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이가 보이지만 잡을 수가 없습니다. 앞·뒤·옆 모두 포위되고 맙니다. 꼼지락거려 보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나는 어느 새 통로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보이는 건 앞 사람 목덜미요 부딪히는 건 옆 사람 팔꿈치입니다. 뒤에는 누군가의 백팩이 날 받쳐주니 오히려 아늑합니다.

손을 맞잡습니다. 차라리 눈을 감습니다. 이리저리 미리다가 겨우 안정을 찾았다 싶지만 내게 찾아온 평온은 잠시뿐입니다.

다음 역에서 열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탑니다. 물샐틈없어 보이던 자리였는데 이내 틈이 생기고 다시 이리 저리 부대낍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닙니다.

꼼지락거릴 수 있는 건 발가락뿐입니다.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난 여전히 눈을 감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빈틈을 찾아 헤집습니다.

‘이번 역은 홍대입구역입니다’란 멘트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자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깨닫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 호사를 기대한 내가 얼마나 우스운가? 나는 다시 눈을 감습니다.

앞뒤 양옆 모두 날 감싸고 있습니다. 한가운데 낀 나는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키 크고 몸집 좋은 사람들이 에워싼 채 나를 내려다봅니다. 하필이면 내리는 문이 내 뒤에 있을까?

재난에 대비할 머리가 짧고 잽싸게 비켜설 순발력이 부족하니 고생하는 것은 뙤뚱맞은 내 몸뚱아리입니다. 그럴 때마다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사진출처 : 한겨레 신문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어느 쪽으로도 몸을 뺄 수 없는 난 꼼짝없이 서 있습니다. 온몸을 송곳처럼 치세우고 눈을 꼭 감아버립니다. 성냥갑에 든 부러진 성냥개비처럼 고개를 묻습니다. 자괴감이 듭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고통은 순간이니까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빠져 나갑니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고 휑한 느낌입니다. 공간이 넓어지니 숨쉬기가 편합니다. 들숨도 푸짐하고 날숨도 리듬을 탑니다. 기분이 좋은지 요것들도 가쁜 숨 몰아쉬며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바깥이 보이는 의자 쪽으로 옮깁니다. 이젠 그렇게 멀리 보이던 손잡이도 잡을 수 있습니다. 딱딱한 손잡이가 어찌나 보드라운지 차라리 포근합니다. 나는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다시 눈을 감습니다.

정말 평온합니다. 공덕역에 이르니 평온은 극에 이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립니다. 이젠 부대낄 일도 없고 눈살을 찌푸릴 일도 없습니다. 슬그머니 손잡이를 놓습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이제는 홀로 설 수가 있습니다. 한 바퀴 휘 둘러봅니다.

용산역에 들어섭니다. 제법 빈자리가 보입니다. 세상에나, 여기저기에서 내게 손짓을 합니다. 언감생심, 내게 자리를 내 주다니... 정녕 내게도 자리를 내 주다니….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도 않습니다. 공연한 짓인 줄 알면서 자꾸 뒤를 홈쳐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마운 자리들입니다. 나는 내리고 차는 다시 움직입니다.

크고 작은 손잡이들끼리

서로 부대끼며 갑니다.

내가 의지하던 손잡이

내가 어루만지던 손잡이

나를 지켜주던 손잡이가

손을 흔듭니다.

안녕!

-지난 8월 31일 아침, 서울흑석초등학교로 특별봉사를 가던 날이다. 내가 사는 집에서 흑석역까지 가려면 용산역과 노량진역에서 갈아타야 한다. 위 글은 풍산역에서 용산역까지 가는 동안 손가락으로 조물거린 내용이다. -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박춘근 주주통신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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