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 전교조의 베캄원정대의 동유럽 4개국 여행에서

2014년 전교조 해직교사이면서 전교조 재정국장 등 본부에서 간부 일을 하고 있던 김영국 선생이 중심이 되어 베트남과 캄보디아 연수를 해 오던 것이 확대되면서 동유럽 4개국을 여행을 할 기회를 가졌다. 제1기로 갔다 온 후배 선생님이 참 좋았다는 여행 소감을 듣고 가볼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베캄원정대'라는 연수 명칭도 '베트남, 캄보디아 연수'의 앞 글자를 따서 붙여진 연수단의 이름인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4개국을 2014년 7월 29일부터 8월 12일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왔던 기록을 베캄원정대 카페에 올렸었다. 이 후기를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 페르가몬 박물관 입구의 모습
▲ 페르가몬 박물관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사기 등으로 모자이크를 하여 꾸며진 말의 모습
▲ 사자상도 있었는데, 아주 생동감이 넘친다.

당시 동유럽 4개국 연수에는 1기와 2기로 나뉘어 1기 32명, 2기 34명이 출발하였다. 1기에는 이재우 선생님이 우리를 인솔하였고, 2기는 김영국 선생님이 인솔하였다. 1기, 2기로 나뉘어 연수를 갔다 왔다니 마치 몇 달 또는 1,2년 간격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2014년 여름, 1기는 7월 29일 출발을 했고, 2기는 이틀 뒤인 31일 출발한 것이다.  

2014년 여름 1기 베캄원정대는 맨 먼저 찾은 곳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었다. 첫째 날은 늦게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쉬고 나서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여행 겸 연수에 들어갔다. 맨 먼저 찾은 곳은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페르가몬' 박물관이다.

▲ 당시 지하에 묻혀있던 실제의 신전 건물을 그대로 뜯어다 옮겨 놓은 것이다. 대리석으로 잘 지어진 건축물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베르가마는 페르가몬 왕국의 대도시 베르가몬이었다. 지금은 유적뿐이지만 전에는 신전 같은 대형 건축물도 많았다. 이 유적도 오랜 세월 흙 속에 묻혀있었다.“고 우리를 안내하는 이선생님이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유적은 당시 독일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후만이 1864년 터키에서 도로를 건설하다가 유적을 발견하여 정부에 발굴을 건의했는데, 13년 만에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동의를 얻어 후만을 책임자로 하여 유적조사단을 파견하여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 터키에 있던 페르가몬 왕국의 유적을 발굴하여 독일로 옮겨올 때, 그 유적들을 저런 방식으로 분리, 해체를 하여 옮겨왔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 페르가몬 왕국의 유적을 옮길 때 저렇게 떼어낸 것을 가지고 와서 조립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대형 제단이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와 화려함, 섬세함 등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하였다.

▲ 자기의 무늬와 색깔들이 참 화려합니다.

 

▲ 백자의 단아한 모습과 높은 질감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 인물이라든가 동물 등 다양한 석상들도 가져와 전시를 했습니다.

 

 

페르가몬(Pergamon)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부하 중 한명인 리시마코스가 금전을 대가로 필레타에루스에게 위임하여 세워진 왕국이다. 페르가몬 왕국은 해발 396m 높은 요새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문화, 예술, 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고대 아테네 문명을 계승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그리스 문명의 수호자 역할을 해냈다. 약 15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이후 로마가 지배하게 된다. 지금은 터키의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이번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과 유적들을 보면서 찬란했던 그리스의 한 도시를 옮겨온 듯한 곳이 이곳 페르가몬 박물관인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중이지만 발굴 당시 실제 크기대로 박물관을 지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동독으로 옮기는 노력까지 했지만 소련이 이곳을 점령하고 나서 많은 유물들을 가져갔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것들은 당시 소련으로 반출되다 남은 것들이라 한다.

▲ 당시에 사용되었던 화살 등 다양한 전쟁 무기들도 전시외어 있습니다.

페르가몬 박물관을 방문하고 바로 그 옆에 있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을 잠깐 들렀다. 이 대학은 칼 마르크스와 아이슈타인이 다녔다고 하여 참 유명한 대학이라고 한다. 쇼펜하우어도 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많은 유명 인사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들을 이번 여행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잠깐 들러서 사진 몇 컷을 찍고 나왔다. 현재 베를린 시내에 곳곳으로 캠퍼스는 나뉘어 있다고 하였다.

▲ 페르가몬 박물관 바로 옆에는 훔볼트 대학이 있는데, 그 대학 입구에 이 대학 설립자인 훔볼트의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1809년 학자이자 교육개혁가인 프로이센 교육부장관 빌헬름 폰 훔볼트가 세웠다. 원래 이름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이름을 딴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였다. 훔볼트의 지도하에 이 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큰 대학교로 발전했다. 1840년까지 1,750명 이상의 학생이 입학했고 교수와 연구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현대적인 교육과정을 실시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나치에 의하여 한 때 대학 문이 닫힌 적도 있다. 

▲ 베를린에는 많은 대학들이 있는데, 대부분 대학들이 우리나라처럼 거대한 캠퍼스에 자리 잡고 있질 않습니다. 좁은 부지에 회사 건물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작은 규모의 대학들이 대부분입니다. 종합대학보다는 단과대학이 많겠지요.

헤겔이 1818~30년에 이 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했고, 이곳에서 그의 저서인 〈법철학 Philosophy of Right〉(1821)을 출간했다. 말년에는(1830~31) 총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그의 제자였다. 그러나 1933년에는 나치당이 금서로 지정한 수백 권의 책이 불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의 통치를 받으면서부터 대학의 이름이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훔볼트대학교로 바뀐 것이다.

▲ 훔볼트대학은 세계적인 대학이다. 대학 평가에서 49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 대학에서는 헤겔이 강의하여 유명하고, 이 대학 출신 중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있다. 2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니 대한하지 않은가? 나치 때는 한 때 학교 문이 닫히기도 하였다. 필자 뒤에 독일어로 새겨진 글귀가 유명한데, 이 글귀는 칼 마르크스의 글이라 한다."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글귀라고 우리를 인솔한 이재우 선생님이 해설을 해 주셨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이 대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녔던 대학으로 유명하다. 동독 시절에는 교육과정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학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29명에 이른다니 이 대학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가?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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