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꿈이란 없다

<버킷리스트>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온 흑인남자(모건 프리먼 분)와, 백만장자지만 주위에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 없는 백인남자(잭 니콜슨 분)가 죽음을 앞두고 우연히 병원서 만나 우정을 맺고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을 같이 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끝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돈은 매우 많은 데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돈이 없는 사람이 같이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관객을 웃게도 만들고 가슴 찡하게도 만들지요.

<한겨레:온>에 ‘버킷리스트’ 릴레이 연재 기사를 실어보면 어떨까요? 누구나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기 마련입니다. 너무 황당한 것들도 있고 아니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데 정보나 도움이 필요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버킷리스트’를 본다는 것은 내 삶의 현재를 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모건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고, 잭은 그건 화장실 가는 것 보다 더 쉬운 일인데 무슨 리스트 거리가 되느냐... 며 의아해 합니다. 전용 제트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날아가고 최고급 파티를 즐기는 등, 돈은 잭이 다 쓰지만 그 여정에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은 모건이 아니라 잭입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들이다... 라는 것을 잭은 깨닫게 됩니다.

<한겨레:온>에서 그런 버킷리스트 쓰기를 제안합니다. 그러다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리스트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을 수 있고, 또 그러다보면 ‘버킷리스트 같이 하기 모임’ 같은 것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제안을 한 죄로 저의 '버킷리스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나는 지금도 그 날 풍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40살이 되는 생일을 며칠 앞두고 나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덕수궁 안 어느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평일 점심시간을 막 넘긴 봄날의 고궁 안은 한적했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멀찌감치 무엇인가를 열심히 쪼아 먹고 있는 비둘기 두어 마리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깊은 그늘 속에서 느긋하게 꼬여있던 다리가 햇볕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한적했던 시공간은 어둠과 빛이 만들어낸 경계선을 따라 초조하게 움직였다.

가방 안에 있던 원고뭉치를 꺼내고 가방을 닫고 일어섰다. 몇 걸음 걸어가 쓰레기통에 원고를 던져 넣고 뒤도 안 돌아보고 거리의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오래된 나의 꿈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고 나는 꿈을 꾸지 않는 삶을 살기로 했다. 하기야 서른 살에 잔치를 끝낸 시인도 있는데 사십이면 꿈꾸는 시간으로는 충분했지 않은가. 대한문을 나서 아현동과 신촌을 지나 동교동까지 걸어 후배가 일하고 있는 여행사 문을 밀고 들어갔다.

"태국에 일거리 있다는 거... 아직도 유효하냐?"

비행기가 도움닫기를 시작하고 곧 몸이 기우뚱하며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오를 때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는데 까닭 없이 눈물이 났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도망자 같은 비감스러운 심정 때문이었을까. 커다란 꿈은 박살이 났지만 그 꿈의 그늘에 가려 생각지 못한, 내가 두고 가는 땅에서 하고 싶었던 일이 있기는 했었을까, 혹은 다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메모지에 몇 가지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버킷리스트라는 말도 못 들어봤고 사람이 죽기 전에 뭔가를 해보고 싶을 거라는 생각도 못 해봤지만 하여튼 점점 멀어져 가는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짓는, 막연한 아쉬움 때문에 끼적였던 걸로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때 노트를 발견해서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때의 낙서 중에 민망한 내용 빼고 대충 옮겨보면 이렇다.

1. 마라톤 완주 / 태국선 못 할걸?

2. 에베레스트 가보기 ... 몇 미터까지. 베이스캠프?

3. 5대양 6대주 여행하기

4. . . / 진짜 꿈도 빈약하네. . . 연애? 지랄.

돌이켜 생각해보면 꿈이란 아무 때 꾸어도 되는, 그야말로 꿈인 것을.... 그때는 내가 꿈을 지속하기는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2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 많은 꿈을 꾸고 더 많은 희망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그것들은 꿈이라기보다는 그저 조각난 '하고 싶은 일' 들일 뿐이다. 해보고는 싶지만 못해도 그만인... 하지만 뭐... 그런들 어떠랴... 꿈에 무슨 무게가 있겠는가.

버킷리스트라는 말을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 목록을 만들어 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또 세월만 보냈다. 이제는 비장하다거나 반드시를 빼고, 그저 재미삼아 만들어 보려 한다. 한 번에 다 생각이 나지 않으므로 하나씩 하나씩... 그러다보면 혹시 누가 아는가? 오래전에 죽어 미이라가 되어버린 꿈이 영화처럼 내게 걸어 나올지...(계속)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4626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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