받고, 변변한 무기도 없는 백성들이 오로지 나라를 되찾는 일념으로 일어선 것이다. 동도(東都), 즉 경주를 중심으로 수 백리 안에 목숨을 버리겠다는 의병들이 구름처럼 흘러와 모였다.

향토의 지리에 밝고, 거룩한 뜻이 같았기에 연맹을 이룬 의병들은 경주의 외곽에서부터 왜군들을 공격했다. 7월에 인근 영천성을 되찾고, 9월에는 경주성을 탈환했다. 이 전투는 경주사람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앞세운 유격전이었다. 특히 울산 학성(鶴城)대첩과 경주 계림(鷄林)대첩은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흙을 일구던 농민들이 대다수인 의병을 다스린 선봉에 전직 관료나 학자들도 있었지만, 농투성이 의병장들도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시기하거나 폄하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의 예를 갖추었다 한다. 종교인들도 큰 역할을 했다. 사명대사나 서산대사 등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려던 승병들의 참여도 잊어서는 안 될 역사다.

▲ 국방부장관상 산문 권미지(선덕여고 1학년 6반) 수상자와 임란의사추모사업회 김병호 회장님

 

▲ 전쟁기념관 관장상 운문 장여경(선덕여고 2학년 8반)수상자와 임란의사추모사업회 김병호 회장님

늦어도 너무 늦은 2001년, 문민정부를 거쳐 민주정권이 들어선 뒤에야 추모탑이 세워졌다. 굴곡진 우리의 현대사에는 독재정치라는 반민주적인 장기집권이 있었고, 의병은 반국가적인 단체로 홀대를 받아왔다. 독재집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민중봉기다. 물정에 어두워 아둔한 국민들이라야 오래 다스리기가 쉽다. 지금도 역사관이 올바르지 못한 친일, 또는 친미 찬양의 일부에서는 구국으로 목숨을 버린 의로운 의병을 무식한 천민들로, 어영부영 휩쓸린 데모꾼 일당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무지하지만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병들을 지휘한 선봉의 의병장을 반국가단체의 우두머리나 도적떼의 수장쯤으로 취급하는 부류도 있다. 주권의식을 상실한 사대주의가 왜곡된 이념으로 포장된 불행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후 6년 간 지속된 왜군의 침략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붉은 꽃잎처럼 스러져갔다. 우리는 무명의 의병들부터 용맹스러웠던 의병장들에 대한 재인식을 가져야 한다. 애국과 충정의 진의를 바르게 기술하여 후대에게도 자랑스러운 국민성을 심어야한다.

불행한 식민지까지 거치면서 겨우 되찾은 우리의 국토는 70여 년 분단이라는 기막힌 사실을 역사로 썼다. 서슬의 휴전선에 올 봄에는 지우개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있다. 통일, 온전한 국토복원과 한민족 한겨레의 평화와 번영, 생각만으로도 목이 메는 봄이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