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강정마을 문제는 국제 평화에 관한 사안입니다.”

[편집자 주] 지난 8년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에 앞장선 양윤모(59) 평화활동가가 있습니다. 그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약 8년 간 네 번의 구속과 여러 번 목숨 건 단식을 하며 아름다운 강정 해변 마을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왜 영화평론가의 길을 접고 강정에 뛰어들었을까요? 그는 지난 달 말일에도 그는 강정 행정대집행 현장에 있었습니다. 한 용역 남성이 영화평론가 양윤모 감독을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민들에게 ‘비폭력, 평화로운 저항’을 외쳤습니다. 지난 7일(토) 낮 한겨레신문발전연대의 초청으로 강연을 위해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그를 이요상 주주통신원이 만났습니다.

▲ 양윤모 평화활동가가 지난 1월 31일 단행된 제주해군기지 행정대집행 저지 활동을 한겨레 주주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난 7일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했습니다.

“양심 있는 지식인은 ‘비상식’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됩니다.”


문: 영화평론가가 제주도로 간 이유?

답: 2006년 1월,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절반인 73일로 줄인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미국정부가 한미 FTA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4대 요구'의 하나인 스크린쿼터 축소 요구를 한국정부가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시민사회와 전국투쟁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나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안성기, 장동건, 최민식 등 배우와 박찬욱 감독 등 많은 영화인과 영화관련 단체들이 이 투쟁에 동참했습니다.

스크린쿼터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투쟁 행사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006년 8월 제4회 옥천 언론 문화제에 참석해 현지주민을 포함해 홍세화 당시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신학림 전국언론노조위원장 등과 천막에서 언론 개혁 이야기 도 했습니다. 지역 행사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방이 서울에 비해 투쟁 여건이 형편없이 낙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방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자라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중앙무대에서만 활동 할뿐 지역으로 내려가서 실천하는 노력은 거의 안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열악한 고향의 현안에 지식인들이 더 많이 관심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영화계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거기서 중단하기로 하고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직을 내려놓고 이듬해인 2007년 봄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제주에서 모 대학 겸임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문: 왜 강정마을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답: 제주도로 옮겨왔지만 한동안 강정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련 내용을 전혀 모르고 지냈습니다. 틈틈이 고향 문화 체험 행사에 참여하고 주변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재직 중이던 대학의 한 후배의 권유로 외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8년 여름 강정마을 평화도보순례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 해군기지 건설 계획과 입지선정, 정부와 강정마을 주민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후 강정과 해군기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의 부당성을 알리는 주민들의 노력은 거의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중앙 언론은 고사하고 지역 언론조차 이 문제를 모른 척 했습니다. 당시 나는 우리 사회가 강정마을 주민의 노력에 대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2008년 8월 영화인들을 제주도에 불러 모아 강정마을을 알리는 첫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이때 제주출신 영화배우 김부선, 영화인 겸 연극배우 권병길, 영화감독 김경형·윤인호씨 등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고 반향 역시 크지 않았습니다.

2009년에는 제주군사기지반대 범도민대책위원회와 강정마을회 등 도내 29개 단체로 꾸려진 '김태환 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가 주민소환 투표를 실시하기도 했으나 투표율 저조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좌절감이 가득한 강정 주민들의 얼굴이 나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문: 강정에 눌러있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해주세요.

답; 당시만 해도 내가 강정과 함께 긴 시간을 함께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 고향이 직면한 부당하고 억울한 문제에 대해 모른 척 할 수 없다는 정도의 생각이었습니다. 2009년 가을, ‘이제는 제주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안 떨어졌습니다. 좌절감이 가득한 강정 주민들의 얼굴이 나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곤 커다란 소리가 내 가슴을 쳤습니다. “양심 있는 지식인은 ‘비상식’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 그 길로 짐 싸서 아예 제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곤 바로 구럼비 바위 위에 천막을 쳤습니다. 2009년 9월부터 2011년 4월 첫 구속 되던 날까지 거기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문: 첫 구속 된 날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답: 정부와 해군의 말바꾸기와 약속 안 지키기는 결국 나를 포함한 모든 강정 주민들의 불신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집요하게 마을 주민을 회유하고 분열시켜 갈등을 조장했습니다. 나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몸으로 막아야 했습니다. 해군기지 공사 현장을 찾아가 현장 소장과 몸싸움을 하고 돌을 던지는 등 공사를 저지했습니다. 결국 공사현장에서 자재 반입을 막고 현장소장을 폭행한 혐의로 2011년 4월 6일 연행되었고 8일 첫 번째 구속을 당했습니다.

당시 ‘현장 소장을 폭행 한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양심을 걸고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상황에서 강정주민과 해군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돌’을 드는 것, 그때 내가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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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상  yoyo04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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