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3.1운동에 참가

3.1운동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운동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정사에 미루기로 하고 본고에서는 3.1운동과 관련된 완도지방의 사정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소안의 송내호, 정남국,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사원, 백태윤 등이 완도의 나봉균, 최사열 등과 협의하여 3월 15일 완도읍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시위는 일경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4월 초에는 완도보통학교에서, 이듬해 1월에는 고금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신지면에서도 임재갑, 임재경, 김재교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로 송내호 외 여러 사람이 투옥되었고 송기호는 광주에서 피검되어 징역 1년 형을 받았으며, 최사열은 서울에서 투옥되었다.

▲ 출처 : 한겨레, 지난 2009년 열린 인동 쌀시장 독립만세 운동행사에서 민족예술단 우금치와 시민들이 일경의 강제 진압에 맞서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대전 동구청 제공

15, 신간회 활동

1927년 2월 25일 민족 단일 항일운동체로서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송내호는 민흥회 측 대표로 참여, 신간회 산파역을 맡았다. 창립총회 당일에는 규칙심사위원 5인(권동진, 최익환, 박래홍, 이동욱, 송내호) 중의 한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권동진을 추대한 거족적 항일운동단체에서 송내호는 조사연구부장 직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전남지방 지회 설립 시 본부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지도, 독려하였다.

완도군지회는 1927년 8월 28일 완도중학원에서 오석균의 사회로 창립총회를 가졌다. 총회에서는 송내호의 명연설이 있었고 다음과 같은 임원 선임이 있었다. 회장 임재갑, 부회장 곽동식, 총무간사 강사원, 재무간사 박노길, 청치 문화 간사 박한규, 조직, 선전 간사 신준희, 조사연구간사 김장렬, 상무간사 이흥쇄 등이었고, 그 다음 서열의 재무상무 김관선, 정무상무 정학균, 조사 연구상무 송계완, 조직 선전 상무 김병규였으며, 간사에 김동섭, 정두실, 박성래, 최형천 임재돈, 임홍기, 김영현, 나봉균, 정동균 등이었다.

 

16, 광주학생사건

1929년 우리나라 국민감정을 표출했던 광주학생사건은 항일운동사에 있어 기념비적 사건이다. 이 글에서는 이 사건의 내용 소개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 사건에서 완도 출신들이 활동했던 것들만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광주학생사건과 관련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이 내린 판결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 재판의 피고는 85명으로 광주, 나주, 영암, 담양, 화순, 순천, 장성, 보성, 영광 등지의 전남출신과 경북 상주, 충북 옥천, 제주 등지의 사람들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중 완도출신은 8명으로 광주출신 12명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참가 숫자의 많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지만 활동 역시 뛰어났다.

이 사건 관련자 85명 중 완도출신들의 인적사항과 위반법령 및형량은 다음과 같다.

 

장석천(29) 신지면 송고리 농업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위반 징역1년6월

문승수(25) 군외면 대야리 사립교 교원, 치안유지밥 위반 징역 1년

정남균(27) 약산면 장용리 면화상,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1년

유치오(24) 약산면 관산리 오사카영어학교 선생,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1년

정석규(20) 소안면 비자리 광주고보학생, 치안유지법, 보안법위반 징역 1년

김홍남(21) 청산면 당락리 광주고보학생, 치안유지법, 보안법위반 징역 1년

박노흥(24) 고금년 청용리,광주사법학교학생, 치안유지법, 보안법위반 징역1년

황상남(21) 군외면 신학리 광주사법학교학생, 치안유지법, 보안법위반 징역1년

김향남(24) 청산면 여서리 학생, 독서회 활동, 징역 8월

 

이들은 광주학생사건 당시 조선민중은 궐기하자, 청년대중이여 죽음을 초월하여 투쟁하자. 검거자를 탈환하자, 언론집회,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라고 외쳤으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결사에 참여하였으며, 11월 3일 당일에는 광주고보학생 300명과 사범학교학생 및 농업학교학생 수십 명의 지원을 얻어 광주중학생(일본인학생)을 공격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특히 장석천은 그 활동이 대단했다. 동경상대를 중퇴하고 조선일보 광주지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 겸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으로서 광주학생사건을 지도하였다.

1927년 9월 23일에도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 강석봉, 김재명, 강해석 등과 피검된바 있으며 1930년 9월 초에는 신간회와 재휴, 서울에 들어가 휘문고보, 보성보고, 경시고보, 배제고보, 제2고보 등의 학생대표들과 회합하고, 제2차 학생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일로 서울에서만 1천여명이 투옥되고 500여명이 처분 받는바 있다. 조선일보는 이 사실을 1930년 9월 13일 호외로 크게 보도하였다. 이 엄청난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장석천은 1932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징역형을 받았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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