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오딧세이아 '是가 주인인가, 사람이 주인인가'

    百殘新羅           백제 신라는

    舊是屬民由來朝貢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국[屬民]이어서 조공하여 왔다.

    而倭               그러나 왜倭가

    以辛卯年來渡海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破百殘隨破新羅      백제를 치고 연달아 신라를 쳐서

    以爲臣民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광개토왕비 신묘년조는 오랫동안 일본인들이 사랑했던 뜨거운 이슈였고, 우리에게는 ‘뜨거운 감자hot potato’였다. 그러나 과연 고대일본이 백제신라를 신민으로 삼았겠는가. 우선 ‘왜倭’와 ‘속민屬民’이 무슨 뜻인지 「산해경山海經」 한 구절을 보자.

“개蓋나라는 거연鉅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고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

그러나 우리가 어찌 개蓋나라인가. 연燕나라가 있는데 또 거연鉅燕이라는 나라가 있고, 일본은 연나라 땅이었던가. 엉터리해석을 버리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보자.

“제사장[蓋]이 공작새[燕]문화[南]를 꾀[在]하고 나랏님[國]이 모방꾼[倭]의 저버림[北]을 낚시질[鉅]하면, 오랑캐왕[倭]들이 공작새클럽[燕]에 가입[屬]하리라.”

‘왜倭’는 일본의 이름이기 이전에 ‘모방․복종·포위’라는 뜻이니, 앞의 倭는 모방[倭]하는 백성이며, 뒤의 倭는 귀의[倭]하는 오랑캐왕이다. 텅 비우는 공작새문화를 유행시키면, 모방꾼[倭]들은 ‘더러운 재물’을 외면하리라. 그 재물을 나랏님[國]들이 낚시질하면, 오랑캐나랏님[倭]들도 (더러운 재물을 낚시질하고자)중화에 가입[屬]한다.

산해경은 '왜倭'라는 글자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속민屬民'의 또 다른 의미를 암시하였으니, 우리는 '신민臣民'까지 재고해야 하리라. 그렇다면 광개토왕비의 진의는 무엇일까?

 

百殘新羅        백제·신라는

舊是屬民由來朝貢옛날엔 ‘是가 백성을 따름[屬]’이 변혁[來]에 연유[由]함에 말미암아[由] 조공했으나

而倭            지금은 포위[倭]하므로

以辛卯年來渡海   고구려는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破百殘隨破新羅   백제·신라를 무너뜨리고[破] 무너진[破] 백제·신라를 부활[隨]하여

以爲臣民         그들(부활한 백제신라)로 하여금[以] 백성[民]을 섬기게[臣] 하였다[爲].

 

是屬民由來朝貢=是屬民由來+由朝貢. ‘A由B’의 두 가지 용법을 생각하라. A는 B에 연유한다. A에 말미암아 B한다. 그렇다면 是屬民由來은 위 해석과는 반대로 "변혁이 '시是가 백성을 따름'에 연유함"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문이 암시하는 공자님 말씀을 보라.

「논어」‘태백泰伯’편 제9장.

民可使由之 백성이 부려먹기[使]를 용인[可]함은 가히 좇음[使]에 말미암으니[由]

不可使知之 (군자가)가히 군주를 좇지 않으면 백성들로 하여금 주재[知]하게 하리라.

공자는 백성을 부려먹는 사회를 영원히 지키고자 '좇음(수구)'을 역설하였으니, 광개토왕비는 공자님 말씀을 역이용하여 '변혁'을 역설한 것이다. '백성주체'는 변혁에 연유한다. 그것을 잘 아는 백제신라는 백성이 주체가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고구려의 '변혁'을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고구려에 조공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백제신라는 고구려를 포위하므로 고구려는 백제신라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단지 '고구려를 포위'하기 때문이겠는가. 이제 9화의 복선―田獵而還―을 환기하면서 3행(而倭)의 생략을 생각하라. ‘田獵而還’은 田獵而還獵의 생략형이었으니, 而倭는 무엇의 생략형일까? 2~3행은 ‘舊是屬民由來朝貢 vs 倭’의 구도로서 '이而'를 사이에 둔 대등절이므로 倭는 ‘今是倭民由倭倭’의 생략형이다.

“지금은 是가 백성을 가둠[倭]이 좇음[倭]에 연유[由]함에 말미암아[由] 포위[倭]하므로…”

6화의 ‘음양오행 vs 진보상생’을 환기하라. 3행이 중화의 음양오행이라면, 2행은 고구려(유화문명)의 진보상생. 옛날 진보상생을 추구하던 백제신라가 변신하여 지금은 중화의 음양오행을 추종하므로 고구려는 백제신라를 응징한 것이다.

2~3행이 공작새천국으로 전락한 상실의 현실이라면, 5~6행은 공작새나라를 파괴하고 까마귀천국을 부활한다. 그러나 5행(破百殘隨破新羅)을 ‘破百殘新羅隨破百殘新羅’로 간주한 필자의 해석에 독자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으리라. 왜 백제와 신라를 각각 백제신라로 보아야 하는지, 4화(우리는 왜 한민족인가)의 노자를 생각하라.

道可道非常道   도道가 가히 사람을 인도[道]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道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   명名이 가히 사람을 분별[名]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名이 아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 구절에서 '道가 주인인가, 사람이 주인인가'소리친다. 그러고보면 광개토왕비는 2~3행에서 '是가 주인인가, 사람이 주인인가'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음 5~6행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노자의 다음 구절을 살펴야 하리라.

無名天地之始   무無가 명名(가치창조)하여 천지만물을 낳고[始]

有名萬物之母   유有가 명名(가치소거)하여 천지만물을 죽이[母]는 게 常道인데…

노자는 정상적인 도의 원리를 12글자로 설명한다. 天地는 상부구조(天)하부구조(地)이며 만물은 인문학적 만물(욕망, 가치)을 말한다. 그렇다면 천지는 그릇text, 만물은 내용물context로서 천지는 곧 만물이 아닌가. 나와 당신의 욕망(내지 결핍needs)들이 어우러져 변화하며 인문의 하늘을 이룰 것이니[人乃天], 하늘의 의식[無]이 名하여 당신의 가슴에 '청바지를 입고 싶다'라는 욕망(내지 결핍needs)을 낳으면 지상의 재물(有)이 청바지를 생산하여 충족함으로써 '청바지사랑'이라는 욕망은 소멸하리라.

그런데 노자는 왜 天地와 萬物의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하였을까? 나와 당신의 욕망(내지 결핍needs)들은 각각 物이며, 그것들이 모여서 하늘을 이룬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나와 당신은 하늘을 숭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메마른 중화의 하늘[乾]을 숭배하면서 '욕망하는 나'를 질책한다. 노자는 '나'와 '하늘'의 유체이탈을 환기하고자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왕비는 왜 백제와 신라의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하였을까? 노자의 '유체이탈'을 환기하고자 함이리라. 더불어 '(고구려와)백제신라는 하나다'라는 의미를 더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신라가 중화주의에 편승해버리면, 사면초가에 휩싸인 고구려 또한 유화문명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햄릿은 왜곡된 말씀에 경도되어 재혼한 어머니를 저주한다. <행릿>으로 말씀(대전제)이라는 우상(트로이목마)의 위험을 경고해도 관객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셰익스피어는 보다 직설적인 이야기 <오셀로>를 지어낸다. 데스데모나의 아버지는 데스데모나가 무어인 남자(오셀로)와 동침하였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딸을 추방한다. 그 지점에서 셰익스피어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누가 아름다운 데스데모나를 추방하였을까?' 추방당한 데스데모나를 오셀로는 아내로 맞이한다. 그리고 악당 이아고의 집요한 계략에 휘말려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믿게 된 오셀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인다. 셰익스피어는 다시 질문한다. '누가 데스데모나를 죽였을까?'

데스데모나를 추방하고, 목졸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말씀(是)이었다. 여자는 정숙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 말이다.

광개토왕비는 방대한 영토를 개척한 7~8차례의 원정기(다큐)에 담아낸 오딧세이아다. 비문은 노자를 환기하는 문장으로 당대 제1의 철학적 이슈를 선언하였으니, 오늘의 독자들은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4가지 우상을 분석한 프란시스베이컨의 이름으로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졌던 구조적인 문제 '분리와 정복'을 사유하리라.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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