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만주의 서간도와 북간도를 구분하실 수 있나요?

이 질문을 던지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곧바로 뭐가 다른 점인지 되묻는다. 만주, 독립군, 무장투쟁 이 세 단어가 묶여서 하나로 기억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설명을 붙이면, 지금은 중국 땅 '무장독립군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무장투쟁을 벌였던 곳'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간도는 그렇게 무언가 함부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이미지다. 한 공동체가 어떤 지리적 공간을 공동의 기억으로 가슴에 담기까지는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만큼의 시간적 공유가 필요하다.

만주의 독립군은 모두 가족을 떠나 헐벗고 굶주리면서 독립운동을 했을 거라는, 애국심 하나로 그 모든 고통을 극복했을 거라는 경건한 환상, 그리고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이 대부분의 사람이 만주 독립군에 대해 가진 몇 개의 이미지다. 그런데 그 굶주리는 빨치산 무리가 갑자기 어디에서 무기가 나서, 어떻게 사단 규모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 왜 이런 엄청난 부조화에 대해 그동안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을까?

압록강 건너 서간도에서의 독립운동과 두만강 건너 북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압록강 두만강 두 강의 거리만큼 차이가 난다. 그러나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서간도의 독립운동과 북간도에서 벌인 독립전쟁을 무장투쟁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같이 넣어 한데 묶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나의 오랜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서간도에서의 활동,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군 양성을 위해 노력한 이회영 형제분들의 분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북간도에서는 이미 사관학교와 무장독립군부대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북간도의 독립전쟁에 대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총을 들었던 그 가열찬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전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의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거둔 승리는 민족적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겨우 100년 전의 일인데 그 전쟁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대단한 승리였다는 피상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북간도의 독립전쟁은 아직도 우리가 찾아서 기록해야 할 미완의 역사로 남아있다. 만주라는 지역의 특성상 중국이 공산화되고 6.25를 거치면서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특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북간도의 무장독립군들은 대부분 해방 전에 사망하거나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나오지 못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여성 독립군을 밝히는 세미나

지난 4월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의 가족 중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그동안 남편(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져 단지 남편의 활동을 뒷받침한 것으로만 평가받았던 여성들, 항일독립군이라 불러 마땅한 여성들을 여성 독립군으로 당당하게 호명하고 그 삶을 기리자는 기획이었다. 사단법인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주최로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삶을 재조명하기로 했다.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 김예진 목사의 부인 한도신 여사의 삶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종걸 의원이 할머니 이은숙 모녀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김동수 박사가 어머니 한도신 여사의 삶을, 그리고 내가 할머니 김성녀 여사에 대해 발표하기로 했다. 두 시간 동안 각각 30분씩 발표하고 나머지 30분 동안 역사학자의 토론과 보훈처 담당자의 발표로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첫 발표자에서 이 시간 배분이 깨어졌다. 이종걸 의원은 우리 국민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이회영 가문의 역사와 할머니와 고모의 헌신에 대해 몇몇 자료와 책을 펼쳐 보이며 한 시간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사회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없이 늘어지는 현역 의원의 발표를 제 때에 제지하지 못했다. 두 번째 발표자인 김동수 교수도 부모님 사진 등 ppt 자료 수십 장을 준비했다. 부모님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 30분이 부족했다. 결국,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무장독립군이 봉오동에 대규모로 결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속에서 식량과 군복 등 병참을 책임졌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에 관해 10분 안에 설명해야 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북간도의 사회적 배경과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 김성녀 여사에 대해 발표하는 중

단지 봉오동에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가 1919년 봉오동에 창설된 것과 1920년 만주의 무장독립군이 통합되어 대한북로독군부가 결성된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아 만주 봉오동에 무장독립군의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사실과 그 수천의 독립군을 먹이고 입힌 사람이 김성녀 여사를 비롯한 봉오동의 부녀자라는 사실만 짧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발표만으로도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처음 듣는 북간도 무장독립군의 역사와 그 규모에 놀랐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만, 그 역사와 의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어지는 의문, "왜 우리는 이 중요한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세미나에서도 시간이 없어 질문을 받을 수도,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더구나 그날의 주제인 여성 독립군 서훈 문제에 대해 토론자와 보훈처 담당자의 의견도 들어야 했다. 정부는 앞으로 여성 독립군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짧은 다짐으로 세미나는 마무리되었다.

▲ 참석자들과 함께

그날 두 분의 발표를 들으며 내가 깨달은 것은 그동안 우리가 이회영 선생 형제들의 결단과 고생담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계속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그분들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이 압록강 건너 조선인이 별로 살지 않는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가져간 돈이 바닥나자 가족들이 모두 죽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를 통해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거주민의 95% 이상이 조선인이었던 북간도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주민이 조선인이었기에 힘을 합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두만강을 건너 넘어오는 애국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품어주었기에 북간도에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봉오동에는 최운산장군이 창설한 무장독립군부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역사는 알려주지 않았다.

최운산장군이 일찍이 봉오동에 동포들과 함께 신한촌을 건설했고, 마적으로부터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한 자위대를 운영했다는 것, 이 자위대를 모체로 운영한 무장독립군부대 ‘군무도독부’가 있었다는 것, 무장 독립군이 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온 수많은 애국청년이 봉오동에서 정예 독립투사로 양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더구나 1912년 창설된 이 부대가 8년 후인 1919년에 670명 규모의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가 되었다는 것조차 설명해주지 않았다. 

▲ 발표 중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온 생존 독립군 한두 사람의 기록에만 의지했던 북간도의 무장투쟁사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승리를 신화로 만들었다. 우리 독립군의 이해할 수 없는 대승으로 단순화되고, 몇몇 영웅을 기억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의문을 느낀 후세대들에 의해 혹시 과장된 역사가 아닌가 지적당하고 있다. 

‘일본군 사망 수백 명, 독립군 사망 약간 명’으로 정리한 역사로는, 사회적 배경이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전투 결과에 대한 피상적 나열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투쟁과 독립을 향한 그 정신을 결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상황은 '대한군무도독부 창설 100주년'인 2019년을 앞둔 2018년 오늘까지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만주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이해는 서간도와 북간도의 거리만큼 멀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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