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의병활동한 의암 유인석의 유적지

제천은 한말의 후기 의병활동의 발원지이다.

그 중심에 의암 유인석 의병장이 있고, 바로 그 창의의 깃발을 올린 장소가 되어준 자양영당이 있다.

춘천에서 낳았지만 양자로 입양된 부모를 따라 제천으로 오게 된 유인석 의병장은 서당을 이어받아 후학을 양성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 후 나라의 형편이 점점 기울어가자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전국에 흩어진 학파의 동지들을 불러 모아 학술을 연구하는 모임인척 몇 차례의 모임을 가지면서 창의의 결의를 다지고 기어이 1895년 창의의 깃발을 올린 곳이다.

[자양영당[紫陽影堂]은 유교유적의 한 양식인 영당이다. 다시 말해서 영정을 모시는 제사<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라는 말이다. 1906년에 건립이 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3간 접집<6간 짜리 건물> 맞배지붕 건물이다.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37호로 1984년 12월 31일에 지정이 되어 보호되고 있다.]

영당 자체는 그리 크지 않는 건물이지만, 서당으로 활용이 되었던 건물들이 있어서, 집은 여러 채가 있으며 영당에 모셔진 영정들이 제사를 모시는 대상으로 존경 받는 학자요, 지도자들이다.

이 건물들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당시 대표적인 건물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아울러 이 건축물의 양식이나 모양 등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면

[경내에는 입구 쪽으로 면하여 목판고가 있고, 이어서 서사(書舍)와 영당이 같은 축선상에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제일 뒤편에 있는 자양영당은 내부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고 영정을 봉안하는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후면과 측면은 판벽으로 막음처리하고 전면으로는 3칸 모두 4분합 띠살문<문을 접어서 겹치게 한 다음에 들어 올려 처마 밑에 매달 수 있는 문>을 달았다.

구조는 1벌대로 쌓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건물의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을 세웠다. 건축양식은 건물의 전면에만 무출목(無出目) 초익공계통으로 꾸미고 후면으로는 간결한 납도리집으로 간략화시켰다. 지붕틀은 1고주(高柱) 5량가구로서, 고주를 쓸 경우 전면 1칸을 개방하여 전퇴공간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하여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종량 위에는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세우고 종도리와 함께 지붕무게를 받도록 하였다. 경내에 있는 장판각에는 조선말 목판 인쇄술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화동강목(華東綱目)』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1991년에 보수를 한 바 있으며, 건축양식이나 지붕틀의 구조에서 약간의 변형이 있는 조선 후기에 지은 영당건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양영당 [紫陽影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렇게 기울어진 나라의 형편을 걱정하던 이곳에서 공부하던 학자들과 뜻을 같이한 동문학자들은 뜻을 모아. 문호개방을 막기 위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양국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선생을 비롯한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은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힘으로 나라의 운명을 막아내기에는 너무나 작은 힘이었고, 끝내 조약은 체결 되었고, 일제의 내정 간섭은 날로 기울어 갔다. 흰옷을 검은 옷으로 갈아입게 하고, 그들이 한국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여겼던 명성왕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는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바꿈과 동시에 성인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까지 내렸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의병항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유교전통에 충실한 선비들에게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지는 상황에서 자양영당이 된 서당에 모인 학자들의 마음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갔다.

선생의 의병항쟁은,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5월 2,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행사는 이후 11월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쟁의 준비단계였으며 뜻을 다져가는 행사이었고, 뒷날 창의에서도 여기에 참석하였던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선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처음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호좌 의병진의 발단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제천에서 서상렬, 이필희, 신지수, 이범직 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1월 22일 단양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전투에서 패하는 불운을 겪으면서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는데 기어이 불응할 수 없어서 의병장을 맡으면서 본격 의병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제천을 중심으로 조직이 된 호좌의병은 전국적인 의병활동의 봉화불이 되었고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이런 역사를 지닌 이곳 자양영당은

[이곳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인 유중교(柳重敎)가 1889년(고종 26)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 1895년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8도유림을 모아 창의(倡義)의 비밀회의를 하던 곳인데, 1906년 유림에서 뒤편에 자양영당을 창건하고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이항로(李恒老)·유중교·유인석 등의 영정을 봉안하고 봄과 가을로 제향하고 있다.]

마침 우리 일행 중에서 왕년에 KBS에서 근무하셨던 분이 계셨는데, 바로 자양영당의 역사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렸던 분이 계셔서 이곳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발굴 당시에는 이 고장이 얼마나 교통이 불편하여서 며칠이나 찾아다녔고, 차를 바꿔타기를 몇 번이나 하였는지 모릅니다. 처음 찾아 왔을 때에 관리도 잘 안되어서 건물은 낡고, 지붕과 기와가 엉망인 상태이었고, 집들도 지금처럼 이런 배치가 아니었는데, 다시 증축을 하고 재배치를 하면서 많이 달라졌네요. 그때보다 집의 규모가 더 작아진 것 같기도 하고....”하면서 발굴 당시와 다른 점을 얘기해주었다.

또한 생가라고 복원된 초가 건물에 대하여

“사실 초가로 보이지만 저게 초가 모양의 플라스틱 제품입니다. 매년 초가 지붕을 이기도 어렵지만, 여름 장마철 같은 때에 지붕이 썩어 낙숫물에 옷을 망치기도 하고, 매년 이어야 하는 등 관리도 어려워서 대부분의 초가들은 저렇게 하고 있답니다.“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역시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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