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70 ~ 273

달리며 한 편 영화를 보듯, 거장의 명화가 전시된 미술관을 관람하듯,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풍광을 바라보며 그것이 품고 있는 세월과 생령들의 삶을 바라보는 일은 멋진 일이다. 매일 42km씩 똑같은 장소에서 달린다면 뇌와 근육조직은 심심해할 것이다. 더구나 9개월 가까이 매일 42km씩 달리면 과부하가 걸려 무슨 사단이 났어도 진작 났어야 했는데 나의 근육은 아직도 이상이 없다.

이상이 없을 뿐 아니라 피로가 누적되면 늙고 병이 든다는 기존 의학상식도 나로 인해 깨지는 것 같다. 모든 조직은 심심하면 늙고 약해지고 병이 든다. 그러나 하루하루 호기심, 모험심과 사랑으로 채워진다면 인체기관과 조직은 다시 젊음을 되찾는다. 나는 지금 텐산을 넘으면서 젊음의 한가운데를 질주하고 있다.

나 같은 체력적으로 평범한 사람이(어쩌면 보통이하인지도 모른다. 나는 늘 열등감 속에 살아왔으니까...) 이런 세계적 도전을 수행하면서 지금껏 잘 달리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매일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조화와,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펼쳐가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의 뇌와 근육을 젊고 생생하게 유지시켜주는 비밀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스스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천천히 달리며 심장이 뜨거워지고 마음은 경건해지고 고요해지면, 늘 제자리에 있으나 아무도 눈여겨 담지 않는 그런 것들이 거장의 명화 속 풍광으로 다가온다. 평화에 새로운 감각이 열리고 삶에 새로운 식견이 트인다. 내가 아름다운 별 위에 서있다는 사실, 그토록 안달복달하며 경쟁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초원의 풀 내음 진하고, 그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와 말 울음소리 먼 듯 가깝다. 초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먼 길 발걸음이 바쁘다. 날개를 한껏 펴고 하늘에 둥근 원을 그리며 나는 솔개는 기필코 배를 채울 것이다. 가끔씩 마주치는 이국적인 여인의 미소가 치명적인 유혹이 아니라도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주름진 노인의 꼬나문 담배 연기가 구름이 산허리에 걸치듯 주름위에 걸친다.

▲ 5월 28일에서 5월 31일 달리면서 만난 사람들

저 멀리 초원이 끝나는 곳에 만년설을 머리에 인 텐산은, 하얀 히잡을 쓰고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이곳 회족 소녀의 모습 같이 정갈하고 경건하다. 지금 바쁜 걸음으로 달리는 강은 저 만년설이 녹아서 흐르는 강이다. 하늘 푸른빛은 깊고도 가깝다. 가까운 듯 멀리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는 중국 전통악기 ‘훈’의 가락처럼 심금을 울린다. 소울음 소리 말울음 소리가 저음으로 화음을 맞추고, 수많은 무리 중에 어미를 찾는 아기 염소의 아리아가 울려 퍼지면 산중 음악회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엊저녁 미친 듯이 날뛰던 폭풍은 간데없고 산들바람에 포플러 잎새들이 춤을 춘다.

설산을 배경으로 북향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몇 개 ‘게르’는 언제든 떠날 것을 예보한 연인처럼 가슴 아프다. 강렬한 태양아래 바싹 마른 말똥, 소똥이 타는 난로 연기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데워주고, 떠나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듯 하늘에 오른다. 어디서나 아련한 풍광은 우주적 우수를 불러일으킨다.

이곳에서 낮 동안 그림자를 거느리는 호사를 누리는 것은 포플러나무 뿐, 빛의 통치는 지엄하다. 수많은 생령들과 자연현상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상호 복잡하게 어울리고, 서로 교차하면서 조화로운 평화가 유지된다. 이런 곳에서는 시간과 삶이 그대로 흐른들 두렵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멋대로 흘러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슬픔과 절망도 다 위로받을 것 같다. 내 정갈하고 경건한 기도도 여기에 섞이니 희망의 노래로 변주된다.

슬픈 현실이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변해간다는 것이다. 새 옷도 금방 싫증이 나고 사랑의 맹세조차도 변한다. 물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바람도 흐른다. 오래 전 무너진 토담은 세월 따라 스치고 간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을 뿐 아무리 귀 기울여도 아무 이야기가 없다. 수만 년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텐산을 마주보고 서니 마음의 결기가 다시 다져진다.

무언가로부터 혹은 나 스스로 억압했던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같은 자유를 느낀다. 열을 받아 비명을 지르며 터져야 비로소 제 맛을 내는 팝콘 같이, 이곳에서 비명을 지르며 속엣 것을 터뜨려버리고 나면 나도 제 맛을 낼 것 같다. 발걸음 늦어져도 동행이 있고 내 수고를 덜어주려 가쁜 호흡 마다않고 함께하여주어 몸과 마음 가벼워지니 신선인 듯싶다.

▲ 5월 28일에서 5월 31일 강덕원 동행자와 함께

이 아름다운 초원에서 발이 묶이지 않아 야생마처럼 자유롭게 풀을 뜯는 말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 어린 새끼가 집에 묶여있으므로. 자신의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말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나와 강석준 교무의 발길도 그렇게 조국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들 가슴에는 말들의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를 바라보는 예사롭지 않은 눈길이 많다는 것이 느껴진다.

칭기즈 칸 군대는 한밤중 이곳에 도착했다. 밤새워 험한 골짜기를 타고 넘어온 병사들은 피곤에 절어 곤한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떴다. 동이 트자 펼쳐지는 그 아름다운 초원과 계곡에 놀라 나리티(나랍제那拉提)라고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로 이곳의 지명은 나리티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라티 초원은 우루무치까지 460km의 구간에 펼쳐져 있고는 세계 4대 1급 초원 중의 하나다. 나는 앞으로 그 구간을 원 없이 달려갈 것이다.

바람에 풀들이 한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늘 바람과 맞서 헤쳐 나가지만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들판에 불어오는 바람에 무심했던 나도 지금 동쪽에서 세계 질서를 뒤바꾸어 놓을 큰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있다. 사람들 가슴 속에서 조금씩 요동치다가 어느 순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진 바람이다. 한동안 거친 저항에 부딪치겠지만 누구도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 5월 28일에서 5월 31일 달리면서 만난 이정표
▲ 2017년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2018년 5월 31일 중국 Nalatizhen 那拉提镇 32km 후방(총 누적 최소 거리 9316km)/중국 누적 378km)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공식 페이스북 (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 강명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ara.runner)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63)과 유라시안마라톤조직위 공식후원계좌(신한은행 110-480-277370/이창복 상임대표)로도 후원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6,0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사진 : 강명구, 강석원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강명구 시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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