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기] 14 수리중이어서 어수선한 임계영 사당

사당은 보수공사중. 공사장이 되어 있어서 참배조차 어려웠다. 김선태 주주통신원l승인2018.05.18l수정2018.05.1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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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안담살 묘소를 나선 후 군내도로를 이용하여 존재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조성면 축내리의 임계영 사당이었다.

사당은 관리가 안 되고 있어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은 닫혀 있고, 출입할 방법이 없었다. 이 고장에 사시는 분이 허리까지 자란 잡초들을 제치고 담을 따라 돌아가서야 간신히 문을 열었다.

任啓英 祠堂

○ 1528년(중종 23)~1597. 10. 27. 鳥城面 築內里에서 출생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竹川 朴光前, 綾州縣令 金益福, 進士 文緯世 등과 倡義하여 全羅左義兵將에 추대되어 7월 보성․장흥․ 순천․낙안 등지에서 병사 1,000여 명을 모집하여 8월에 全羅右義 兵將 崔慶會와 합세하여 錦山(충남)과 茂州(전북) 전투에서 대승

○ 같은 해 8. 21 제1차 星州城 전투에서 승전하고, 10. 5부터 10. 10까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晉州大捷에 참전

○ 1593. 2 扶桑縣(경북 김천시 남면)에서 왜적 400여 명을 격살하고 포로 40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움

○ 1597년(선조 30) 楊州(경기도)․定州(평북)․海州牧使와 長湍(당시 경기도 현 민통선 내에 위치)․ 淳昌郡守(전북)를 역임

○ 1864년(고종 2) 兵曹判書를 追贈

○ 임계영장군 기념 사업회 주관으로 총 사업비 20여억 원을 투입 祠堂을 건립

안으로 들어서니 정리가 안 된 사당은 공사 중이어서 그런지 여러 가지 공사용품들이 나뒹굴고, 마당은 풀이 제멋대로 자라서 폐허를 연상하게 하였다. 공사 중이라지만 관리가 안 되어 불편한 마음으로 사당을 돌아보는데, 이미 퇴락한 마을의 모습처럼 이 사당도 관리부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섭섭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맨 위쪽의 사당 건물은 지금까지 단청 공사를 하고 있는지, 다시 하는 것인지 비계가 매어진 체 단청용 페인트 통들만 담장 옆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사당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누구 한 사람 말을 붙일 수도 없고, 어느 구석에 유물관 같은 것이라도 있는지 더 이상 볼 것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잡초만 무성한 담장 밖의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의병의 역사를 찾아서 이렇게 여기저기 사당을 짓고 유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관리문제가 생기겠구나. 이런 것보다 차라리 의병기념관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한 군데 모으고, 오늘 우리처럼 답사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임계영<任啓英>장군의 창의 활동

임계영 장군은 할아버지가 판서<지금의 장관>를 추서<실제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살아서 하신일 인정이 되어 죽은 뒤에 벼슬을 내리심> 받을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할아버지 임광세는 관산군으로 추서 되었으며, 아버지 임희중<자:국담>은 진사를 하신 분이었다.

임계영 장군<자:홍보, 호:삼도>은 1528년<중종 23년>에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에서 태어나셨다. 타고나신 성품이 용맹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덕이 다른 사람들을 감싸 안는 분이었다. 더구나 효심이 강하고, 친구들에게도 진심으로 대해 줌으로서 벗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이런 훌륭한 분이었으므로 군내에서 모든 선비들의 추천을 받아 정철 전라도 감사로부터 상을 받기도 하였다. 좀 늦은 나이인 49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진성현감이 되었다. 현감 시절 은혜를 베풀고 고을을 잘 다스려 백성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는 현감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정세는 어지러워지고, 권력을 쥔 신하들의 못된 짓거리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자 사직을 한다. 귀향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위태로운 나라를 늘 걱정하였다.

살고 있는 마을이 가뭄에 시달리는 것을 보자 이를 막기 위하여 축내 앞들에 큰 저수지<축내대지>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 세 개의 섬을 만들고 자신의 호를 스스로 삼도<세 개의 섬>이라고 지었다.

인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여 우리 국토를 짓밟자 선조임금은 의주로 몽진<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난을 감> 하였다. 이때에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임금을 따라 함께 피난길에 오르지 않고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버렸다.

그러나 우리 보성에서는 큰 스승이신 박광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에 임계영 장군도 뜻을 같이하여 능주 현령 김익복과 진사 문위세 등과 함께 보성관아에서 모임을 갖고 의병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대장으로 추대된 임계영 장군은 박근효<박광전 선생의 장남>를 참모로, 정사제를 종사관으로 삼아서 의병대의 진용을 갖추었다. 임계영 장군은 보성 의병을 이끌고 순천으로 진군하여 순천을 지키고 있던 장수 장윤을 부대장으로 삼고, 수천 명의 병사와 말을 앞세우고 남원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남원의 부사 윤안성은 남원에 있는 많은 군사와 무기를 제공하였다. 당당한 의병부대로 정비되자 호[虎]자를 표장<군기>으로 삼았으며, 전라도 좌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다시 말해서 호랑이 [虎]자 군기를 앞세운 전라좌수영 쪽의 의병대장이 된 것이다. 이어서 전라우의병장인 최경회와 힘을 합쳐서 적의 진격을 막아서니 감히 적들이 다가서지 못하였다.

이 때 적의 주력인 선두부대와 싸우느라 힘겹던 영남의 초유사 김성일이 도움을 요청하였다. 장군은 곧 신의주의 임금에게 상소문을 보내고, 영남으로 출발하였다. 영남 땅에 들어서와 성주, 개령, 함양, 삼가의 싸움에서 연이어 승리를 하였다. 임계영 장군이 합천으로 이동하자 왜군들이 다시 성주와 개령을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싸우던 영남의병들이 왜군에게 밀려 힘든 싸움을 하자 임계영 장군은 다시 왜적들을 공격하였다. 성주에서 적들을 전멸 시키고 영남 의병들을 구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적장 모리휘원<毛利暉元>이 졸병 몇 명과 함께 도주하자 소상진과 남응길 두 사람으로 하여금 뒤쫓게 하였는데, 그만 두 장수가 적의 총탄에 맞아 순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하는 것으로 슬픈 전투는 끝이 났다.

계사년 2월 들어 부상현에서 적을 추격하여 4백여 명을 전멸 시키고, 왜군들에게 붙잡혀 있던 남녀 400여명을 구출하였다. 6월에는 창의사 김천일 등 여러 의병장과 진주성에 입성키로 한 임계영 장군은 먼저 부장 장윤을 들여보냈다. 뒤에서 군량과 무기를 조달하여 뒤따르기로 한 임계영 장군은 적에게 포위되었고, 진주성은 적에게 함락 되었다. 부장 장윤을 비롯하여 진주성을 지키던 우리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임계영 장군은 비록 싸움에서 졌지만 무너지지 않고, 남은 병력을 다시 모았다. 최억남을 부대장으로 삼아 전쟁에서 중요한 지점들을 지키면서 참봉 이굉중으로 부터 군사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 받아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이해 10월에 전란은 평정되었고, 선조 임금은 서울로 되돌아 왔다.

장군은 임금에게 우리 군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점과 진주성이 함락하게 된 것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갑오년 정월에는 전주에 주재하던 동궁 광해군의 명을 받아 변장을 하고 하동으로 몰래 숨어들어 일본 패잔병 여러 명을 토벌하였다. 4월에는 조정의 명을 받아 각도의 의병들과 함께 충용장 김덕령 장군의 부대에서 참모로 활약하다가 병신년부터 벼슬길에 올라 양주, 정주, 장단, 해주, 순창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적을 무찌르는 선봉에 서지 못함을 아쉬워하다가 70세를 일기로 동복 유마산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신 뒤에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추서 받았으며, 나라를 위한 충성스런 장수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의 후손들은 공이 살았던 귀산촌의 뒷산에 여러 칸의 천석정<泉石亭>을 세웠으나, 너무 오래 되어 낡고 허물어졌다. 지난 임인년에 12대 후손 태정이 중건을 하면서 귀산정<龜山亭>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유학을 하는 분들이 모여 충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선생을 받들어 모시는 계를 만들어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공의 신도비는 묘소가 있는 율어면 자모리 자모악에 세워져 있다.

<참고 : 湖南節義錄. 山陽三綱傳, 寶城郡誌, 三島實記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전자책 본문보기***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이 임계영장군의 기사는 한겨레온 인터넷 판에 연재로 쓰고 있는 [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사] 3번째 글로 이미 소개가 되었다.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12

임계영 장군의 이야기를 하자면 삼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시간에 쫓겨 축내제<저수지>를 찾아보지 못하고 떠났다. 섭섭한 마음에 그 쪽 동네만 바라보며 큰 도로를 따라 파청대첩을 치렀던 파청고개를 향하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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