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식민지 청년의 서로 다른 삶-2

박정희와 윤동주 비교 하성환 주주통신원l승인2018.10.10l수정2018.10.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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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소년 박정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보병 80연대의 구미지역 원정 훈련을 구경하면서 긴 칼 찬 군인을 흠모하던 시절, 윤동주는 등사판 문예지를 만듭니다.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동심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 명동』이란 문예지를 만들며 시적 감수성을 연마합니다. 윤동주는 어린 시절 아명이 윤해환이었습니다.

북경 유학을 다녀온 뒤 명동소학교 교사로 있던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소학교 교장이자 독립운동가 김약연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딸을 낳지만 어린 나이에 그만 병으로 죽고 맙니다. 윤동주는 아버지 윤영석이 결혼한 지 8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명동교회 장로였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출생 소식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어린 손자 윤동주가 해처럼 밝게 자라라는 뜻으로 윤해환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해처럼 밝은 윤동주의 시적 감수성은 북간도 명동소학교 시절 등사판 잡지 『새 명동』을 만들면서 이미 시인으로서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에 의하여 개척된 북간도 명동촌에서의 생활과 은진중학교 시절은 윤동주에게 매우 중요한 시절이었습니다. 민족주의 독립지사 김약연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가톨릭 계통의 외국 선교사가 세운 은진중학교는 어린 윤동주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윤동주의 일생에서 명동시절만큼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날들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동창인 늦봄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윤동주는 아주 고요하고 내면적인 친구였다’고 전했습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며 일본어, 일본사, 군사훈련과목에서 특급실력을 갖추며 황국신민으로서 제국주의 식민지 교육에 흠뻑 젖어들 때 윤동주는 정지용의 동시와 시집에 심취합니다. 박정희가 10대 후반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만족하지 못하고 긴 칼 찬 군인을 흠모하며 만주 군관학교를 동경할 때 윤동주는 앉은 자리에서 백석의 시집 『사슴』을 완전히 베낄 정도로 시인으로서 열정과 면모를 드러냅니다. 1936년 윤동주가 스무 살 되던 해 신사참배 거부로 다니던 평양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윤동주는 부득이 만주 광명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합니다. 박정희가 만주 육군군관학교 입학시험에 첫 번째 떨어지던 그 시절, 윤동주는 북간도 연길에서 발간되던 『가톨릭 소년』지에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등 몇 편의 동시를 발표합니다.

특히 21살에 발표된 동시 『오줌싸개 지도』는 식민지 현실이라는 윤동주의 시대인식이 생활 속 어린 동생의 오줌 싼 지도에 동시 형태로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빨랫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는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쏴서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식민지 시절 만주로 쫓겨 온 북만주 동포들의 신산한 삶을 오줌으로 얼룩진 요에 그려진 지도에 비유하며 작품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계신 별나라 지도’라고 묻는 낙천적인 질문에 ‘돈 벌러 간 아버지 계신 만주 땅 지도인가’라는 시적 표현은 당대 식민지 유랑민의 삶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북간도 용정 시절 윤동주는 시인 강소천을 만났고 정지용의 시집에 깊이 파고들며 탐독하였습니다. 시인으로서 윤동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시인은 아마도 『향수』의 시인 정지용일 것입니다. 윤동주가 즐겨 읽었던 동시는 정지용과 윤석중의 동시인데 그가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한 시인이자 윤동주의 시 세계에 동심의 상상력과 문학적 자양분의 토대가 되었던 인물이 바로 정지용이기 때문입니다.

22살 박정희가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겠다’고 혈서를 써 가며 만주 군관학교에 두 번째 지원하던 그 시절,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문과에 입학하여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방학 때 윤동주는 북간도 용정으로 돌아와 교회 성경학교에서 태극기와 애국가를 가르치고 기미독립운동(1919)과 광주학생운동(1929)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민족의식에 충만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식민지 청년으로서 항일의식을 다음 어린 세대에게 가르쳤습니다.

▲ 윤동주 시비 「서시」 (연세대 교정)윤동주 시비 뒤로 보이는 건물이 핀슨홀인데 윤동주 재학 당시엔 송몽규, 강처중 3총사가 묵었던 기숙사였다                         (사진 출처 : 하성환)

이 시기 윤동주는 송몽규(고종사촌)와 함께 최현배 선생의 조선어 수업과 손진태 교수의 역사수업, 그리고 이양하 교수의 영문학 강의를 통해 민족과 역사 앞에 깊은 자기 성찰을 합니다. ‘산모퉁이 외딴 곳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다시 돌아서지만 사나이가 가엽고 그리워서 다시 우물을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식민지 현실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끊임없는 침전은 내면을 가만히 응시하는 『자화상』을 탄생시켰습니다.

23살의 박정희가 교사 신분을 박차고 삼수 끝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던 그 시절! 동갑내기 윤동주는 23살의 나이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과 김윤경 선생의 조선어 수업과 손진태 교수의 역사수업, 그리고 이양하 교수의 영문학 강의를 통해 23살의 윤동주는 민족과 역사 앞에 깊은 자기 성찰을 합니다.

특히 한글에 대한 애정과 매력을 느끼고 윤동주로 하여금 시를 쓰도록 동기를 부여한 인물은 최현배, 김윤경, 이양하 세분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모퉁이 외딴 곳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다시 돌아서서 내면을 가만히 응시하는’ 『자화상』을 바탕으로 1년 간 절필 끝에 23살이 끝나가던 해 『팔복』을 씁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민족이 처한 식민지 현실에 슬퍼하면서도 시인으로서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스스로 위로하며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합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어두워가는 식민지 하늘 아래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겠다는 의지와 달리 복을 얻고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영원히 슬픔을 감내하는 슬퍼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독교 신앙을 통해 표현합니다.

23살의 식민지 청년 윤동주! 1937년 중일전쟁 직후 전시 하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닫던 군국주의 시절! 윤동주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 앞에 절망하며 어린 시절 자신의 시적 자양분이 되었던 기독교적 신앙을 토대로 자신의 내면을 쉼 없이 성찰하고 식민지 어둠의 현실에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려 합니다. 윤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 때로부터 1941년 12월 졸업할 때까지 33편의 시를 씁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는 백양로 은빛 물결을 지나 언더우드 동상 앞을 즐겨 걸었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서강 들녘을 거닐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기숙사의 다락방, 교정의 잔디밭에 누워 식민지 조선의 어두운 현실을 내면의 성찰과 함께 서정성 짙은 시어로 승화시켰습니다. 윤동주 작품의 대표작인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새로운 길』, 『십자가』 등 윤동주 문학의 개화기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탄생한 작품들입니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성적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으로 편입학할 1942년 당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졸업 이후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시 세계에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절대적이어서 윤동주의 시의 근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윤동주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번민하고 삶을 모색하는 데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철학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식민지 청년으로서 고난의 길을 감당해 갔고 스스로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립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윤동주 시문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아버지의 권유로 사상운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일본 유학을 위해 도일과정에서 부득이 창씨개명을 하면서 윤동주는 『참회록』을 남깁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면 배에 오를 수 없었고 유학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명된 창씨계를 연희전문학교에 제출한 5일 후 윤동주는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를 탄식하며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참회합니다.

고종사촌이자 윤동주에겐 절친한 벗이며 자신의 우상이었던 송몽규와 함께 도쿄와 교토로 유학을 떠납니다. 일찌감치 18살의 나이에 독립군을 꿈꾸며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 분교 한인반 2기로 입교했던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항상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윤동주는 온화한 성품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북만주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윤동주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윤동주 시를 둘러싼 시공간적 배경 자체가 종교적 양심과 깊은 내면적 성찰에 바탕을 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항상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비행동성 그리고 송몽규와 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소극성을 고민하였습니다. 교토제국대학에 응시했으나 송몽규만 합격하고 자신은 떨어진 사실, 그리고 릿쿄대학 한 학기를 마친 후 도호쿠제국대학으로 편입학하려다 여의치 않아 송몽규가 있는 교토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학한 것 등이 모두 윤동주 자신에게는 콤플렉스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윤동주는 자신의 내면에 더욱더 깊이 천착함으로써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고뇌와 번민 그리고 저항의지의 순수성을 오롯이 빛나는 시어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이 ‘부끄럽지만 어둠을 저만큼 몰아내고 시대처럼 올 아침’의 『쉽게 씌어진 詩』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송몽규가 교토제국대학 사학과를 다닐 동안 윤동주는 한 학기 동안 릿쿄대학을 다녔는데 그 시절 쓴 작품입니다. 『쉽게 씌어진 詩』는 윤동주 사후 최초로 발표된 시이기도 합니다.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정지용이 1947년 2월 13일에 『쉽게 씌어진 詩』를 4면에 발표하고 3월 13일에는 『또 다른 고향』을, 그리고 7월 27일에는 『소년』을 경향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윤동주는 『쉽게 씌어진 詩』에서 ‘육첩방은 남의 나라...(중략)...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를 생각하며 한없이 작아진 ‘자신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로 위안’합니다. 도쿄 유학 시절 낯선 타국에서 식민지 어두운 현실과 함께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내면적 성찰을 민족의식을 담아 시적 언어로 승화시켰던 작품입니다.

윤동주는 1942년 가을 송몽규가 있는 교토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합니다. 그 곳은 자신이 시인으로서 열렬히 흠모했던 정지용이 다녔던 대학으로 윤동주는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적을 두고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송몽규 등 조선의 유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던 1944년 그 해!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혐의로 징역 2년이라는 재판을 받습니다. 일명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혐의로 1943년 여름 귀향을 앞두고 7월 14일 체포됩니다. 윤동주를 체포한 자는 고우로기라는 일본인 형사였는데 북간도로 소화물을 부친 후 기차역에서 출발을 기다리던 윤동주의 손목에 수갑을 채웁니다. 그는 이미 요시찰 인물이었던 송몽규를 윤동주보다 나흘 앞선 7월 10일에 체포합니다. 체포 이유는 모임을 주도한 송몽규가 자신의 하숙집과 윤동주 하숙집에서 징병제도를 조선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여 독립지도자를 양성하여 궐기할 것을 모의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박정희가 만주국군 장교가 되어 중국 항일부대와 싸울 때 윤동주는 생체실험을 당하며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죽어갔습니다. 해방 6개월을 앞두고 1945년 2월 16일! 71년 전 28살의 팔팔한 식민지 청년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며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 앞에 꽃같이 피를 흘리며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숨을 거둡니다.

숨 막히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분연히 떨쳐 독립투쟁을 펼쳤던 이회영, 김산과 다르게 윤동주는 총을 들고 항일의지를 불태우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 너도나도 친일의 길을 걸으며 일본어로 작품을 쓰던 시절!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이 학병과 징병, 정신대를 독려하며 적극적 친일부역행위를 서슴지 않던 시절! 시인 윤동주는 한글로 시를 쓰며 식민지 청년으로서 깊은 고뇌와 성찰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민족의 제단에 꽃 같이 피를 흘리며 식민지 현실에 고뇌하는 슬픈 시인의 자화상으로 영원히 되살아옵니다.

적국의 땅 차디찬 형무소 바닥에서 외마디 비명을 크게 지르고 죽어간 윤동주! 눈을 부릅뜬 채 죽어간 송몽규!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피가 모자라자 생리적 식염수를 혈장 대용으로 쓸 수 있는지를 조선인 청년들에게 실험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체실험을 당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간 청년들이 64명(1943), 131명(1944), 259명(1945) 등 전쟁 말기 재소자 사망률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윤동주를 비롯한 조선의 청년들이 생체실험으로 희생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구타와 고문, 조선어로 적힌 불온한(?) 시어들을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강압을 받으면서 윤동주는 두툼한 서류뭉치와 함께 순국합니다.

▲ 윤동주 무덤(북만주 용정 소재)윤동주 무덤 근처에 고종사촌 송몽규의 무덤도 같이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사)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윤동주의 무덤을 북간도 용정에서 발견한 것이 1985년이고 일본인 오무라 마츠오에 의해서 햇빛을 보게 됩니다. 더구나 연세대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것도 1968년 고 성내운 교수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윤동주 기념관이 세워진 것도 2000년에 가서야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윤동주의 판결문이 공개된 것이 2010년 7월 8일이고 송몽규 판결문의 존재가 확인되어 처음 공개된 것도 2011년 7월 22일입니다.

윤동주만큼 아니 윤동주보다 더욱 치열하게 살다간 송몽규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도 2016년 2월 개봉된 영화 『동주』를 통해서였다는 사실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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