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종군 충무공 재기의 기틀이 된 보성군, 첫 선물이 조양창의 군량미였다.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같은 면내에 있는 임계영 장군의 사당을 나서서 파청고개를 향하여 달렸다. 임계영 장군이 나서 축조한 축내저수지를 바라보면서 가는데, 일행이 산비탈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조양창 자리입니다“라고 안내해주었다.

조양창은 당시 조양현의 소재지였다. 조양현은 757년 설치된 이후 고려를 거쳐 1441년(세종 23년)까지 ​700여 년 동안 유지됐다. 이곳에는 당시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 ​외성은 석축 2255척, 높이 7척에 우물 2곳과 군량창고가 있었고, ​현을 다스리는 관아도 있었다. ​이 일대는 군사와 행정의 요충지였던 셈이다.

http://blog.naver.com/lds2032?Redirect=Log&logNo=220446420062

▲ 백의종군 충무공 재기의 길.

충무공은 전란으로 텅 빈 들판과도 같은 전라도 길을 걸으며 재기의 바탕을 보성에서 마련하였다.

조양창.

그곳은 충무공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준 곳이었다. 해군을 재건하려면 군량미와 무기 그리고 장병들을 모집하여야만했다. 그래서 충무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육로를 택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전란을 피해 백성들은 피난을 가버렸고 텅 빈 마을, 텅 빈 창고, 혹은 불에 타 먹을 수 없게 된 군량미만이 남아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길을 걷던 충무공에게 첫 선물이 되어준 군량미가 있던 곳 바로 조양창이 아닌가? 그러나 오늘은 이곳까지 볼 계획도 안 되어있거니와 시간상 들르기도 어려워 포기하였다.

조선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육로로 백의종군 길을 나선 충무공이 순천군 주암면 창촌리에 도착하였다. 이 지방의 세금을 거두어 보관하는 부유창이라는 창고가 있는 곳이어서 충무공은 이곳에서 군량미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부유창에 있던 군량미는 한 톨 남은 것 없이 불타버린 뒤였다. 왜군이 다가 온다는 소식에 병마사은 이복남이 불을 질러버린 탓이었다.

이를 본 충무공은 얼마나 실망하고 허망하였겠는가? 지금 충무공에게는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남은 12척의 배만 있을 뿐이었다.

충무공이 자신의 영역인 바닷길을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며 육로로 이동한 것은 바로 군수물자와 군량을 얻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 실망감은 더 컸을 것이다.

충무공은 순천을 지나 1597년 8월 9일에 보성 땅에 들어섰다. 우선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에 위치한 조양창을 찾았다. 이곳이 충무공에게 첫 선물을 안겼다. 바로 군량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난중일기에 이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확보한 기쁨을 적고 있을 정도이다. 이 군량미를 확보함으로서 충무공의 재기는 시작된 것이다.

http://blog.naver.com/bogirang?Redirect=Log&logNo=220673817892

충무공은 이곳에서 얻은 군량미를 잘 지키도록 한 후, 한 때 자신의 아내가 자랐던 보성읍성을 향하였다. 이곳에서 8박9일을 지내면서 읍성의 무기고에서 무기들을 점검하여 거두어들이고, 자신과 함께할 병사들도 모집하였다.

지금 이 책에서 거론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보성은 충의가 충만한 고을이다.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후에 명량대첩의 대승을 거둔 병사들이 모집되었다.

충무공이 보성에서 8박 9일인가? 9박 10일인가?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난중일기를 5번 이상 읽으신 분들의 증언이 아침부터 이어졌다. 결론은 배설이 두고 간 판옥선 12척이 정박하여 있던 [구미영]이 당시에는 장흥 땅이어서 구미영에서 하룻밤을 주무신 것을 장흥에서 주무신 것으로 여기는 분과, 현재 그곳은 보성의 땅이므로 보성에서의 숙박으로 잡는 분의 의견 차이였다. 일단은 ’현재 구미영의 터가 보성의 땅이므로 보성에서 주무신 것으로 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으로 정리가 되었다.

▲ 보성군청의 열선루에서 장계를 쓰는 충무공.

열선루에서 충무공은 해군을 버리고 육군에 편입하라는 선조임금님의 명령을 거부하며 "신에겐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라는 장계를 썼다.

1597년 8월 9일(양력 9월 19일), ​낙안을 떠난 이순신은 보성으로 향했다. 보성으로 가는 이순신의 마음은 여느 곳과 달랐다. 1530년 경 장인 방진이 군수를 지냈던 고장이다. 1545년 서울 마르내골(건천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21살 때인 1565년(명종 20년)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외동딸인 상주 방 씨와 혼인을 했다. ​방 씨의 나이는 19살이었다.

당시 방진은 조선에서 활을 잘 쏘기로 이름난 관리였다. 이순신은 장인의 전폭적인 격려와 경제적인 후원을 받았다.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처가에서 지내며 무예를 연마했다. 장인과 장모가 세상을 떠나자 후손이 없는 처가(충남 아산)가 이순신의 본가가 됐다.

http://blog.naver.com/lds2032?Redirect=Log&logNo=220446420062

장인이 보성군수로 있던 시절

<보성군의 산적들이 관아의 하인을 시켜 방진군수의 화살들을 몽땅 숨겨 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관아를 습격한 것이다. 활이라면 천하명사수인 방군수가 활을 붙잡고 화살을 찾았으나 숨겨버린 화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때 방군수의 외동딸<나중에 충무공의 아내가 되신 분>이 뱁댕이<삼베를 짤 때 베를 매면서 실이 붙지 않도록 날줄들을 감을 때에 사이에 넣어주는 대나무 막대>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서 방바닥에 쫘르르 쏟으면서 일부러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이 여기 있사옵니다.”라고 소리를 치자 이 소리에 놀란 산적들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1970년대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바로 이 방씨 처녀의 지혜가 담긴 <<아버님 여기 화살이 있사옵니다. 하고 뱁댕이를 방바닥에 쏟아서 산적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충무공의 부인 방씨 이야기이니 남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조양창에서 얻은 군량미와 보성읍성에서의 무기, 병사들, 구미영에서 거둔 판옥선 12척, 거기다가 이 판옥선을 저을 수군 또한 율포 지역의 어부들이 동원 되었을 것이니, 명량해전은 보성 사람들이 만든 기적이었다고 자랑할 만한 일일 것이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