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내 평생 치고 박는 싸움은 처음이었고, 형 또래 동기생들의 꼬임에 나선 첫 싸움

내 평생 단 한 번의 싸움

▲ 금계국을 그리며(최호진 주주통신원 그림)

“야! 영균이 잘한다!”

“그래! 그렇게 눌러버려!”

“야! 선태야, 발로 넘어뜨려! 그렇지 그렇게!”

아이들은 빙 둘러서서 응원하느라고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야단이다. 그렇지만 반에서 가장 순둥이들인 영균이와 선태는 싸우는 방법조차 몰라서 서로 붙들고 넘어뜨린 다음에 붙들고 뒹굴기만 한다. 갈아엎어 놓은 논바닥의 흙덩이는 두 아이가 엉켜서 싸우고 있는 모습이 흙덩이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덩이가 크고 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흙덩이로 이루어진 두둑의 사이에서 뒹굴다 보니 온통 흙 범벅이 되어서 엎치락뒤치락만 되풀이하고 있다.

“야! 주먹으로 때려야지!”

이젠 두들겨 주라고 주문이다. 그러나 두 아이는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싸울 줄을 몰랐다. 곁에서 그렇게 주먹질을 하라고 하여도 주먹질을 해보지 않았으니 제대로 때릴 줄도 모른다.

힘에서 우위인 영균이가 몸뚱이를 깔고 앉아서 목을 조르려고 덤빈다. 이제 정말 목을 조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다급한 상황이 되었다. 밑에서 깔려서 허우적대던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든지 이 목 조름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싸움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고 싸워 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 목을 조르는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나는 무조건 팔을 휘둘렀다.

영균이는 두 손으로 나의 목을 조이느라고 손을 쓸 수 없고 대신에 내 두 손은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마구 휘두르는 나의 손에 무엇인가가 맞았다. 내 주먹이 아파졌지만 나는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무조건 아무 쪽이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더 잡아 누를 것이므로 마구 휘둘러 대었다.

몇 번인가 무엇이 맞아서 주먹이 얼얼해 왔다. 그때 아이들이 “피난다.” 하고 소리를 쳤다.

“영균이 코피 터졌다.”

그 순간 나의 얼굴에 영균의 코피가 ‘뚜 뚝. 그리고 영균이는 목을 조르던 손을 놓고 코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은 김선태이다. 한자로 善<착할 선> 泰 <클 태>이니 <크게 착한 이>가 된다. 그래서일까? 내 70 평생 주먹다짐을 하면서 싸워 본 것이 단 한 번이라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고, 그것도 초등학교 3학년 때에 못된 친구들이 싸움을 붙여서 억지로 만들어진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되었고, 이미 6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생생할 수밖에 없다. 오직 한 번의 싸움이었으니 다른 것에 겹쳐 지워지거나 사라질 일이 전혀 없는 단 하나의 영상이기 때문이다.

1953년 4월 초순쯤이었나 보다. 학교에서 파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학교에서 부터 철도가 있는 중동 마을까지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지나야 한다. 이때만 하여도 보리를 심는 집이 그리 많지 않아서 빈 들판이었다. 날씨는 가물어서 갈아 엎어놓은 논바닥에서 풀썩풀썩 흙먼지가 일곤 하였다. 이 무렵엔 아직 못자리도 안 하고 그러니까 논바닥은 갈아엎어 놓은 흙더미가 울퉁불퉁하여서 논둑이 아닌 논바닥을 가로질러서 다니는 지름길도 내지 못하고 오직 논둑길을 따라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다니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었지만, 중간에 다리가 끊어져 건너는데, 시간이 걸렸다. 보를 막은 나무 말뚝들을 디디고 한 사람씩 차례로 건너야 하니까 여간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아이가 한꺼번에 오갈 때는 중동부락 앞의 검정다리<발전소의 물을 예당 간척지로 보낼 때는 큰 철재 수문을 막고 그렇지 않을 때는 들어 올리고 하도록 만들어진 작은 댐, 철재 수문이 세 개가 있는 다리>를 지나서 달려오는 것이 더 편하기만 하였다.

그날은 들판 가운뎃길로 오는 아이들과 검정다리를 통해서 좀 돌아오는 아이들이 누가 먼저 오나 시합<내기>를 하는 날이었다. 가운뎃길은 가깝기는 하지만 모두 논둑길이고, 다리를 건너는데 시간이 걸린다. 검정다리 길은 좀 멀지만 마차 정도는 다닐 수 있게 닦여진 길이어서 아이들이 함께 달려 올 수 있는 편한 길이다.

이렇게 달려온 아이들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오늘 우리가 모이는 자리이다.

이렇게 하여 검정다리 길로 온 아이들이 내기에 이겼다. 물론 내기에 이겼다고 무엇을 내 거는 것은 아니고, 서로 자존심만의 대결이었다.

이 내기에서 이긴 편은 동막골과 정흥리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은 학교에 6~7km 정도는 되는 길을 매일 달려 다니다시피 하는 아이들이다. 반면에 진 팀은 마천리 팀으로 이들은 학교에서 약 4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마을의 아이들이었다. 달리기에서 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정흥리에 사는 친구들<동급생>은 대부분이 우리보다 나이가 한두 살 혹은 세 살까지 많은 친구였다.

1952년 우리나라의 의무교육법 시행령이 발포 되면서 학교에 내는 월사금(등록금)이 없어지게 되어 돈이 없어서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있던 만 12살 이하의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입학을 하였다. 그런데 너무 나이가 많은 12살짜리를 1학년에 입학시킬 수는 없으니까 시험을 보아서 서당이라도 다녀서 글자를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나이에 비슷하게 2학년 또는 3학년에 입학을 시켰다. 이런 이유로 작년 2학년 때는 세 살이나 위인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이런 친구들은 덩치도 크고 힘도 센 아이들이었다.

이런 동급생 형들이 두 사람을 싸우게 만들어 놓고 재미있다고 손뼉을 치면서 응원을 하고 더 싸우라고 독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재미나게 응원을 하던 정흥리 형들은 이제 코피가 터져 버린 영균이에게 더 싸우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영균이가 졌네. 코피가 터졌으니 어쩔 수 없지!”

모두 싱겁게 끝나버린 싸움 구경이 아쉬운 듯 이렇게 투덜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와 영균이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서 집에 가면 어머니께 꾸중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다행히 친구들은 두 사람의 옷을 온몸을 두들기듯 하면서 털어 주었다. 흙이 묻기는 하였지만, 먼지만은 나지 않을 만큼은 옷을 털어 주었기에 나는 난생처음 싸움에서 이겼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영균이에게 미안하기만 하였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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