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의 해방지구에서 자란 나의 초등1학년은 이사를 해서야 겨우 65일 다닐 수 있었는데

나는 1951년 9월 1일 전남 보성군 율어초등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하였다. 9월에 입학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1951년에 9월 학기제가 시행되었던 것 같다. 그것도 1951년 한 해만 그랬고, 1952년부터 1962년까지는 4월 학기제로 바뀌었다는 것을 내가 다니던 모교의 연혁으로 알 수가 있다. 1951년 7월 18일에 모교의 제4회 졸업식이 있었고, 1952년 3월 22일에는 제6회 졸업식이 있었으니 그 사이에 학기가 4월로 바뀌었다.

9월에 입학을 한 나는 교실도 없는 학교에 가서 운동장 모래밭에다가 막대기로 ㄱ, ㄴ, ㄷ… 을 쓰고, 1, 2, 3… 쓰며 학교에 다녔다. 공비토벌이 시작되자 우리 동네는 온통 전쟁터가 되어버렸고,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없어 집에서 놀았다.

▲ 돌담 홍매화                                    사진 : 최호진 그림

우리 마을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해방지구로 나오는 동네인데, 나는 밤낮으로 국기가 바뀌는 집에서 살았다. 경찰대가 들어와 마을의 가장 뒤편에 있는 우리 집 울타리 긴 장대에 태극기를 달아 놓고 온종일 마루에서 지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시작되면 존제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공비들이 마을 가까이에 와서 “따꿍” 하고 총을 쏜다.

이 총소리를 들으면 경찰들은 장대에서 태극기를 떼어 들고 집을 나선다. 마을 앞의 작은 언덕진 등성이를 넘어가면서 경찰들은 “빵”하고 총을 한 방 쏜다. 아마도 이 총소리는 “이제 우리는 동네에서 나왔다” 하는 표시인 듯. 그리고는 공비들과의 접전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재빨리 면 소재지의 경찰지서로 가버리는 것이다.

잠시 후에 나타난 공비들이 국기가 달렸던 장대에 인공기를 달면, 밤 동안은 이 마을이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는 이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밤에는 공비들에게 남자들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시달리고, 낮에는 경찰들에게 가족들이 공비들에게 끌려가거나 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냐고 문초를 당하는 신세였다.

10월 말 어느 대낮에 우리 어머니를 끌고 동네 앞 논바닥에 세우고선 “얘 아버지와 동생들, 큰아들을 어디에 감추었어? 말하지 않으면 그냥 쏘아 버릴 거야!”라고 위협을 하면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총구를 들이대고 위협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나고 무서웠지만 달려들어 총에 매달리며 “우리 어머니 살려주세요. 우리 어머니는 아무 죄도 없잖아요. 네?”하고 사정하였다.

그러자 경찰 아저씨는 총에 매달린 나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이 자식아! 저리 안 비켜? 공산당 놈의 새끼 같으니라고?”하고 소리를 쳤다. 이 순간 나는 걷어차인 힘에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어머니는 이 위험한 순간에도 달려들어서 나를 끌어안으면서 소리치셨다. “이 어린것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렇게 차는 거예요?”라고 하시면서 나를 꼭 끌어안으셨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국군이 대대적으로 파견되었다. 경찰력과 함께-주민들까지 동원되어 지리산 자락인 벌교의 존제산으로부터 조계산으로 공비를 몰고, 지리산으로 작전 구역을 좁혀가는 과정에서 내가 살던 율어면은 전투 현장이 되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집에서 쉬고 있던 동안 날마다 보는 군인이나 경찰들과 공비들을 흉내 내어, 전쟁놀이나 무기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작대기 하나 들면 총이 되고, 동네 울타리에 열린 하니 수박(하눌타리)을 따다가 칼집을 내고 속에 나뭇재를 가득 넣어 수류탄이라고 집어 던졌다. 이렇게 시달리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피해 12월 하순에 우리는 이웃 득량면 마천리 섬동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1월 초 어느 날 전학을 하였다. 내 1학년 통지표에는 1월에 17일을 출석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아마도 1월 초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몹시 추운 날에 전학 신고를 하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교실로 가니, 1학년 교실은 들어가는 현관을 막아서 쓰고 있었다. 처음 들어서니 어찌나 깜깜한지 아이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차차 눈에 익숙해지고 나니 책상으로 가득 찬 교실에는 6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떴다, 떴다, 비행기…….”하고 아이들은 열심히 따라 읽고 있었는데, 나는 겨우 ㄱ, ㄴ, ㄷ을 읽고 쓰는 것밖에 모르는 데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3월까지 석 달 동안 날마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더 했다. 그때 글자를 아직 익히지 못한 몇 명의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남았고, 6학년 형이 공부가 끝나면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1월에 17일, 2월에 25일 중의 23일, 그리고 3월에 25일, 출석 일수 67일 중 65일 동안 출석을 하고 나서 2학년이 되었다. 9월에 입학하여서 4월에 2학년으로 진급을 한 것이다. 2학년 되어 꽤 열심히 공부하였는지 우등상도 받았다. 아마도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못 배운 탓이었던가 보다.

9월에 입학을 한 우리는 이듬해 3월 31일에 1학년을 수료하고, 2학년으로 진급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짧은 1학년을 보낸 셈이다. 당시 9월이 아닌 4월에 2학년이 된 것은 1952년부터 4월 학기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1962년에 다시 지금까지 시행해온 3월 초로 학기가 바뀌었다.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에 학기 변동으로 인하여 총 7개월을 공부도 하지 않고 그냥 공짜로 진급을 하게 되었다. 1학년 입학을 한 뒤로 4개월은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으니, 결국 11개월간 학교에 가보지도 못했다. 1년을 공짜로 보낸 셈이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어렵게 살아온 나의 학창 생활이었지만, 우리 부모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챙겨 주셨던지, 만 70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의 성장 기록철에는 초등학교 1,3,4학년 [통신표]와 5, 6학년 [아동발달상황표]가 잘 보존되어 있고, 2학년에 받았던 우등상장도 보존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어쩌면 문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공부를 제법 잘해서 우등상장까지 받았던 2학년 통지표만 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우등상장이 남아 있으니 제법 공부를 잘했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다 피난을 오시어 선생님이 되셨다던 2학년 이형중 선생님은 안경을 쓰신 창백한 얼굴이었는데…….

아아! 그러고 보니 정지용 시인의 사진을 보면 바로 2학년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르곤 하는 걸 보면 닮은 얼굴이셨던 것 같기도 한데, 남은 사진도 없고 생각도 잘 나지 않아서 죄송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나의 1학년의 학교생활은 짧았지만, 나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고 가장 험한 기간이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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