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유난히 학력단절이 많았다. 많은 동년배 친구들은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했기에 필자는 행운아이리라. 우여곡절 끝에 중학을 졸업하고 약2년간 농사꾼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때까지 필자는 힘든 농사일을 거의 해보지 않았다. 필자의 덤벙대는 성격으로 매사에서 어설펐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 농군경험이 평생 삶의 밑천이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상일꾼 머슴들만이 할 수 있다는 쟁기질/똥장군 지기/나무꾼도 경험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가물가물한 기억들을 모아 청소년기에 겪었던 두메산골 농촌의 하루를 적어본다.

▲ 출처 : 한겨레,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에 꿈을 펼치다.

봄부터 가을까지

별을 보고 일어나서 별을 보고 잠들었다

종일 노동의 피곤함에 지쳐

언제 골아 떨어진지도 모른 채 잠이 들었고

꿈속에선 새와 나비가 되어 천지간을 쏘다녔다

날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두 팔을 벌리면 몸이 붕~ 떠올랐고

이쪽으로 가야지 생각하면서

한쪽 어깨를 살짝 비틀면 곧바로 그리 날랐다

누구 말마따나 꿈과 현실의 구분이 없었다

꿀잠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적어도 이 시기 필자에겐 없었다

1.

꼭두새벽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희멀건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갔어

아직 덜 깬 잠속이라 손더듬이로 문고리를 찾았지

문구멍엔 헌 공책 장이 덕지덕지

방문을 삐거덕 열고 문지방을 기어 넘어 가

마루 끝에 이르면 마루 밑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더듬더듬 내 검정고무신 꺼내 두발에 어름어름 꿰어 신고

비틀비틀 걸어서 농기구가 있는 곳으로 갔지

2.

장독대 옆 숫돌가에 이르면

물통의 물을 한 바가지 떠 숫돌에 쫙 찌끌고

쓱싹쓱싹 낫의 날을 예리하게 세운 다음

외양간 앞에 걸린 꼴망태를 어깨에 휙 둘러매고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을 끼리릭 연 후

계단을 조심스레 성큼성큼 내려가

돌담골목길을 빠져서 산과 들로 갔어

3.

산과 들에는 소 먹일 풀들이 기다리지만

먼저 온 사람들이 베어 가버리기도 했어

남아 있는 풀들을 찾아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소가 좋아하는 풀들을 한 움큼씩 골라잡고

싹둑싹둑 풀 배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

어느새 꼴망태에 소여물이 가득차면

이내 집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지

비가 주룩주룩 내릴 때는 말이야

비 맞으며 소꼴 베기가 곤란해

그래서 아예 소를 몰고 산과 들로 가기도 했어

4.

소 먹이고 재우는 일이 농촌의 큰 일 중 하나야

외양간 잠자리가 편한지

소똥과 오줌으로 질척거리지는 않는지

마른 짚 넣어주고 청소 등 수시로 점검해야 해

송아지를 낳으면 더욱 정성을 다 하지

가난한 농부에게 송아지 한 마리는 황금덩어리

황소는 농가 재산목록 1호 중의 1호야

또한 황소는 장정 몇 명의 일도 해치우니

극진한 대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

5.

소를 먼저 배불리 먹이고 나야

내 주린 배를 채울 차례가 되었거든

꽁보리밥에 열무김치 풋나물

아침을 얼렁뚱땅 대충 비벼 넣고

지게와 농기구를 챙겨 둘러맨 다음

휘적휘적 농작물이 기다리는 논밭으로 가지

농사일은 처음도 끝도 없어 할 일이 널려 있거든

손발을 움직이면 시작이요 멈추면 끝이야

언덕치고 고랑 내어 씨 뿌리면

어느새 싹이 트고 쑥쑥 커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해

하지만 잡풀들도 같이, 아니 더 빨리 커

뽑아주지 않으면 곡식은 어디 가고 잡풀만 무성하지

6.

그것이 다가 아니야

게으른 농사꾼에겐 할 일이 별 없지만

부지런한 농사꾼에게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병충해는 풍년을 앗아가는 원흉

알곡 작살내는 병충해 예방을 위해

살충제와 살균제를 몇 차례 뿌려야 해

물 섞은 약을 20리터 수동분무기로 살포하지

출렁거리는 분무기는 몸 중심 잡기도 어려워

엉덩이가 흔들흔들 왜 그리 무거운지

어깨는 무너지고 허리는 꺾어지고 다리는 퍽퍽

7.

그 외에도 농작물 사이사이 김매기와

밭두렁과 논두렁에 난 풀도 배어주어야 해

허리를 좀 펼라치면 벌써 점심때

열심히 일할 때는 시간가는 줄도 몰라

농기구에 붙어 있는 흙을 대충 털어내고

지게에 얹어 지고 집으로 총총걸음

마루에 걸터앉아 식은 밥과 신 김치로 점심을

꽁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어 다행이었지 뭐

어떤 집은 고구마 몇 개로 때우기도 했으니

8.

한 더위라 그늘 막에 잠시 휴식 취하면

어느새 오후 3~4시가 되어버려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다시 바지게를 등에 맨 후

엉그작 엉그작 애타게 기다리는 담배 밭으로

누렇게 익은 담배 잎을 골라 따지

딴 담배 잎은 적당한 크기로 모아

밭고랑 언덕 군데군데 놓았어

다 따고 나면 한 아름씩 안고 나와

바지게에 산처럼 쌓을 후

넘어지지 않도록 줄로 꽁꽁 묶어야 해

9.

오른 손으로 지개작대기를 짚고

왼손으론 무릎을 짚고 겨우 일어나 집으로

어깨가 무너질 것 같아 중간에 몇 번 쉬어야 해

오르락내리락 들길을 가면 다리도 아프고

숨도 치오르고 전신엔 땀이 줄줄 흘러

집에 도착하면 담배 잎 쏟아질까 살며시 지게 받치고

담배 잎이 상할까 조심조심 내려

마당 멍석 위에 담배 잎을 나란히 펴 놓았어

10.

손을 대충 씻고 저녁 밥상머리에 앉지

보리밥은 따뜻하지만 김치에 나물, 늘 그 밥에 그 반찬

배가 등짝에 붙었으니 시장이 진수성찬이라

맛을 따질 겨를이 어디 있어 이나마도 과분하지

허겁지겁 빈 배 채우기에 바빴어

그렇게 저녁 먹고 나면 피곤함에 졸음이 슬슬

하지만 어찌 그냥 잘 수가 있나 저녁 일이 기다리는데

멍석 위 담배 곁에 잠시 누워 휴식만

▲ 출처 : 한겨레, 짚으로 엮은 마당 위의 멍석

11.

어둠이 슬슬 밀려오면 호롱불에 등유 가득 넣고

심지를 최대로 돋워 성냥으로 칙~ 불을 댕긴 후

마당 길게 늘어진 빨래줄 중앙에 매달고

흔들리지 않도록 군데군데 대나무로 높게 받치지

70년대 초반 그 때까지

첩첩산중 두메산골 우리 마을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어

호롱불이 등잔불에 비해 밝지만 전등의 1/10도 안 돼

세상은 적막 속에 묻혔으나 아직 할 일이 태산

담배 잎을 크기와 상태별로 나누고

짚으로 엮어 건조장에 널어야 하기에

12.

담배농사는 그 시절 농촌의 큰 소득원이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어

담배 일이 끝나면 마당을 대충 치우고

초저녁에 피워 놓은 멍석 주위 모깃불을 다시 손봐

밤새도록 모기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하므로

침상은 멍석 그대로 홑이불을 덮는 둥 마는 둥

큰 대자로 벌렁 누워 별이 빛나는 하늘을 쳐다보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한 숨을 쉬고 나면

이제야 내 몸이 내 몸이 되었어

어디로 가버렸던 맘과 정신도 돌아오고

13.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편안했어

몸도 맘도 늘어질 대로 축 늘어졌지

시커먼 하늘엔 별들과 은하수가 빛나고

구름이 가는지 달이 가는지

쉼 없이 흐르고 변하는 하늘을 보며

낮 일이 끝났으니 또 다른 나의 일상 꿈속으로

아무도 모르는 광활하고 끝없는 그 세계로

기약도 없고 걱정도 없는 그 곳으로 마냥 갔어

14.

꿈속에서만큼은 내 맘대로 했지

들판도 달리고 산등성이 이리저리로

자연은 나의 놀이터요 장난감이야

냇가에서 수영하고 당산나무 오르고

드높은 하늘 뭉게구름타고 두둥실 날기도 해

바람에 실려 이곳저곳으로 쏠리기도 하지

어쩌다 나도 모르게 꿈에서 깨어나면

어찌 그리 서운하고 허탈하던지

영원히 꿈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아쉬움에 뒤척이며 한참을 잠 못 이뤘지

15.

농촌이 이상향 전원생활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이런 일을 한 번이라도 겪어보고 말했으면

농촌의 일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아

흙과 나무와 산과 냇물이 포근히 안아주기에

그나마 평화롭게 보이고 살아갈 수 있지

그렇지만 오늘의 나를 키우고 있게 한

그 시절 그 추억에 젖어들면

가슴 뭉클함에 먼 산과 하늘을 바라보게 돼

기쁨과 즐거움은 슬픔과 괴로움에 비례한가 봐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지만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맘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었던 것 같아

▲ 출처 : 한겨레, 어느 두메산골 초가삼간의 한나절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