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상황이었지만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산 박정희와 윤동주

박정희와 윤동주는 둘 다 1917년생 동갑내기 식민지 청년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초등학교 훈도, 즉 교사가 되는 사범학교는 머리가 똑똑하고 우수한 청년들이 선호했던 학교였습니다. 박정희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기에 당시 경북지역 수재들이 몰렸던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 시절 결석일수가 연평균 40일이 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박정희의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거나 거의 꼴찌 수준이었습니다. 대구사범 4학년 때 73등/73명, 5학년 때는 69등/7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어와 일본사, 군사훈련(교련) 과목은 매우 우수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에 문경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3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영문인지 23살의 박정희는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국군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신경육군 군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합니다.

신경육군 군관학교는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세운 만큼 일본육군사관학교의 분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인 박정희는 사범학교 재학 시절 결혼도 하였고 16세 이상 19세 이하라는 나이 제한에 걸려 불합격합니다. 박정희는 나이 제한을 뛰어넘고자 유명한 혈서를 써서 편지에 동봉하여 보냅니다. 친일 관제언론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에는 박정희의 혈서 편지에 징모과(徵募課) 직원이 감격했다는 기사가 소개됩니다. 긴 장문의 편지에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다”라고 쓴 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도 피력합니다. 반지에 써서 편지에 동봉한 혈서의 내용은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혈서까지 썼지만 두 번의 낙방 끝에 나이 제한이라는 자격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박정희 자신의 확고한 의지가 컸습니다. 그것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절 군사훈련을 가르쳤던 교련 주임 아리카와 대좌의 추천서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대구 출신 간도특설대 창설 요원인 강재호 소위가 만주 군관학교 교관부에서 근무하면서 큰 도움을 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가 1939년 말에 자발적 친일파로 구성된 간도 조선인 특설부대에 입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40년 신경 육군 군관학교에 입학했다는 유력한 학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만주 육군 군관학교 2기 생 240명 가운데 조선인은 11명이었는데 모두 자발적 친일군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사회적 존경과 대우를 받았던 교사의 지위를 박차고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에 두 번 낙방 후 삼수 끝에 어렵게 입학한 박정희! 그는 240명 졸업생 가운데 1등으로 졸업하고 만주국 마지막 황제 푸이로부터 금시계를 선물로 받습니다. 15등으로 입학했지만, 최우등으로 졸업하였기에 박정희는 대열 앞으로 나와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다음과 같이 충성을 맹세합니다.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관례대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일본 육사 57기, 전체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대신 상을 받고 졸업합니다. 육군대신 상을 받은 것은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생도 시절 군국주의 일본 군대의 학습과 훈련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임으로써 다른 일본인 생도들에게 모범이 될 정도였습니다. 일본 육사 교장은 일본 생도들 앞에서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인일지 몰라도 천황폐화께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박정희는 조선인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애써 지워버렸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라는 조선인 흔적이 남아 있는 창씨개명이 마음에 걸렸는지 완전히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 미모로’로 두 번씩이나 창씨개명을 했던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구미지역에 와서 가끔 야외 훈련을 하던 일본 군인들을 보면서 박정희는 ‘긴 칼’을 휘두르는 군인을 꿈꿉니다.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읽었던 이순신과 나폴레옹을 흠모하였고 대구사범학교 시절 나폴레옹 전기에 깊이 심취하면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애독하였습니다.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 14번이나 충무공 탄신일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현충사 성역화 공사 관계기관 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이순신 신격화와 군인 출신으로서 자신의 영웅주의 의식을 일치시켰습니다. 오로지 영웅주의와 힘의 논리를 인격 속에 내면화했던 식민지 청년 박정희! 일본 군국주의 장교를 양성했던 군관학교에서 천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충성심, 그리고 사무라이 문화로 의식화돼 갔습니다.

대통령 시절 자신의 청와대 집무실에서 가끔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가죽 장화에 말채찍을 들곤 하였습니다. 말 달리던 만군(滿軍) 장교 시절이 그리웠던 것이지요. 그럴 때 박정희는 기분 좋은 표정이었습니다. 실제로 박정희는 일본 영화 수입과 상영이 금지돼 있던 70년대에 중앙정보부 요원을 통해 외교 행낭 편으로 배달된 일본 사무라이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보았습니다. 군국주의 의식과 사무라이 문화를 흠모하다 죽은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한 일본인 외교관은 ‘대일본 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박정희는 1944년 일본 육사 졸업 후 중국 열하성 보병 8단에 배속돼 중국항일부대(팔로군) 토벌에 참여하다 해방을 맞게 됩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일본군 장교로 팔로군(공산군)을 토벌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총 110차에 이르는 중국항일부대 팔로군 토벌이 진정 자랑할 만한 일일까요? 자신의 친일 행위를 반공 행위로 둔갑시켜 자신의 과거를 교묘히 위장하거나 미화하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팔로군(공산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항일부대로 70만 관동군에 맞서 1940년대 일제 말기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1940년대 빛나는 항일무장투쟁의 백미인 조선의용군의 용맹무쌍한 전투 역시 모두 이 팔로군 부대와 연계된 속에서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의열단 출신으로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 『21세기 신화』의 작가 고 김학철 선생은 호가장 전투에서 당당히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일본 관동군과 교전하다 체포돼 한쪽 다리를 절단합니다. 또한, 의열단 출신으로 관동군에 맞서 싸우다 1944년 반소탕전에서 장렬히 전사한 윤세주도 조선의용군 출신입니다. 1940년대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항일부대인 팔로군 소속으로 일제 관동군에 맞서 가장 용맹스럽게 싸웠던 항일독립군 부대였습니다.

 ▲ 연변 조선족 작가 고 김학철(본명 홍성걸)조선의용대 출신으로 호가장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호가장 전투는 중국 인민학교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전투이다. 작품 <20세기의 신화>, <최후의 분대장>을 통해 북쪽 김일성 정권의 우상화와 조선의용군 탄압 사실을 폭로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신문사)

만주군 장교 시절 박정희는 조선독립군 출몰 소식이 방송을 타면 박정희는 토벌에 앞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よし’를 외치며 고함을 질러대곤 했다고 고 곽태영 선생은 전했습니다. 고 곽태영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백범 김구 선생을 살해한 민족반역자 안두희를 수년간 추적하여 해방 후 최초로 응징했던 분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 말기에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항일독립군 전사들을 때려잡는 데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일제의 무조건 항복 소식 앞에 박정희는 기회주의적인 변신을 시도합니다. 해방 후 사이비 독립군 중위로 변신하여 한국광복군 제3지대 2중대장으로 귀국합니다. 그 후 조선 경비 사관학교(육군 사관학교 전신) 2기생으로 남조선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장교가 되어 춘천 8연대,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으로 근무합니다.

▲ 박정희 친형 박상희(독립운동가)일제강점기 신간회 간부,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기자, 여운형의 건국동맹 등 항일운동에 투신하였고, 해방 후 건준, 인민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활동을 하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김종필은 박상희의 사위이다.
▲ 박정희 친형 박상희(독립운동가)일제강점기 신간회 간부,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기자, 여운형의 건국동맹 등 항일운동에 투신하였고, 해방 후 건준, 인민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활동을 하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김종필은 박상희의 사위이다.

해방 직후 박정희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자신의 친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고 남로당에 가입합니다. 자신의 셋째 형 박상희는 박정희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장으로서 무능했고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박성빈과 달리 셋째 형 박상희는 성격이 활달했고 명석했습니다. 박상희는 일제 치하 신간회 활동, 조선일보, 동아일보 구미지국장과 기자를 역임할 정도로 항일민족의식과 사회주의 의식이 투철했습니다. 박상희는 사업수완도 뛰어나 여러 채의 집을 사서 형제들에게 줄 정도로 큰돈을 벌었고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 시절 기숙사비를 대줄 정도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셋째 형 박상희가 1946년 10월 대구인민항쟁 당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자 박정희는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로당에 가입합니다.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은 미군정의 탄압이 심화돼 남로당이 지하화한 시점에서 이루어집니다. 더구나 박정희의 지위는 남로당 간부(군사책임자)로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적발될 경우 군인으로서 출세는 물론이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좌우 대결로 치닫던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방 직후 조선의 정세가 좌익세력이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상황이라 할지라도 박정희에게는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단순히 힘의 논리를 좇아 박정희가 기회주의자로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948년 당시 박정희는 이화여대생 이현란이라는 여성과 약혼한 상태에서 용산 관사에서 동거 중이었습니다. 물론 유부남인 것을 숨긴 사실이 드러나 가출을 시도했던 이현란과 갈등은 심각했고 그만큼 박정희는 이 여성에게 집착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육사 중대장 재직 당시 여순 사건(1948. 11)이 발생하는데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책임자로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동료 장교들의 명단을 순순히 넘겨주는 대가로 처형을 면하게 됩니다. 한국 군부 내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로서 박정희가 넘겨준 명단에 따라 김종석, 최남균 중령 등 72명의 장교가 처형됩니다.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으로서 동지들을 밀고한 대가로 1948~1949년 숙군작업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합니다.

박정희가 숙군에서 살아남게 된 데에는 만주군 출신 친일 군부 인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총살형을 기다리던 박정희 소령은 어느 날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마주하며 한 번 살려달라고 구명을 합니다. 박정희의 구명 운동에 김창룡은 연대보증을 서주었고 만주군 출신 백선엽과 정일권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사형집행 면제를 정식으로 건의했습니다. 또한, 이승만한테 각각 찾아가 박정희 구명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백선엽은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와 윌리엄 로버츠 준장(미 군사고문단장)에게도 구명 활동을 했습니다.

▲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조선국방경비대 창설 요원이자 한국군의 군사고문으로서 '국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창설 당시 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김백일, 박정희 등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적극 기용했고 광복군 출신을 홀대했다. 무엇보다 제주 4・3항쟁(1948. 4)과 여순사건(1948.10) 직후 민간인 학살의 실질적 배후이자 한국군부와 정치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이승만 반공국가 탄생(?)에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하우스만 대위(가운데) 존 무초 미 대사(왼쪽) 윌리엄 로버츠(미군사고문단장)
(사진 출처 : 한겨레 신문사)

여기에는 만주군 군의관(중좌) 출신 원용덕이 백선엽에게 박정희 구명을 강력히 요청한 배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악질 친일파 집단인 조선인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이 한국군 장교가 되는 데에 원용덕의 힘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박정희는 자신의 첫 번째 부인(김호남)에게서 태어난 큰딸(박재옥) 결혼식 때 주례를 원용덕에게 부탁할 정도로 생명의 은인에 대해 특별한 고마움을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와 만주군관학교, 그리고 일본 육사를 거치면서 군국주의 파시즘에 깊숙이 물들었고 사무라이 문화 숭배자가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술에 취하면 일본 가요를 즐겨 불렀고 화가 나면 일본 군용도를 마구 휘두르곤 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당쟁과 사화로 일관한 분열과 오욕의 역사로 규정한 박정희는 식민사관을 주장한 어떤 일본인 관학자보다 일제 식민사관으로 오염된 인물이었습니다. 5·16 쿠데타 직후 발간한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이나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는 우리 민족사에는 악의 유산이 많다며 사대주의, 이조당쟁사, 식민지 노예근성을 깨끗이 청산할 것을 역설한 점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빈곤과 나락과 안일무사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았고…. (중략) 단 한 번 국가다운 국가를 세워보지 못하였음이 오늘까지의 우리의 역사”라며 “생각하면 참으로...(중략)...통탄과 비분과 치욕을 금할 수 없는 우리의 과거였다.”라고 회상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기에...(중략)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박정희 자신의 솔직한 신념이자 그릇된 확신이었습니다.

또한, 박정희는 일본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의회정치를 타파하고 천황제 절대주의를 기도하며 일으킨 1932년 5·15 사건과 1936년 2·26 사건을 열렬히 흠모했던 군국주의 파시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박정희는 쇼와 유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자 군부 쿠데타를 욕망한 인물이었습니다.

흔히들 박정희 18년 개발독재 기간 한국은 수천 년 빈곤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평가합니다. 박정희 집권 기간 이룩한 경제성장을 박정희 1인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편향된 해석일 뿐입니다. 전태일 같은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과 눈물이 빚어낸 경제 성장이자 도시노동자의 저임금을 저곡가정책으로 뒷받침한 농민들의 희생 위에 이룩한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세계 최고의 산업 재해 발생 국가였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반면에 부유한 자들의 불로소득은 천정부지로 치솟던 시절이었습니다. 1963년 기준 강남의 땅값은 7년 후 압구정동이 25배로 올랐고 신사동은 50배로 뛰었습니다. 땅 부자들이 생겨나고 불로소득 계층이 선망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 도래했습니다. 은행 여신금리가 20% 안팎이던 시절에 2~3%의 관치금융으로 특혜 대출을 받은 재벌들은 다투어 부동산 투기에 열광하였습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한국 사회 경제정의를 침몰시켰고 사회 전반에 물신주의를 뿌리내린 재앙의 근원이었습니다.

쇼와 유신을 흠모하고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국민으로 하여금 암기를 강요했던 혁명 공약을 스스로 배반하며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대통령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승만의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처럼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고문 등 정치공작과 공포정치를 통해 삼선개헌(1969)을 새벽에 날치기 처리하였습니다. 박정희의 헌정 질서 유린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72년 10월 유신 선포를 통해 종신대통령을 기도하였고 민주주의를 뿌리째 훼손하였습니다. ‘영도자적 대통령제’를 표방한 70년대 유신 체제는 30년대 군국주의 ‘쇼와 유신의 한국판’으로 삼권분립을 무력화하였고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시민의 자유권과 기본적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고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이 언론사와 대학에 상시 상주하면서 언론을 통제하고 민권을 난도질하였습니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대학교수들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고문 살해하거나 학원에서 추방하였고 유신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판사들을 법관재임용 심사를 통해 법복을 강제로 벗겼습니다. 야당 대선 후보이자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을 납치 살해하려는 시도에 중앙정보부 등 국가 기구를 사조직처럼 동원하는 등 독재 권력은 후안무치 그 자체였습니다. 급기야 야당 총재이자 국회의원인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는 등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독재자 박정희는 부마 민주항쟁이라는 거센 저항에 직면합니다.

▲ 박정희 흉상(서울시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 소재)문래근린공원은 본래 6관구 사령부, 수도군단 등 군대가 주둔했던 지역으로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박정희는 이곳 벙커에서 쿠데타를 지휘했다. 박정희 흉상은 현재 철거 논란에 휩싸여 있다.
(사진 출처 : 하성환)

그러나 박정희는 ‘서울에서 부마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자신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라고 하였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킬링필드 캄보디아의 사례를 들며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였는데 한국에서 100~200만 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쯤은 문제 될 것 없다며 부추겼습니다. 부마항쟁(1979) 당시 진압부대로 투입된 공수부대가 고스란히 광주 민중항쟁(1980) 당시 학살 부대로 투입되었던 역사적 사실 앞에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총리 시절 미쓰이, 미쓰비시 재벌에 각종 특혜를 지원했듯이 박정희도 60~70년대 개발독재를 주도하면서 초저금리 관치금융 등 온갖 특혜를 재벌들에게 제공하면서 대기업집단 중심 성장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1997년 11월 IMF 위기의 진원지로 작용하였고 불법 정치자금이라는 고질적인 정경유착의 부패 고리를 낳았습니다. 기실 50대 이후 장·노년층들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그런 탓에 박정희를 열광합니다. 그러나 집권 기간 경제성장률을 단순 비교하면 8.5%의 박정희보다 9.3%의 성장률은 보인 전두환이 훨씬 높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장·노년층이라 할지라도 전두환을 숭배하거나 열광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비록 형식적이지만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고 사형을 선고하는 등 역사 청산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18년 군사정권 시절 저질렀던 강제징집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의문의 죽음들, 숱한 인권 유린 사태를 생각하면 박정희 또한 준엄하게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한 역사 청산은 없었습니다.

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가로서 독일은 전형적인 유럽 사회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 집권 6년 만에 독일은 일약 경제 대국, 군사 강국, 정치 대국으로 급부상합니다. 그러나 독일 국민 누구도 히틀러에 열광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독일은 철저하게 역사를 청산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오늘날에도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인들을 색출하여 90이 넘은 고령에도 법정에 세우고 징역형을 선고합니다. 우리가 독일에서 배워야 할 소중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매 순간 역사를 거슬러 갔던 기회주의자 박정희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박정희 신화로 왜곡된 역사의 장막을 걷어내고 역사의 진실에 깊이 천착해야 할 이유입니다.

▲ 무궁화동산(옛 궁정동 안가로 현재 청와대 옆에 위치)친일경찰 노덕술이 살았던 집터이자 1979년 10・26 당시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된 장소이다. 1993년 문민정부 때 안가를 철거하고 시민휴식공간이 되었다. (사진 출처 : 하성환)

 

편집자 주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나 그 이름이 일본인답지 않다고 오카모토 미노루로 또 개명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근거로 제시된 자료인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은 '신뢰성이 낮고, 2판에 실렸지만 근거가 부족해' 다음 판에서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박정희가 그런 의사가 있었는지, 실제로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입증할 자료도 명백한 근거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리고 최초 유포가 북한에서 박정희를 비난하며 나온 글로 보인다는 견해입니다. 비록 심증과 개연성이 있다하여도 명확한 자료는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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