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본영 육군대장 야마카다 아리토모는 자신이 넘쳤다.

- 우에하라. 우리는 다시 조선으로 들어간다. 안련과 만나는 일은 어떻게 되어가나? 조선왕한테 건네주라는 선물은?

- 말을 잘 듣질 않습니다.

- 그렇겠지. 하하하. 우리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하게. 미국은 50년 안에 조선반도를 미국차로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야. 조선 땅이 지금은 우마차 한 대 다닐 수 없는 궁벽진 곳이지만 머지않아 자동차가 모든 길을 뒤덮게 될 걸세.

안련은 미국 선교사 알렌(Allen)의 조선 이름이다. 안련은 일본 대본영의 요청을 받아 근정전 앞마당에 포드A형 리무진 한 대를 들여왔다. 고종에게 주는 선물로 조선의 마당을 처음 밟는 자동차였다.

조선은 한양 궁궐부터 산골짜기 귀틀집까지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 구조물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마당이다. 조선의 집은 산을 이고 마당은 해를 담는다. 해와 산과 집이 한 줄로 이어진다. 조선인은 기거하는 본채 아래에 행랑채를 달아내고, 행랑채 바깥에 담장을 둘렀다. 거기에 꽃을 피우고 달과 해를 그려 넣는다. 마을 어느 집 마당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동네 한 곳에 느티나무를 심고 정자를 세워 해를 앉힌다. 마을 마당이다.

멀리 서 있는 마을 앞산은 마치 신하들이 아침 조회하러 나온 것처럼 허리를 조아리고 겹겹이 둘렀다. 어깨를 포갠 봉우리들 위로 소나기 나지막하게 몰려올 때는 마당설거지에 분주하고, 전쟁의 검은 연기 다급하게 치솟을 때는 너나없이 마을 마당으로 달려와 병장기를 거머쥐고 두레패를 불러 모은다. 산자락 아래 집을 바싹 붙이고 집 앞 너른 터에는 마당을 두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햇살을 갈무리하고 인심 흉흉한 때는 멀리서 들어오는 소문일랑 가둬놓고 살 길 따지고 찾는 곳이다.

마당은 조선인을 움직이는 정기요 혈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혼인하고 아이 낳고 생일,환갑잔치 열고 죽음 맞이하던 곳. 밥상을 짜고 개를 키우고 송아지를 낳고 돼지를 교미시키고 타작을 하고 파,상추를 심고 뒤란을 어슬렁거리고 포슬포슬한 흙을 밟고 감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청하고 싸리나무 울타리 아래 제비꽃 옹기종기 모여들던 곳. 이곳 마당에서 조선인들은 힘을 만들고 마음을 모으고 이야기 퍼뜨린다.

 

- 우에하라. 일본에 유학 온 조선인들이 몇이나 되나? 모두 전문가로 만들어라. 법률․문학․생물․과학․지리․농업․토건․건축․문화 전문가가 되어 조선의 마당과 골목이 해 온 일을 대신해야 한다. 조선인을 다스리는 지도층으로 키워야 한다.

산부인과를 가지 않고 늙은이들이 모여 아기를 받고 장례지도사 없이 마을에 모여 초상을 치르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나! 토목건축가 없이 터를 잡고 집을 짓는다고? 조선인들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 기고만장하게 기를 살려주면 안 돼. 조선 마당은 대대손손 이어지는 거대한 기억창고다. 자질구레한 인연과 전설, 집집이 내려오는 내력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이야기보따리이다. 우물파고 집짓고 지붕잇고 관짜고 볍씨 담그는 온갖 기술을 쟁여놓는 신주단지이다.

오카모토를 불러라. 조선 3만 5천 개 마을마다 시멘트 300여 포대씩 뿌려 조선의 모든 마당을 즉각 봉인하도록!

 

대본영으로 불려들어 간 오카모토는 검은 안경과 밀봉된 봉투를 받았다.

작전2- 殺光(살광)

도로를 닦아라. 실핏줄처럼 이어서 널리 퍼뜨려라. 지방에는 고속도로, 서울은 고가도로, 각 고을은 외곽도로를 만들어라.

 

- 뭐, 길을 닦으라고! 긴 칼 차고 싶어 군대에 들어간 나보고 겨우 길이나 닦으라니, 제정신인가?

- 오카모토 저 바카야로는 우리 뜻을 조금도 모르는구먼. 저놈은 만주 벌판에서 사람 목 베는 것만 살광으로 알고 있지. 제 손에 피를 묻혀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다. 검은 안경으로 살기나는 눈 가리고 도로를 어떻게 건설해야 할 지 똑바로 전해라.

고속도로로 마을 한 복판을 가를 것.

고가도로로 샘을 덮을 것.

외곽도로로 신목과 비보수를 잘라라.

조선 사람들을 길을 걷는 양민과 길을 닦는 불순분자로 차별하라.

▲ 잘려져 나간 조선의 나무

갑오년. 우에하라와 바바마사오 소좌는 소탕한 동비들을 부려 신작로를 닦았다. 마을이며 샘이며 신목 가운데로 길을 냈다. 신목을 베어낼 때마다 나무가 울고 번개가 쳤다. 나무 밑동에 톱날을 박아 넣던 동비 잔당들이 급살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마을마다 퍼져나갔지만 이내 수그러들었다.

아리토모는 오카모토와 스키야마 아키히로를 불러 은밀히 뭔가를 지시했다.

오카모토는 경성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로 조선반도를 양쪽으로 갈랐다. 아키히로가 갈라진 고속도로 동쪽을 다시 동서2축 고속도로, 대구외곽순환도로, 경전선 복선전철로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누었다. 반도의 서쪽도 수도권의 제2외곽고속도로, 충청권의 물류고속도로, 호남권의 호남고속철도를 깔고 세 덩어리 냈다.

▲ 시멘트로 뒤덮힌 조붓한 산길

시멘트 덩어리 아래 수많은 마당이 짓눌리고 뭉개지며 사라져갔다. 길은 가로세로로 마을을 베고 자르며 수많은 ㅁ자형 주거구역을 만들었고, 주거구역 들머리마다 톨게이트며 카메라를 두고 드나드는 조선인들을 낱낱이 감시했다.

아키히로는 마당 넘어 골목길을 없애고 조선 땅을 콘크리트 더미로 뒤덮었다.

- 조선에서 골목길만큼 위험한 곳은 없지. 갑오년, 동비들을 토벌하러 갔을 때 기억을 떠올리면 아리토모는 지금도 정신이 아찔하다. 대본영이 쫓던 조선의 파랑새는 골목길을 타고 숲으로 들어가 숨는가 싶으면 어느새 마당으로 나와 연발식라이플총을 겨누는 대일본제국 동학당정토군 눈 앞까지 들이닥치곤 했다. 마당은 골목을 부르고, 골목은 마당을 줄 세운다. 골목과 마당은 쌍둥이처럼 신출귀몰 움직였다.

동비들을 불러 모은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자세히 살피면 영락없이 '마당을 둘러싼 골목길이 사통팔달 숲으로 이어지는' 형상이다. 이곳에 갇혔다면 아리토모는 살아서 대본영 사무실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마당집회금지법’과 예비반란집단인 농민과 노동자 빈민의 공공장소 출입금지법>을 어서 만들어야 한다. 조선인들이 골목과 마당을 드나들지 못하게 막는 법이다.

말 번지고

웃음 퍼지고

일 꾸미고

권력 비웃고

느리게 걷고

꽃들 제멋대로 피어나고

오른쪽으로 걷지도 않고

'일하고 또 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포심 잊게 만들고

웃음과 술판으로 권위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리는 곳이 조선의 마당과 골목이다.

이야기 살아서 이어져오는 말길이요, 살림살이 전해져 오는 역사요 터전이다. 간섭 내치고 빗장 걷어내는 해방구다. 조선의 마당과 골목을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짓이기고 조선인들 기억 속에서 지워야 한다.

군함 쓰쿠바호(筑波號)에 몸을 실은 아리토모는 조선의 마당과 골목을 일거에 없애고 조선인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비책을 품고 목포항에 발을 내디뎠다.

- 조선 놈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이것 앞에는 꼼짝 못할 것이야.

(계속)

 

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김시열 시민통신원  abuk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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