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이를 사랑한다면 1] 오성근 주주통신원

‘세상에서 아이한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뭘까?’

모든 것은 이 고민과 질문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기 전, 그러니까 꿈같은 연애시절부터 함께 의논하던 문제였습니다. 우리부부는 연애시절에 사랑, 혼인, 혼인과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그 하나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둘이 그런 공부를 한 건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한 혼인생활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이는 태아 때부터 만 3세 이전에 건강과 지능, 감성의 대부분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시기에 충분한 애정과 영양을 공급받은 아이는 그 뒤의 상황이 나빠져도 자신이 갖고 태어난 재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나중에 좋은 여건이 만들어져도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한다고 했지요. 그것을 알고, ‘아이가 부모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아이의 곁을 충실히 지켜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육아는 부모의 몫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상황이 여의찮다면 내가 그 몫을 맡아도 괜찮아요.” 이것이 혼인 전의 아내와 합의하고, 약속했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낳으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둘이 사랑하며 즐겁게 살자고 했지요. 그런데 아내는 달랐습니다. 혼인생활 3년이 넘어가도 아이소식이 없으니까 마음고생을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아이하나는 꼭 낳고 싶다 했습니다.

아내가 간절히 원하는데 모르쇠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기로 했지요. 아내의 몸이 찬 것에 주목해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쑥 효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흰쌀 대신 현미에 잡곡을 섞어서 밥을 짓고, 화학조미료를 버렸습니다.

휴일마다 함께 관악산을 오르내리는가 하면 서울대공원을 열심히 산책했습니다. 아이가 생기기까지 꼬박 1년 동안 술과 담배도 끊었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얻기 위해서 부부가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인지 1998년 여름에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내는 송파구에 나는 영동사거리의 사무실로 출근할 때였지요. 어렵게 생긴 아이가 버스나 지하철의 인파에 잘못되면 어떡하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아내를 사무실까지 바래다주고, 출근을 했습니다. 퇴근할 때는 다시 송파로 가서 기다렸다가 함께 귀가를 했고요. 출퇴근길의 자동차 안에는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태아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999년 봄. “나 애 낳고도 회사에 다니고 싶은데.” 만삭의 아내가 말했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럼 애는요?”하고 물었습니다. 멋쩍게 웃으면서 “당신이 돌보면 안돼요?” 하는 아내. 혼인 전에 약속은 했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 출산과 동시에 여자가 휴직을 하거나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발목을 잡기도 싫었고, 어차피 둘 중에 한 사람이 할 일이라면 그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이나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는 방법도 있는데 왜 굳이 직장을 그만두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고 맡길만한 유능한 베이비시터를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모의 애정만 할까 싶었습니다. 어른들의 양육은 먹이고, 씻기는 것일 뿐이니까 절반의 육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르신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요.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위치한 과천에서 다향(茶香)이가 태어났습니다. 두 달의 출산휴가를 받았던 아내는 회사로 복귀를 했고, 나의 전업주부생활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아이가 칭얼거리면 벌떡 일어나서 기저귀를 확인하고, 갈아주었습니다. 그게 아닐 경우엔 분유를 먹이고,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안고 서성거렸습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나서 새벽밥을 지었습니다. 출근하는 아내의 아침상을 차려야했으니까요.

‘양껏 먹고, 푹 자고, 실컷 뛰어노는 것’ 이것이 우리부부의 육아원칙이었습니다. 이 원칙을 벗어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만큼 배불리 먹도록 했으며 잠을 자면 전화기의 코드를 빼놔서 수면을 방해하지 않았지요. 그런 노력은 다향이가 대안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계속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열세 살까지는 하루에 열두 시간가까이 잠을 잤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 가족여행이나 배낭여행을 할 때 - 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아이가 놀러 가고 싶어 할 때는 언제든지 밖으로 나갔습니다. 넘쳐나는 에너지를 충분히 소비해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하는 법이니까요.

삼칠일을 넘긴 아이랑 거의 매일 산책을 다녔습니다. 라일락향이 봄바람에 날리고, 노란개나리와 분홍진달래가 자태를 겨루며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봄날. 집 앞의 놀이터부터 시작해서 단지 안의 슈퍼마켓, 중앙공원 등으로 조금씩 나들이의 범위를 넓혔지요. 아이를 안고, 양쪽 어깨엔 기저귀가방과 장바구니를 걸친 모습으로 열심히 다녔습니다.

봄이면 화사한 벚꽃터널 아래서, 여름에는 관악산 계곡에서 다향이랑 물놀이를 했고, 가을이면 샛노란 단풍잎이 양탄자처럼 깔린 길을 지나서 밤을 주우러 다녔습니다. 지금은 과천한마음축제로 이름이 바뀐, 마당극축제기간에는 다향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니면서 구경을 했습니다. 겨울이면 같이 연을 만들어서 날리고, 팽이치기를 하는가 하면 눈썰매도 원 없이 탔지요.

엄마가 돌보는 다향이 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 집 앞의 놀이터에서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놀이동산의 고적대 아가씨들이 다향이손을 잡고, 행진을 하는가 하면 현대미술관의 직원들이 먼저 알은체를 할 정도로 부지런히 놀러 다녔습니다.

다향이 나이 네댓 살에는 서울대공원의 동물들 우리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루는 아침으로 생닭을 받아먹는 호랑이를 본 다향이가 “호랑아, 나랑 같이 나누어 먹자.”고 해서 배꼽을 잡은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향이가 늘 아빠하고만 논 것은 아닙니다. 이웃 엄마들이랑 ‘육아모임’도 했고, ‘동화 읽는 어른모임’, ‘환경운동연합’, ‘민족예술인총연합’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또래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애써 만들었지요. 그중에서 가장 어렵고도 당혹스러웠던 일은 ‘엄마랑 아가랑’이란 이름의 영유아수영반에 다향이랑 다닌 것입니다. 아이의 조기교육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장마철이나 한겨울에 아이와 지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아이는 자꾸 밖으로 나가자고 하지만 콧김이 얼어붙고, 장대비가 내리는 날 할 수 있는 야외놀이가 별로 없지요. 살림꾼으로서 꽤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성(理性)의 주부 집에 놀러가는 건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향이랑 ‘엄마랑 아가랑’이란 이름의 수영반에 다녔던 것입니다. 그 명칭만 남달랐던 게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의 수영반이었기에 엄마들은 모두 보조교사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연히 수영복차림이고, 남자라곤 하나밖에 없었던 나도 수영복만 입은 채로 선생님의 지시를 따라야 했지요. 바닷가도 아니고, 실내수영장에서 나이 어린 엄마들이랑 수영복차림으로 어울리는 건 참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시지요. 수영강습의 첫날. 다향이랑 수영장에 들어섰는데 한쪽에 고무튜브가 있습니다. 가로세로 길이가 4미터, 5미터 정도 되는 튜브 안에 따뜻한 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안에 아이들이랑 엄마들이 수영복차림으로 앉아있습니다. 들어가기도 그렇고, 그냥 밖에 서있기도 애매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향아, 들어가.”하고 따뜻한 물속에 넣어주려고 하지만 다향이가 손을 잡아끕니다.
“아빠도 같이 들어가.”하고. 참 난감해졌습니다.

“다향아, 아빠는 조금 있다가 들어갈 테니까 너 먼저 들어가 있어.” 하지만 다향이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저도 낯선 사람들의 틈에 끼기가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둘이서 밖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더 이상합니다. 그래서 다향이를 안고 튜브 안으로 들어갔지요.

남자의 몸으로 육아모임이나 영유아수영반에 참여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지만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다향이는 또래집단과 어울릴 기회를 잃어버린다.’ 는 절박감으로 두 눈을 질끈 감은 것입니다.

세 돌이 되기 전부터 수영을 배운 다향이, 지금은 제주에서도 파도가 센 중문해수욕장이 아니면 물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다향이는 이처럼 과천에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충분히 즐겼습니다.

다향이의 육아와 살림을 맡을 때는 딱 3년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살림을 하면서 이론일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이한테 매여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회복귀가 어렵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스스로 분리될 때까지 곁을 지켜주기로 했습니다.

오성근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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