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며 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에 앞장선 나혜석. 그녀는 이중적인 도덕과 정조 관념에 저항한 여성운동가이자 의열단 제2차 암살 파괴 계획을 최전선에서 도운 독립운동가이다.(사진 수원시 제공/출처 : 한겨레 신문)

2016년 750만 명이 본 영화『밀정』에는 중국 국경도시 단둥에서 무역회사 ‘이륭양행’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조지 쇼우가 잠깐 나옵니다. 폭탄제조 기술자 헝가리인 마자알과 상해에서 부부 행세를 한 현계옥(한지민 분)도 등장하지요. 그러나 정작 등장했어야 할 ‘독립운동가 나혜석’은 없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밀정』은 1923년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일명 황옥 경부 사건)을 영화 전편의 시대 배경으로 합니다. 천진과 상해에서 조선 국내로 폭탄 수십 개와 권총, 실탄 수백 발을 밀반입합니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과 의열단 류자명이 함께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수천 장을 국내로 몰래 반입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 『밀정』은 상당히 고증을 많이 거친 픽션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어야 할 ‘나혜석’을 놓쳤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1923)은 나혜석을 설명하지 않고선 거사를 언급하기가 매우 궁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시나리오 작가가 좀 더 ‘황옥 경부 사건’을 이해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선 국내로 폭탄이 밀반입되는 현실은 영화 이상으로 가슴 조마조마한 장면들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해방론자이자 여류화가, 시인, 소설가로 기억합니다. 여성에게만 정조 관념을 강요한 낡은 조선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며 여성의 몸과 여성성, 인간다움을 열망했던 인간 나혜석을 기억합니다. 나혜석의 말년은 행려병자들이 가는 시립 병원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지요. 병든 몸으로 큰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마지막까지 여성으로서 억울함과 원통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미로서 딸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물건을 찾아가라고 자신의 고향인 수원시 어느 장소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나혜석은 한때 연인이었던 최린을 상대로 1934년 소송을 제기하며 응징합니다. 여성을 농락하고 정조를 유린했다는 죄목인데 소송 취하 조건으로 최린으로부터 2천 원을 받아냅니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4천만 원 정도에 해당합니다. 최린은 3?1운동 당시 천도교 민족대표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지만, 훗날 적극적 친일로 변절한 인물이지요. 나혜석은 1934년『삼천리』에 이혼고백장’를 게재합니다. 남편 김우영과의 결혼생활, 최린과의 관계,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담담히 고백합니다. 장발장의 도덕성과 억울함을 인용하며 가부장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원통함’과‘당당함’이 무엇인지 열정적으로 항변합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풍류이고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화냥년이라는 당대 이중성에 맞서지요. 위선적인 조선 남성들의 이중성에 당당히 맞서는 그 모습 앞에 경외심을 느낍니다. 당대 조선의 남성들은 자신의 근대성을 드러내는 데 신여성을 장식품처럼 이용합니다. 나혜석은 그런 조선 남성의 이중성을 가차 없이 응징합니다. 이광수, 염상섭 등 신여성을 일방적으로 동경했던 유학파 남성들의 위선과 작품 활동에 맞서서 남녀평등을 열렬히 주장합니다.

남편 김우영을 비롯해 남성들 자신은 정조 관념도 없이 기생을 집 안에까지 끌어들입니다. 반면에 여성의 성적 취향을 불륜과 일탈로 매도하는 이중성을 드러내지요. 나혜석은 그런 시대의 낡은 도덕과 이중성, 그리고 위선적인 사회의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나갑니다. 그리고 그들 남성의 위선과 이중성을 적극적으로 고발하며 폭로합니다. 단둥 시절 나혜석은 조선 여성의 계몽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야학 설립과 저축 활동 등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요.

나혜석의 삶과 죽음을 보면 불온한 시대를 살아낸 한 인간의 ‘주체성의 승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부남인 최승구를 사랑한 것은 자유연애, 자유결혼의 상징처럼 회자합니다. 그러나 1920년 김우영과의 결혼에서 결혼조건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것! 첫사랑 최승구의 무덤에 묘비를 세워줄 것!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신혼여행을 떠날 것을 요구한 대목은 어떻게 보면 당당함을 넘어 식민지 여성이자 낡은 가부장제 질서에 갇힌 조선 여성의 마지막 절규였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의 일본 외교관 지위를 마음껏 이용하여 의열단 제2차 작전을 물심양면으로 돕습니다. 의열단에 관한 역사적 진실은 지하 활동이다 보니 남아 있는 기록물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가명을 쓰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지하 항일운동의 원칙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의열단 생존자의 회고록이나 증언, 그리고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을 당시 수사, 재판기록을 통해서 그 면면을 재구성할 뿐입니다. 다만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 진술한 것을 토대로 의열단약사 형식의 책이 해방 직후 소설가 박태원의 손을 빌려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약산과 의열단』이 바로 그 책입니다.

단둥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한 남편 김우영의 지위를 이용해 나혜석은 1921년 10월 이후 숱한 의열단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권총을 보관해줍니다. 폭탄과 권총, 실탄 수백 발이 든 가방에 단둥영사관이라는 직인이 찍힌 표찰을 부착해 국경을 무사통과할 수 있게 배려하지요. 나혜석이 아니었다면 폭탄의 국내 반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 일로 남편 김우영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직접 불려가 고초를 겪습니다. 심지어 의열단원들 십수 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자 옥중에까지 찾아가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의열단원 유석현의 증언에 나오는 대목이지요. 유석현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소속 황옥 경부의 밀정으로 활약했던 인물인데 실제는 의열단 단원이었습니다.

유석현이 들려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해방 직후 노동운동조직 ‘전평’(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약칭)이 시위를 하자 이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수도경찰청은 김원봉을 체포합니다. 체포에 혈안이 된 자가 바로 희대의 악질 고문 경찰 노덕술입니다. 노덕술은 의열단장 김원봉의 뺨을 때리고 고문을 가하지요. 물론 며칠 뒤 김원봉은 혐의없음으로 풀려납니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당시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약칭) 공동의장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좌파 내지 진보적 민족주의 집합체인 ‘민전’을 겨냥해 무리하게 덤벼든 기획 수사였던 셈입니다. 풀려난 뒤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유석현의 집에 머물면서 3일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기막힌 현실 때문이지요.

유석현은 의열단원 박기홍(일명 이현준)과 함께 상해, 북경, 조선 경성을 오가던 의열단 연락책이었습니다. 유석현이 출옥했을 때 나혜석은 권총 두 자루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숨길 곳이 없어서 나혜석에게 맡겼던 것인데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넘겨준 것이지요. 박기홍의 권총도 자신의 베개 속에 감춰두었다가 출옥 후 건네준 일화도 유명합니다. 나혜석은 결혼 이듬해인 1921년 단둥으로 오자마자 여자 야학을 개설하여 조선 여성들의 주체성을 일깨워줍니다. 저축 등 생활개선 운동에도 앞장서지요.

유석현의 증언 이외에 아나키스트 정현섭, 류자명의 증언에서도 국경을 넘나들 때 나혜석의 결정적인 도움이 속속 나옵니다. 정현섭은 일제강점기 일제가 체포하고자 혈안이 되었던 의열단으로 현상금이 김원봉-김구를 이어 세 번째로 많았던 인물입니다. 류자명은 유석현의 충주 공립보통학교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의열단 선전 홍보 책임자로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만들 때 일조했던 인물이지요. 해방 후 농학자로 중국에 머물며 대학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 혼신을 다합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현실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중국에 살다가 운명합니다. 아나키스트 류자명은 중국 인민의 존경심이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극적인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폭탄 일부를 인력거를 통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무사히 옮기는 대목입니다. 영화『밀정』에서처럼 기차를 이용해 삼엄한 국경경비를 뚫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도 하지만 인력거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단둥지국(지국장 홍종우) 창설 기념연회장이 지국장 홍종우 집에서 열렸을 때 단둥 영사관 경찰과 신의주 경찰서 고등경찰 최두천 경부를 일부러 초청합니다. 그리고 의열단원 유석현, 황옥 경부(영화『밀정』의 송강호 분), 김시현(영화『밀정』의 공유 분)이 그 연회에 함께 참석합니다. 물론 조선일보 단둥지국장 홍종우 역시 의열단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에 단둥영사관 부영사 김우영의 제안으로 2차를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자리를 옮기는데 바로 인력거를 이용합니다. 그 인력거 밑에 조선 총독과 고위 관료, 그리고 식민지 수탈기관을 폭살 시킬 폭탄이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폭탄 국내 반입 계획은 무사히 성공합니다. 그러나 의열단 제2차 대암살 파괴 계획은 엉뚱한 데서 실패로 끝납니다. 의열단원 김재진의 밀고로 물거품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의열단 제2차 계획은 관련된 인물만 수백 명에 이르지만, 일제 조선총독부는 사건을 오히려 축소해서 체포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에 사건 전모를 성급히 언론에 발표합니다.

통상적인 독립운동 조직사건일 경우 수개월 동안 보도통제를 하던 것과 너무나 다른 태도였습니다. 거기에는 황옥 경부가 경계를 넘나드는 처신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황옥 경부는 체포된 직후 의열단 단원들처럼 수사와 고문을 받을 당시 일절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재판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의열단을 체포하기 위해 위장 잠입했다는 것으로 태도가 돌변합니다. 황옥 경부는 세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극구 자신을 변명하지요. 역사학계 지배적인 학설은 황옥을 일제 스파이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만큼 황옥 경부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인물입니다.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의열단 김상옥을 예전에 피신시킨 것이나 제1차 의열단 암살 파괴계획(1920) 당시 체포된 김시현을 서울로 압송하여 의형제를 맺는 것이나 의문투성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의열단원 유석현을 자신의 밀정으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일부러 신고한 것도 그렇지요. 마지막까지 국내로 무사히 반입된 폭탄과 전단을 지인의 집에 은닉하고 살포를 요청하는 등 심혈을 기울인 점도 그렇습니다. 영화『밀정』에서도 의열단에 잠입한 일제 첩자로 보기보다 민족의식을 간직한 의열단의 일원으로 묘사하며 막을 내립니다.

황옥 경부처럼 의열단에 가입은 하지 않았지만, 의열단 이상으로 독립운동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나혜석을 비록 늦었지만 독립운동가로 인정하는 게 옳습니다.

낡은 시대와 불화를 겪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한 나혜석의 항일운동에 대해 좀 더 의미 있는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주주통신원  hsh703@cho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