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이紀異’ 神을 위한 신화, 인간을 위한 신화

叙曰             나[余]는 공자왈맹자왈[曰]을 매질[又≒攴]하리라.
大抵古之聖人     대저 옛날 성인聖人은
方其禮樂興邦     예禮를 퍼뜨리고[方] 낙樂을 기약[其]함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仁義設敎         인의仁義로 설교하여
則怪力亂神       괴력난신을 투사[則]하였으니,
在所不語         나에게 묻지 않는 도리[所不語]를 꾀[在]하였다.
                 …이상 18화 이야기…
然而帝王之將興也 그러므로 제왕帝王을 점지[將]하여 흥기[興]하려면,
膺符命 受圖籙    부절符節의 명命을 품어 도참[圖]의 계시[籙]를 수여[受]하여
必有以異於人者   有를 유정유일[必]함으로써 사람의 지배자[於人者=無]를 우상화하였다.
然後能乘大變     그런 후에야 능히 ‘프레임 속의 변화[大變]’를 주재[乘]하며
握大器 成大業也  ‘획일화하는 선비들[大器]’을 장악[握]하여 ‘대업大業’을 이뤘으니,
故河出圖洛出書   하수에서 그림(팔괘)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홍범)이 나왔다 조작하여
而聖人作以至     성인의 작품[作]을 지극히 함[至]으로써 지극[至]을 조작[作]한 것이다.


虹繞神母而誕羲   무지개가 신神의 금기[母]를 끌어안아[繞] 복희伏羲를 낳고,
龍感女登而生炎   용龍이 少典氏의 아내 여등女登을 감응[感]하여 염제(신농씨)를 낳고,
皇娥遊窮桑之野   황아皇娥가 누에치기[桑 조정]를 퇴출[窮]하는 재야[野]와 교유[遊]하매
有神童自稱白帝子 신神을 부활[有]하는 동자(=장차 黃帝)가 백제白帝의 아들을 자칭하며
交通而生小昊     재야에서 돌아온[通] 황아를 겁탈[交]하여 소호少昊를 낳고,
簡狄呑卵而生契   간적簡狄은 신의 불알[卵]을 빨아서 설契(탕왕의 14대조)을 낳고,
姜嫄履跡而生弃   강원姜嫄은 역사[跡]를 답습[履]하여 기充(주나라 문왕의 조상)를 낳고,
胎孕十四月而生堯 꼬치[十]를 수태[胎]하여 섹스금지[四月]를 잉태[孕]함으로 요堯를 낳고,
龍交大澤而生沛公 용龍이 큰 연못과 교접[交]하여 패공沛公(유방)을 낳았다.
自此而降         죽음[止]을 실천하여 밑에 깔리고 비수[匕]를 비롯하여 강림하니
豈可殫記         어찌 죽음[死]을 감수[可]하여 표지[言己]를 획일화[單]한단 말인가.


然則三國之始祖   그러나 삼국의 시조들을 묘사[則]함에는
皆發乎神異       모두 일어남[發]을 신화화하되 다양성[異]에서 발發하였으니,
何足怪哉         어찌 신비주의[怪]에 머무르랴[足].
此神異之所       우리 신화는 유가[戶]와 분리[異]하여 분리[異]를 도끼질[斤]함으로써
以漸諸篇也       장조림[諸]된 백성을 촉촉하게 적시어[漸]주는 이야기[篇]들이니,
意在斯焉         그 메시지[意]가 키[其]의 도끼질[斤]에 매달리겠는가[在].

 

먼저 중국의 건국신화 7건을 보자. 복희씨, 신농씨, 황제가 소호를 낳은 이야기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라면, 그 다음은 은殷나라 주周나라 한漢나라로 이어지는 시간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요堯’를 주周나라 다음에 배치하였으니, 일연이 피력하고자 하는 중화문명의 ‘탄생-성장-부활-영생불멸’의 흐름을 응시하라.
복희씨는 목축의 달인이다. 소와 말을 길들이는 기술을 응용하여 인간을 길들인 연금술사다. 그런 복희씨를 신화는 무지개가 神의 금기를 끌어안아 탄생하였다고 한다. 무지개는 당신들과 나의 꿈일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꿈꾸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이웃들의 존경을 받고 싶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알콩달콩 사랑하고 싶다. 그런데 복희씨가 우리 앞에 놓인 ‘꿈의 자리’에 ‘금기’라는 물건을 포지셔닝 한 이후,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지 말라’ ‘여인을 사랑하지 말라’ 따위의 금기들을 삶의 신조로 삼아 살아가게 되었으니, 그럼으로써 중화문명이 탄생하였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신화는 복희씨가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탄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을 길들임으로써 중화문명의 시조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인간들(무지개)이 神의 금기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복희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神이란 시공간적으로 무한한 존재로서, 복희씨를 따르는 지식인(군자)들의 영원한 네트웍을 말한다. 복희씨가 ‘금기’들을 창안하자, 神(네트웍)이 결집하여 그것을 널리 마케팅하기 시작하고, 인간(무지개)들이 하나 둘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복희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일연의 눈으로 보면 복희씨가 창시한 중화문명은 지극히 나쁜 문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13세기를 살았던 일연의 시각이며, 수천 년 전 상황에서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위대한 문명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응당 복희신화를 재구성한 아름다운 서사나 그림들이 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중국을 대표하는 일곱 개 신화를 소재로 한 멋진 예술품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에 보이는 것이라곤 긴 수염에 사모관대 차림으로 위엄을 갖춘 육중한 ‘돌하르방’들 뿐. 그래서 필자가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그림은 1960년대 개봉된 한국영화 <이상의 날개>이다.

이상李箱의 <날개(1936)>는 어느 지점에서 중국신화와 만나는가?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소설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이상의 절규를 독자들도 기억하리라. ‘날개’는 행동하는 꿈, 바꾸어 말하면 꿈과 도전과 모험이다. 우리는 왜 꿈꾸지 못하는가? 어쩌다가 꿈을 향한 모험과 도전을 잃어버렸을까?

習鳥數飛也    새[鳥]를 길들이면[習] 날기[飛]를 책망[數]하나니,
學之不已      주입식교육[學]을 지속[不已]하면
如鳥數飛也    (백성들은)새가 날기[飛]를 책망[數]하는 것처럼 한다.

이것은 논어 첫 구절(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을 설명하는 주자朱子의 이야기(논어집주)다. 인간을 길들여서 타고난 꿈과 희망(날개)을 혐오(책망)하게 만드는 것이 공자의 學이라면, 주자가 암시하는 공자님말씀(학시시습지)은 무슨 뜻일까?

주입식교육[學]으로 하얀 깃털[白羽]의 씨를 뿌려[時] 길들이면[之=習]
백성들은 모두[亦] 열광[說]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논어)가 學으로써 하얀 깃털(忠孝烈)을 유행시켜 욕망과 꿈이 거세된 돌부처인간들을 양성하였다면, 그보다 수천 년 전에 복희씨는 ‘주역周易’의 점괘를 퍼뜨려 변태인간을 키웠으리라. 복희씨가 “사주팔자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어른들의 꿈을 겁탈하였다면, 공자는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르황…”을 암기하게 하면서 아이들의 꿈을 짓밟은 것이다.

이상李箱의 <날개>와 중국신화의 첫 번째 교점이 ‘꿈’이라면, 두 번째 공통분모는 ‘여인’이다. ‘나’는 어느 유곽을 연상케 하는 33번지 허름한 집에서 매춘부인 아내와 함께 살아간다. 손님이 아내 방에 있을 때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잔다. 하룻밤을 지낸 손님이 떠나고 나면 아내는 나에게 돈을 쥐어준다. 그러나 돈을 쓸 줄 모르는 나는 어느 날 모아둔 5원을 지불하고 아내와 처음으로 동침한다. 이와 같은 ‘나’의 이야기를, 평론가들은 “‘나’와 아내의 희화戲畫적인 부부관계는 희화의 영역을 넘어 근대 지성인들의 모순된 자의식의 해부”라는 식으로 논평하였으니,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던 이상은 일찍이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문학인들이 이상을 읽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학이시습지’를 읽지 못하는 동양철학자들, 광개토왕비나 삼국유사의 어느 한 구절도 읽지 못하는 역사학자들과 같은 맥락이다. 그들이 읽지 못하는 것은 有와 無의 구조다. 몸을 팔아서 돈을 버는 아내가 無(정신, 영혼)라면, 그 겁탈당한 영혼을 각성하지 못한 채 여전히 아내(無)를 동경하며 명령에 복종하는 ‘나’는 有이다.(‘나’와 아내라는 <날개>의 구조는 <베니스의 상인>의 안토니오와 밧사니오의 관계와 같다.) 손님이라는 타자들이 수고(돈)를 마다하지 않고 아내(영혼)를 겁탈하는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아내가 쥐어주는 돈(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주자가 멋지게 비유하였듯이 ‘날개’를 책망하며 거세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닌가. 이상의 <날개>를 꺾은 것이 손님들이라면, 아득한 옛날 중원 백성들의 날개를 꺾은 것은 복희씨였으니 일연은 복희씨가 ‘금기’라는 이름의 정액을 우리 여인(영혼)들에게 주입하여 날개 잃은 백성들을 탄생하는 신화를 창조하였다고 조롱한 것이다.

복희신화에서 잠재되었던 ‘여인’은 신농신화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용龍이 소전씨少典氏의 아내인 여등女登을 감응[感]하여 염제炎帝(신농씨)를 낳고” 소전씨少典氏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름에서 유추하건대 경전[典]을 비판[少]하는 오랑캐족이리라. 그런데 중화의 퀸카[龍]가 오랑캐(少典氏)의 부인(영혼)을 겁탈하여 중화문명 제2의 시조 신농씨를 낳았으니 중화의 토대는 더 한층 탄탄해졌으리라. 복희씨는 인간을 가축처럼 길들여서 변태시키고 신농씨는 열심히 ‘김매기’하여 인간을 획일화한다. 또한 복희씨는 중화를 창시하고, 신농씨는 오랑캐 땅으로 중화의 나무를 번식하였으니, 황제黃帝는 잠시 재야로 은퇴했다가 돌아온 황아를 겁탈하여 소호少昊―광개토왕비에서 말한 호천昊天을 멸시[少]하는―를 낳아 중화를 부활한다. 복희씨의 창시, 신농씨의 확장, 황제와 소호의 부활에 이어 간적이 설을 낳은 이야기는 ‘갑과 을’이다.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자 하는 간적은 을乙로서 갑甲인 유가(神)의 불알을 애무한다. 주나라의 시조 후직기를 낳은 이야기는 ‘복고(답습)’하는 중화이며, 요임금이야기는 충신 효자 열녀를 하나[一]의 꼬치[丨]에 꿰어 선전하는 ‘결합마케팅’이다. 마지막으로 한나라 유방 이야기는, 불멸의 공작새낙원을 선언한 주역 제11지천태地天泰 上六효 “성城(조정)은 해자(중화의 물)로 돌아오리라.”라는 중화의 비전이다.

이상이 중국신화라면, 일연은 우리 유화문명(三國)의 신화를 다양성을 추구하는, 그럼으로써 인간을 분리[斤]하지 않는 상생의 신화로 규정한다.

신화神話란 꼭 神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정신[神]의 역사를 말한다. 중국의 사서들은 물론 일본의 역사책, 한국의 역사책 어떤 이야기에도 신화가 개입되지 않은 글은 없으니, 신화가 팩트라느니 허구라느니 따지는 논쟁은 곧 오로지 물질[有]의 역사만을 ‘역사’로 하겠다는 바보들의 논쟁에 불과한 것이다.
神을 위한 신화, 인간을 위한 신화. 전자는 중화문명이고 후자는 유화문명이다. 전자는 非我의 문명이며, 후자는 我의 문명이다. 단재 신채호가 ‘역사란 我와 非我와의 투쟁’이라 하였듯이, 일연에게 역사란 문명의 충돌이고 신화전쟁인 것이다. 저들의 신화를 정복하고 당신들의 신화를 창조하라.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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