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의 사적과 동망봉

[한양도성 탐방기 6] 허창무 주주통신원 허창무l승인2015.02.24l수정2015.02.2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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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암(地藏庵)

두 번째 암문과 세 번째 암문 사이 창신동 성곽길가에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작은 절이 있다. 그곳 대웅전 삼신불상 중 중앙에 보물 제1621호 서울 지장암 목조 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이것은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후가 광해군과 세자 공주 등 왕실가족과 친정부모의 천도를 위해 원봉안처인 자인수양사(왕실의 부녀자들이 출가 수행하던 사찰)에 봉안했던 것인데, 그 당시 11존의 불상과 불화 중에서 지금은 위의 보물만이 유일하게 여기에 남아있다.

낙산구간의 세 번째 암문을 빠져나온다. 암문을 나오는 순간 왕족은 다시 평민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왕족에서 평민으로 돌아오니 섭섭하십니까?” 물으면 “앞으로 군역이며 부역 등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해야 할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라고 너스레를 떠는 이도 있다.

산사나무 붉은 열매가 흐드러지게 맺혀 발길을 멈추게 하고, 느티나무 단풍이며 단풍나무의 선연한 단풍이 성인 남녀 누구나 어린애가 되게 하는 성곽길을 내려온다. 단풍을 보면 왜 까닭 없이 처연해지는 것일까? 그 순정한 빛깔로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순수성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수명을 다한 잎새들의 소리 없는 흐느낌은 머지않아 듣게 될 형제자매들의 장송곡을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우당(庇雨堂)

낙산 동쪽 상산(商山)의 한줄기인 지봉(芝峯) 산자락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수광이 저 유명한 「지봉유설」을 저술한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원래 조선 초의 청백리 정승 류관(柳寬)이 살았던 집이었다. 류관은 장마가 들면 비가 새서 그때마다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럴 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살고?”하고 농담을 했다고 하여 「유 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회자되었다.

그는 황희, 맹사성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당대의 삼대 청백리로 추앙받는 정승이었다. 그의 5대 외손 되는 이수광 또한 선조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비를 겨우 가릴 수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 그 집의 이름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새로 집을 짓고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 곳을 「비우당 팔경」이라는 시로 읊었다. 낙산 주변의 풍광이며 조선시대 선비의 풍류와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어 여기에 전문을 인용한다.

첫째, 동지세류(東池細柳)란 시에서는 흥인문 밖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가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했다.

둘째, 북령소송(北嶺疎松)에서는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가지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한탄했다.

셋째, 타락청운(駝酪晴雲)에서는 아침마다 누운 채 타락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로운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고,

넷째, 아차모우(峨嵯暮雨)에서는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다섯째, 전계세족(前溪洗足)에서는 비가 오고나면, 앞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여섯째, 후포채지(後圃埰芝)에서는 지봉(芝峯)과 상산(商山)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사호(商山四皓 : 진시황 때 난리를 피해 섬서성 상산의 깊은 산중에 숨어살았다는 은사 네 사람을 말함. 그들의 머리와 수염이 온통 흰색이었다고 함)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일곱째, 암동심화(巖洞尋花)에서는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노래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산정대월(山亭待月)은 맑은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읊었다. 옛사람의 풍류를 이처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이상향을 동경하는 시지만, 각박한 요즘 세상에서는 시샘이 날만큼 유유자적하는 정취다.

동망봉과 정순왕후 송(宋)씨

창신동 성곽길가 정자에서 동쪽으로 동망봉(東望峰)을 바라본다. 낙산동쪽 기슭 숭인동 동망봉 부근에는 예로부터 청룡사라는 절이 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후, 궁궐에서 쫓겨난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는 비구니들의 사찰인 청룡사 밑에 작은 초막을 짓고 기거했다. 그러면서 부근 동망봉에 올라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남편 노산군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짓곤 했다.

단종은 재위 3년 만에 왕위를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난 지 2년 만에 사육신의 복위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격하되었다. 유배지인 청령포에서 다시 금성대군의 복위사건이 터져 서인으로 강등되고 곧 사사되었다.

단종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는 소복을 입고 조석으로 통곡했다. 그 통곡소리가 주변 아낙네들의 마음을 울려 동네 아낙네들도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런 통곡을 사람들은 동정곡(同情哭)이라고 불렀다.

홀로 된 왕비는 한때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 시녀들이 동냥해온 음식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세조가 영빈전이라는 집과 곡식을 하사했으나 정순왕후는 일절 받지 않았다. 의지할 곳으로 정업원(淨業院 :본래의 정업원은 창덕궁 뒤에 있음) 구실을 했던 청룡사에서 가까운 동묘 여인시장의 여자 상인들은 이를 가엾게 여겨 비단에 물감 들이는 일을 폐비에게 맡겼다.

그녀는 비우당 뒤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샘물에 지초(芝草) 뿌리를 풀어 자주색 염색을 했다. 그리하여 염색업은 폐비의 생업이 되었다. 그렇게 82세까지 장수하면서 왕위에도 못 오르고 죽은 의경세자 덕종이며, 즉위 후 2년도 채 못 되어 죽은 예종이며, 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 등 세조의 자손들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한 서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사육신의 복위사건으로 죄인이 된 노산군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의 사정은 이렇다. 영월로 유배되어 한양을 떠나기 전날 청룡사로 찾아온 단종은 거기서 폐비와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정순왕후는 유배지로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물론 당국에서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계천 7가 영도교(永渡橋)에 이르러 포졸들의 제지로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게 된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 눈물자국들이 지금도 영도교 다리 위에 있다고 한다.

훗날 21대 영조는 청룡사를 찾아 정순왕후의 고결한 생애를 기리는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를 세웠고, 그 비석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기억해야할 인물이 있다. 청령포에 유배된 노산군에게 사약을 가져간 의금부도사 왕방연이다. 그는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돌아오면서 서글픈 마음을 달래는 시조 한 수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는 귀경하자마자 그날로 사의를 밝히고 경기도 구리로 들어갔다. 거기서 배 농사를 지으면서 지난날의 회한을 달랬다. 영월에서 사약을 받기 전에 목이 마른 노산군이 물 한 모금을 달라고 하는 것을 죄인이 무슨 물을 찾느냐고 냉대한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해마다 첫 수확한 배를 들고 동쪽 영월을 향해 망자에게 경배하면서 유배 때 못 드린 물 대신 배즙을 마시라고 사죄했던 것이다.

그 배가 오늘날 먹골배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는 구리 왕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허창무  ha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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