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오딧세이아4 여자와 노동자를 위한 변명

8화(광개토-오딧세이아3)에서 광개토왕의 업적은 중화의 하늘[皇天]을 무너뜨리고 상생의 하늘[昊天]을 건설하는 개벽이었다. 상생의 하늘을 여느냐, 아니면 중화의 동굴에 갇힐 것인가. 그 관건은 문화전쟁이었으니, 중화는 요임금의 강령 ‘광피사표光被四表’를 내걸어 중화의 빛[光]으로 사해에 지위표지[表]를 입히고[被], 고구려는 ‘횡피사해橫被四海’라는 슬로건으로 사해를 자유분방[橫]한 옷으로 갈아입힌다. 그러한 문화전쟁의 기치를 담은 ‘공자왈맹자왈이 백성을 변태시킴을 폭로하라’라는 묘비명Epitaph이 광개토왕 총론이라면, 이하 영락5년기에서 영락20년기까지 여러 원정기들은 각론에 해당한다.

永樂五年歲在乙未    영락5년 태세[歲]가 모자란 까마귀[未]를 충동질[乙]하기를 꾀[在]하였다.
王以碑麗不息爭又躬  왕은 모방[以]한 비려가 숨을 쉬지 않고 ‘다시 섹스[又躬]’를 비난[爭]하매
率往討回富山負山    퇴물[往]들을 인솔[率]하여 부산富山을 토벌하고 부산負山을 우회[回]하여
至鹽水上破其丘部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텅 비움을 키질하는 마을[其丘部]을 격파했으니,
落六七百營牛        깃털을 떨어뜨려[落一白] 병영을 저물게 하고[六營] 소를 죽이자[七牛]
馬群羊不可稱數      양떼를 회유하는 말[馬群羊]은 꾸짖음[數]을 칭송[稱]할 수 없었다.
於是旋駕           어시於是가 어가[駕]를 둘러싸서[旋]
因過望平道         소망[望]에 기인[因]하여 획일화[平]하는 道를 허물[過]하니
東來柳城力城北豊    주인[東 백성]은 유성柳城 역성力城을 초대[來]하며 예豊를 배척[北]하였다.
王備獵游觀土境      왕은 사냥꾼들을 대동하고 대지를 주유[游土]하며 경계를 투영[觀境]했으니
田獵而還           (주입된)사냥꾼[獵]을 사냥[田]함으로써 (본연의)사냥꾼[獵]을 부활[還]하였도다.
(통론: 영락5년(395년) 을미乙未태왕은 비려가 안정하지 못하므로 몸소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나가, 부산, 부산을 돌아 거기서 군사를 돌려 염수 위에 있는 근거지를 깨뜨리고, 여섯 부락과 칠백 마을을 부수고 빼앗은 소와 말과 양떼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망평도를 지나가기 위해 동쪽으로 오는 길에 유성, 력성, 북풍성을 거쳤다. 태왕은 미리 사냥을 준비하여 국경도 둘러보시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오셨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광개토왕비는 ‘오딧세이아’다. 저 서구의 역사에서 호메로스는 역사책에서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트로이전쟁’을 소재로 「일리어드」「오딧세이아」 라는 대서사를 창작하였으니, 거기에 담긴 이야기들이 온전히 ‘다큐’일리는 없지 않은가. 광개토왕비문도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와 마찬가지로 다큐와 허구가 공존한다. ‘광개토왕이 비려를 정벌하였다.’ 이것은 다큐이지만, 그 정복전쟁의 동기 ‘~을 위하여’는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허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허구’는 단지 거짓말이 아님을 유의하시라. ‘다큐’가 물질(有)세계에서의 전쟁을 표현한다면 ‘허구’는 의식(無)세계에서의 전쟁을 표현하는 방식text으로서, 이 양면적 서술은 「사기史記」를 비롯한 모든 역사책들에 공통된 방식이었음을.
먼저 물질(有)세계에서의 전쟁 즉 ‘다큐’로서의 영락5년기를 보자. 광개토왕이 토벌한 ‘비려碑麗’는 어느 지역에 사는 어느 민족일까? ‘비려碑麗’라는 이름은 역사책에 거의 나오지 않으므로, 패려稗麗나 비여肥如 등과 같은 나라로서 내몽골 남단 시라무렌강 유역에 거주했던 거란족의 나라로 추정한다. 

시라무렌Sira Moren강은 지도에서 중국식 발음으로 시라모렌Xar Moron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려는 시라모렌 강의 나라일까? 큰 틀에서 공감한다. 그러나 서요하Xiliao의 또 하나의 지류인 황하Laoha를 응시하라. 중국인들은 중원의 황하黃河와 구별하고자 ‘황수潢水’라 부른다지만, 반대로 애당초 황하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중원의 황하黃河(중화문명)를 복사하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그 점에 비추어 비려는 시라모렌강이 아니라 그 아래 '황수Laoha'에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낙랑 등을 앞세워 고조선과 고구려를 공략하는 것이 '옛 동북공정'의 목적이었다면 중국은 굳이 내몽골까지 들어가지 않고 발해만 연안을 따라서 고구려로 향하였을 것이고, 고구려 입장에서도 중국의 전략적 요충지를 공격할 필요가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세번째 이유는 '이름'이다. 광개토왕비문의 작가가 ‘비려碑麗’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중화가 낙랑질로 ‘여如’를 비옥하게 농사[肥]지어 중화화 하여버린 ‘비여肥如’에 고구려[麗]의 기념비[碑]를 세워 유화문명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취지이리라. 또한 ‘염수鹽水’라는 이름은 ‘황하黃河’를 조롱하는 이름이리라.

 

이제 의식(無)세계에서의 중화와의 전쟁을 보자.

태세[歲]는 땅 속에 산다는 괴물로서 ‘굴종의 땅[坤]’을 영원히 지키는 중화의 망령이다. ‘을乙’은 새싹이 돋아나는 상형으로서 공작새인간의 신모델을 출시한다는 의미다. ‘식息’은 ‘숨쉬다’에서 생존 번식으로 의미가 전이되었으니, 「주역」제1중천건重天乾 상전象傳은 숨쉬기[息]와 섹스[息]의 관계를 이렇게 풍자한다.

“하늘의 운행이 굳건한 것은, 군자가 숨을 쉬지 않음으로써[自不息] 섹스하지 않기를 강요[强不息]하기 때문이다.[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

‘퇴물[往]’은 중화의 가짜변혁(陰陽)과업에서 죽음(陰)에 처한 공작새인간을 말한다. 구닥다리 왕이 물러나면 그 신하들은 자살하거나 은퇴해야 한다. 광개토왕은 그 빈틈에 착안하여 죽음(물러남)에 처한 군자들(신하들)을 포섭한다. ‘討回富山負山=討富山+回負山. ‘부산富山’은 재물이 가득한 조정, ‘부산負山’은 멍에를 짊어지우는 학교다. ‘염수鹽水’는 재물과 섹스를 금기하는 중화의 ’짠돌이 법도’다. ‘부산負山’을 우회한 것은, 그 상위의 ‘텅비움을 키질하는 마을[其丘部]’을 격파한 다음 아군으로 습수하려는 전략이다. “깃털을 떨어뜨려[落一白] 병영을 저물게 하고[六營] 소를 죽이[七牛]”는 것은 ‘텅비움을 키질하는 마을[其丘部]을 격파’를 부연한다. 공작새깃털을 죽이고 유가儒家의 병영을 저물게 하면 비려의 백성들을 착취하는 거대한 부역자조직(소)은 해체되리라.

6~8행은 백이숙제의 반전이다. 문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왕이 은나라 정벌에 나서자 백이숙제는 무왕의 수레를 가로막고 무왕의 불충과 불효를 꾸짖는다. 곧 은나라가 망하고 백이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죽자, 무왕은 백이숙제의 꾸짖음을 칭송하며 중화주의(복종)를 부활한 것이다. 광개토왕은 반대로 ‘꾸짖음 칭송’을 차단함으로써 백이숙제들의 투항을 유인한다. 그 옛날 백이숙제가 무왕의 어가를 둘러싸고 불충과 불효를 꾸짖었다면, 비려의 선비들(於是)은 새로 등극한 군주의 어가를 둘러싸서 忠孝烈을 악용하는 유가의 道를 꾸짖은 것이다.

7행의 於是는 선비의 정신이며, 9행의 주인[東]과 10행의 사냥꾼[獵]은 백성들이다. 11행의 사냥꾼1은 성인이 주입한 트로이목마이며, 사냥꾼2는 부활한 백성들의 건강한 욕망이다. 10행의 ‘유관토경游觀土境’은 공자의 주유천하周遊天下에 대립되는 광개토왕의 평천하전략으로서 ‘광개토경廣開土境…’이라는 이름의 실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영락5년기의 키워드는 9행의 유성柳城 역성力城. 광개토왕의 비려원정으로 자아를 회복한 비려의 백성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화냥년자아[柳城]’, 땀흘려 일하는 ‘노동자자아[力城]’를 소망[來]한다.

이제 7화에서 본 오회분4호묘 벽화를 환기하라. 西벽화는 ‘두꺼비가 있는 달’을 호위하는 용龍과 학鶴의 그림으로서 중화세계이며, 東벽화는 ‘삼족오가 있는 태양’을 호위하는 다양한 색상의 새의 그림으로서 유화문명의 세계다. 대립하는 두 문명은 문화라는 그릇text을 발전시키며 문명의 영혼을 담아내었으니, 8화에서 본 ‘무용총무용도’에서 주몽은 찬란한 중화문명의 옷text을 개량하며 유화의 영혼은 담아낸다. '무용총무용도'의 의미를 오회분4호묘의 北벽화에서 곱씹어보자.

그림 자체가 北벽화이므로 하단의 '두꺼비가 있는 달'의 여인은 서북방면에 있고, 삼족오남자는 동북방면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여인은 서쪽 중화세계에서 날아오고 남자는 동쪽 중화세계에서 날아와 동서의 경계(만리장성)에서 만난다. 얼핏보면 남녀는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연상케한다. 

그러나 여자가 중국의 성인을 낳은 전설의 여인 '항아'이며 삼족오가 유화문명의 상징임을 감안한다면, 두 남녀의 만남은 동상이몽의 만남이리라. 항아는 고구려에 중화의 씨를 뿌리려 왔고, 남자는 그녀에게 고구려(유화)의 씨를 뿌리려 다가간다. 만일 남자가 그녀를 유혹하여 고구려의 씨를 잉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중화가 해모수를 앞세워 유화부인을 겁탈한 사건의 복수전이 아닌가.(7화 유리왕이야기에서 미처 거론하지 못하였지만, 한나라에서 온 부인 '치희'이야기가 다름 아닌 항아와의 동상이몽적인 사랑이야기다.) 그렇게 중화의 찬란한 옷text에다가 유화문명의 영혼context을 불어넣는 깃털전쟁은 고구려의 동서남북으로 확산되었으니, 광개토왕비문의 작가는 중국과 고구려를 잇는 외나무다리에서 벌어진 비려碑麗와의 전쟁으로 제3지대에서 벌어진 깃털전쟁의 서막을 연 셈이다.

오회분4호묘 北벽화가 '중화의 여인 vs 고구려남자'의 전쟁이라면, 南벽화는 '수레를 만드는 장인(중화) vs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유화)'의 전쟁이다. 南벽화가 경제라는 이름의 하부구조라면, 北벽화는 문화라는 이름의 하부구조다. 칼 마르크스는 문화를 상부구조로 보지만 동양철학에서는 하부구조로 분류하였으니, 상부구조하부구조는 2단계가 아니라 3단계구조라고 보아야 하리라. 재물은 누구의 손으로 가느냐에 따라 다른 문화를 낳고, 문화는 의식을 낳는다. 뿐만 아니라 의식은 다시 재물(의 분배)을 낳고, 문화를 낳고…. 그렇게 세상은 끝없이 돌아가고 있으니, 그 돌고도는 세상에서 선순환구조의 세계로 가기 위한 고구려인들의 투쟁을 생각하며 10화 백제신라에서 벌어진 중화와의 깃털전쟁을 기대하시라.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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