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 백번기념관에 걸린 백범의 영정. (사진 : 백범기념관)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전남 보성군 득량면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전학을 와서 결혼을 하고 30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쇠실마을에 김구선생이 은거하셨던 일은 어려서 알고 있었다.

1968년 결혼을 하면서 만난 처가 쪽에 김구 선생을 숨겨주었던 김광언님의 따님이 처당숙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 년 동안 이웃에서 살았다. 물론 나이가 들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군내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만난 선배 한분이 바로 김구선생의 은거지인 쇠실 마을의 김 씨 집안과 친하게 지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김구선생은거지라는 것이 익숙하지만 막상 직접 확인하러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 백범 기념관의 서명록에 서명하는 모습

백범 김구<金九>선생의 피란처였던 쇠실(深松, 심송)부락

○ 위치 : 득량면삼정 1리 기러기재 동북쪽 골짜기 안에 위치

○ 마을의 지명 유래는 조선 시대부터 우측 산 어귀에 󰡒쇠󰡓를 벼리 는 대장간이 있어 쇠꽃이라 하여 『쇠실』로 부르며 일제 때에 심송으로 개칭되었으나 지금은 쇠실로 불린다. 호구총수에 심송 곡촌이라 했으며 1914년 심송리로 개칭되었다

○ 백범 김구 선생께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1898. 3. 9. 인천감옥을 탈옥한 후 5월 하순 경 쇠실마을로 와 김광언(김승묵)씨 집에서 40여 일 피신 해 있었고, 광복 후 환국하여 1946년 9월 다시 이 마을을 찾아준 것 을 기념하여 1990년 백범은거추모비를 건립하고, 2006년 백범은거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보성읍에서 순천 방향으로 약 5km 지점의 안치<그럭재>를 넘어 왼쪽으로 약 1km쯤 들어가면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아담한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쇠실마을이다. 정확한 이름은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심송<쇠실>부락이다. 마을에 들어서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힘겹게 올라가 가장 뒤편에 있는 집 앞에 차를 멈추었다. 은거하셨던 집은 기념관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 45도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집까지 돌아보지는 못했다.

▲ 김구선생의 어록

백범 김구(1876~1949)는 21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을 가던 중, 황해도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쓰치다’ 중위를 살해하고 체포됐다. 인천 교도소에서 탈옥하여 전라도 보성군 득량면 안동김씨 집성촌인 쇠실마을의 김광언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40일 동안 은거하였다. 이때 마을 주민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이 처한 현실을 알려주었다. [출처] #043 독립군 박문용과 백범 은거지|작성자 광주 봉추니]

기념관의 마당에 서 있는 기념비와 안내판을 사진으로 찍고, 기념관으로 들어서니 서명록이 놓여있어 서명을 하였다.

백범<白凡> 김구<당시 김창수(金昌洙)>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 32세손인 김순영의 외아들로 1976년 7월 12일 황해도 해주군 장곡면 백운방 기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이 열아홉 살 때인 고종 31년<1894년> 갑오년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승리하고, 우리나라에 침략의 마수를 노골적으로 뻗히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을미년8월 20일 <개국 504년>에 일본인 삼포오루<三浦梧樓> 일당이 명성황후<민중전>를 궁중에서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일인들이 고종황제의 거처인 건청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옆의 녹산으로 끌고 가 난도질하여 불태우다가 남은 시신을 향원지에 버리고 달아난 사건이다.>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슬퍼하며 침략자 왜구를 누구보다 미워하던 선생은 국모살해의 슬픈 소식을 듣고 분노가 하늘을 뚫을 것만 같았다. 선생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三浦 일당을 찾아나서 마침내 황주에서 진남포로 건너가려는 그들을 맞닥뜨렸다. 국모살해의 직접 하수인인 사전양량土田讓亮<당시 일본군 중위>를 치하포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고, 지니고 있던 짐을 풀어서 돈 800냥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동장에게 맡겼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동 김창수’라고 방을 써 붙이고 태연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가 국모 살해사건이 있던 이듬해인 1896년 2월 하순<사건이 일어난 지 120여일 후>이었고, 선생이 21세 때였다. 그해 선생은 인천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는데, 강화 병마우후 벼슬을 하던 김주경이란 분이 선생에게 보내는 문안쪽지에 ‘장차 큰일을 위해서 탈옥하라’는 뜻을 담은 다음의 시를 보고 탈옥하였다.

脫籠眞好鳥 拔扈豈常鱗 求忠必於孝 請看依閭人(탈농진호조 발호기상린 구충필어효 청간의여인: 새장을 벗어나니 진정한 새요/ 힘껏 떨치니 어찌 평범한 물고기라 할까/ 나라에 충성하려거든 반드시 효를 먼저 행하라/ 청컨대 문가에 기대어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님을 생각하오-편집자 번역)

▲ 백범선생의 휘호

탈옥을 한 후 선생은 멀리 남으로 피신하여, 심송<쇠실>부락에 이르렀다. 종친 김광언과 김덕언을 찾아 송도에 사는 김두호라 자신을 숨기고 40여 일을 체류하다 떠났다. 그 마을의 선정국<宣正國>모친인 안씨가 먼 길을 떠나는 선생에게 필랑<필기구 주머니>을 하나 주었고, 선생은 ‘동국역대’라는 책을 정표로 남겨 주면서 책 표지에 다음과 같은 석별의 시를 써주었다.

離別難離別難(이별난이별난)
이별은 어렵고도 어려워라!
離別難處花樹開(이별난처화수개)
이별은 힘들어도 꽃은 피었네.

花樹一枝分折半(화수일지분절반)
꽃가지 하나 꺾어서 절반으로 나누어.
半留宗家半帶行(반유종가반대행)
반은 종가에 남기고, 반은 가지고 떠나리.

生今天地逢何時(생금천지봉하시)
이 세상 사노라면 언젠가는 만나련만,
捨此江山去亦難(사차강산거역난)
고국을 버리고 가려니 이 또한 어렵구나!

四員同遊至月餘(사원유지월여)
네 친구와 더불어 한 달 남짓 노닐다가
齟齬惜別而去也(저어석별이거야)
석별의 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떠나네.

(편집자 주: 백범 김구선생의 한시는 한글을 억지스런 한자로 옮긴 듯합니다. 여러 곳에서 어색한 한자를 사용하여 시가 매끄럽지도 못하고 의미도 잘 전달이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해석은 안함만 못하기에 원문에 따라 의미가 통하도록 고칩니다. 천지(天地)는 이승이라는 의미를 갖는 세상으로 번역하고, 강산(江山)은 고향의 뜻을 포함하는 고국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뒤에 이 글을 보게 되면 혹 오늘날의 나를 회상할 것인가, 이 글을 정표로 남겨두고 멀리 떠납니다.

그 후 백범은 중국에서 40여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겪다가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1946년9월 하순에 옛 추억이 남은 쇠실부락을 다시 찾는다. 백범이 쇠실을 찾아온다는 소식에 보성역에서 쇠실 마을까지 깨끗한 황토를 깔아 선생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백범은 40여 년 전을 회상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당시의 따뜻한 대접을 감사드리고, 또 선정국씨의 모친을 찾아 떠날 적에 받았던 정표의 ‘필랑’을 내보였다. 자신이 기거하던 방과 놀던 곳을 두루 살피고, 훗날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나셨다. 쇠실 마을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별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애국자 백범 김구선생의 성스러운 향기가 넘치는 역사의 고장이 되었다.

<참고 : 韓國獨立功勳史, 白凡逸志, 寶城便覽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전자책 본문보기***

http://edit.upaper.net/Editor/Preview.aspx?cid=156296

▲ 쇠실마을의 백범기념관 모습

<한겨레온>에 실린 기사

[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사] 24. 백범 김구선생의 피난처였던 쇠실(深松)부락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27

김구선생이 해방 후 귀국하여 자신이 은거하였던 쇠실마을을 찾으셨을 때에 우리 보성군에서는 김구선생을 맞이하기 위해서 보성역에서 쇠실마을 까지 약 6km 정도 되는 도로를 카페트를 깔아드리는 대신에 황토를 깔아서 진심으로 환영을 해드렸다고 한다. 김구선생은 자신을 숨겨준 분들께 감사하고, 자기 아들에게 반드시 보은을 하라고 이르셨다고 한다. 김신장군이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처당숙의 아드님<처6촌형>을 특채로 공군사령부로 불렀고, 여기서 정년퇴임까지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좀 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찾아보게 된 것이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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