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사에 남긴 오점

▲ 일제강점기 시절 청람 문세영이 1938년 10년 고행 속에 만든 『조선어 사전』은 우리말로 풀이를 단 최초의 국어사전이다. 국어사전편찬사에서 위대한 업적으로 길이 남을 일이다. 6・25 전쟁 당시 1951년 납북돼 1952년 사망하였지만, 아직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 시절 청람 문세영이 1938년 10년 고행 속에 만든 『조선어 사전』은 우리말로 풀이를 단 최초의 국어사전이다. 국어사전편찬사에서 위대한 업적으로 길이 남을 일이다. 6・25 전쟁 당시 1951년 납북돼 1952년 사망하였지만, 아직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1939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5면 2단 기사로 한글학자 문세영과 대담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감격할 일이다. 정음 반포 493년 되는 지난해(필자 주 : 1938년) 7월 비로소 숨은 독학자 청람 문세영 씨의 10년 연한의 결정으로써 우리로서 처음 가져보는 역사적인 대저가 세상에 나왔으니 그는 곧 조선어사전이다. (중략) 조선어사전 초판 1천부가 나온 지 불과 순일에 다 없어지고 다시 재판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니...(중략) 10만 여의 어휘로 엮어진 범 1천 7백여 페이지의 거대한 저술 그것이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부터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중략) 중학 시절부터 조선말에 대한 관심이 컸으나 어디 하나 책으로 밝혀준 것이 없음에 은연히 발분하여 동양대학 시대부터 이것을 이루어보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여 한 가지 두 가지 어휘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중략) 배재고보 교편까지 버리고 재산 전부를 팔아서 은행에 넣고 감 꼬지 빼어 먹 듯하며 3년을 작정하고 들어앉아서는 하루 평균 4시간의 수면으로 제때에 못 먹고 오로지 일심 정력으로 다해야 한다는 것이 예정의 시일을 넘어 범 5년이 걸리어 끝났으나 누구 하나 선 듯 나서서 출판해 줄 이가 없어 2중의 고난을 당하였다....(중략) 우리도 조선말 사전을 갖게 되었다는 것부터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기쁨을 얻기 위하여 10년 동안 고난의 길을 밟아 온 저자에게 우리는 무한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4시간만 자고 밥도 제 때 먹질 못한 채 꼬박 5년이 걸려 사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 두 평 되는 마루에서 열 몇 시간씩 쪼그리고 앉아 우리말로 풀이를 단 『조선어 사전』을 만든 것이다. 문세영의 『조선어 사전』은 최초의 우리말 사전으로 사전편찬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업적이다. 문세영은 우리말로 된 사전 편찬을 위해 안정된 직장 배재고보와 근화학교 교사도 사직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은행에 넣어 두고 감 꼬지 빼어 먹 듯하며 두 평 마루에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5년을 고군분투한 것이다.

1928년 근화학교를 사직하고 1929년부터 사전편찬에 몰두했다. 따라서 1938년에 발간된 문세영의 『조선어 사전』은 1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실제로 문세영이 사전 편찬을 마음먹고 우리말을 카드에 적어 닥치는 대로 낱말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였다. 1917년 도쿄 동양대학에 입학해 1921년에 졸업하였으니 문세영의 사전 편찬 기간은 적게 잡아도 2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28년 근화학교를 사직하고 1929년부터였다. 매일 열 몇 시간씩 앉은뱅이책상에 쪼그리고 앉아 우리말 낱말 카드를 만들고 어휘를 주해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작업하다 보니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한 지 4년째 되던 1932년에는 왼쪽 넓적다리에 마비증세가 왔다. 문세영은 일을 할 수 없어서 반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지내며 한방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초인적인 고행 속에 10만 어휘가 넘는 『조선어사전』의 1차 원고를 1936년에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문세영은 자신이 회원으로 있던 조선어학회에 출간을 문의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절당한다. 그러자 조선어학회 핵심간부였던 환산 이윤재가 문세영의 『조선어사전』 초고를 일일이 교정하며 세심하게 지도해 주었다. 그 일은 환산 이윤재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돼 옥고를 치르기 직전인 1937년 6월까지 이루어졌다. 문세영의 『조선어사전』 초고가 나온 1936년부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기 직전인 1937년 6월까지 이윤재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당시 가까운 거리에서 문세영과 이윤재의 토론과정을 지켜보았던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원은 두 사람의 토론과정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런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은 해방 후 이윤재의 『표준 조선말 사전』(1947)과 함께 경쟁하면서 1950년대까지 우리말을 대표하는 국어사전이었다. 그러나 1957년 이희승의 문세영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이희승의 문세영 비판은 한글학회와의 대립, 긴장관계 속에서 나온 것이다.

주시경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한글전용에 맞서서 일석(一石) 이희승은 국한혼용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거기엔 주시경 학파의 언어민족주의 대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관학아카데미즘의 직접적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국어학계 학문 권력을 둘러싼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과학적'국어학의 반격이 존재했다. 그런 배경에서 이희승은 1957년 작심하고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을 비난한 것이다. 이미 수집한 이윤재의 어휘 카드를 문세영이 빼돌려서 만들었다는 이희승의 주장이다. 이는 문세영 자신의 인격에 대한 직설적 공격이었다.

한글학회의 『큰 사전』 발간을 앞두고 이희승 자신은 한글학회에 대항하기 위해 1년 전인 1956년부터 사전 편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61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1961)이 출간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1950년대까지 여러 판을 거듭하며 인기가 있었던 문세영의 사전은 서서히 퇴색되어 갔다. 그리고 오늘날 대중의 기억 속에서 문세영은 완전히 사라져 갔다. 바로 이희승의 문세영 비판이 가져온 결과이다. 요컨대 이희승의 문세영 비판은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지닌 역사적 의미가 퇴색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희승이 1957년과 1976년 두 번에 걸쳐 문세영을 비판한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문세영이 만든 『조선어사전』은 실제로 '이윤재의 어휘 카드를 도용하거나 훔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윤재가 문세영의 사전 편찬과 관련하여 크게 분노했다는 주장이다.

1957년 이희승이 이런 주장을 했을 당시 그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이자 서울대 문리대 학장 신분이었다. 무엇보다 1957년은 한글학회에서 숙원 사업이던 『큰 사전』 6권을 완간한 해이기도 하다. 이희승 자신과 대립, 긴장관계에 있던 한글학회가 『큰 사전』 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이희승은 100명이 넘는 인력의 도움으로 1956년 『국어대사전』 편찬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1961년에 25만 어휘의 『국어대사전』을 출간한 것이다. 이는 11만 어휘를 수록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과 16만 어휘를 담은 한글학회의 『큰 사전』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희승의 문세영 비판은 그런 대결과 흐름 속에서 나온 비상식적이고 근거 없는 발언이었다.

물론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은 일본 국어사전을 베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불필요한 한자어와 외국어를 대거 수록한 결과라는 비판도 컸다. 흔히 국어교사들이 우리말의 70%는 한자어라는 속설의 시발점이 바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은 한자어를 70% 이상 수록할 정도로 한자어를 대거 집어넣었다. 이는 이후 국한혼용, 바로 한자 섞어 쓰기 운동의 주된 근거로 작용했다. 2015년 초등교과서 한자병기를 주장하며 교과서 국한혼용을 강조했던 실체가 바로 이희승, 이숭녕 등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학문적 후예들이다.

이희승의 '딸깍발이 선비상'과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관학아카데미즘, 바로 '과학적'국어학을 분석적으로 비판해온 김영환 교수(부경대)의 연구 논문들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수록 어휘 수를 늘리기 위해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는 어휘수를 부풀리기 위해 한자숙어도 올렸다. 심지어 '언행군자지추기(言行君子之樞機)' 같은 한문마저 올렸는가하면 '예스, 굿 모닝, 고잉 마이 웨이' 같은 외국어도 수록했다. 외래어와 외국어의 구별 자체를 허물어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1957년 한글학회가 완간한 『큰 사전』과 대결하기 위해 이희승은 감정적인 집념으로 『국어대사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희승은 당시까지 판을 거듭하며 인기가 높았던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을 비난한 것이다. 즉 이윤재가 사전편찬을 위해 애써 모은 어휘 카드를 문세영이 이윤재의 집에서 도용 내지 빼돌린 결과라고 비난한 것이다. 문세영 연구의 독보적 권위자인 박용규 교수(고려대 한국사연구소)는 그런 이희승의 근거 없는 문세영 비판을 실증적인 사료들을 제시하며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러면 이희승은 왜 문세영을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발언을 작심하고 감행했을까? 그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8년에 조선어사전이 발간되었는데 20년 가까이 흐른 뒤에 왜 문세영의 인격에 치명적인 그런 발언을 도발적으로 시도했을까? 박용규 교수의 『조선어학회 33인』과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에 따르면 1957년은 문세영이 이미 사망한 지 5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리고 이윤재 역시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윤재의 『표준 조선말 사전』(1947)은 유고작으로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이윤재의 사위인 김병제가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1957년은 피해 당사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해자인 이희승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 문세영의 인격을 공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희승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가져오게 한 근원적 동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존재해 왔던 주시경학파의 '언어민족주의' 대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과학적'국어학의 대결이다.

주시경 학파의 언어민족주의는 언어와 민족을 한 몸으로 보는 언어-민족 일체관이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시기인 19세기 말 주시경은 한자세계를 한글세계로 바꾸는 혁명적 변화를 시도했다. 중국글자인 한자와 한문을 통해 조선사회를 지배해온 봉건 사대부계층의 지배언어를 폐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한문망국론을 주장한다. 19세기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 속에서 당대의 선각자들은 하나같이 한문망국론을 주장했다. 주시경이 교정을 본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 1897년 8월 5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논설이 실려 있다.

"백배나 나은 조선 글을 내버리고 어렵고 세상에 경계 없이 만든 청국 글을 기어이 배워 그 글을 숭상하기를 좋아하니 대단히 우습고 개탄할 일이라 (중략) 조선에서 사람들이 한문글자를 가지고 통정하기를 장구히 할 것 같으면 독립하는 생각은 없어질 듯하더라."

단재 신채호 선생 역시 당대 지배계층의 언어인 한자, 한문망국론을 주장한다. '공자의 조선만 있고 조선의 공자는 없다'며 개탄한 것이다. 즉 조선의 성리학이 폐쇄적인 지배계층의 사고체계이자 비주체적인 학문임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이 위기에 빠진 것이 편리한 우리말글을 버리고 한문을 숭상한 폐단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19세기말 식민지로 전락되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당대의 선각자들은 우리역사, 우리말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시경 선생은 '주보따리'로 불릴 정도로 항상 국어책이 가득 담긴 보따리를 옆에 끼고 분주히 한글보급에 앞장섰다.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랏말, 즉 민족어인 '우리 한글이 쇠락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역설하면서 밤낮으로 한글을 연구하고 널리 보급하였다. 이러한 한힌샘 주시경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은 수제자가 북쪽엔 히못 김두봉 선생이고 남쪽엔 외솔 최현배 선생이다.

남산 자락에 위치한 상동감리교회 내 조선어강습원 출신들인 김두봉, 최현배, 김윤경, 권덕규 등은 방학을 맞아 한글강습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 다 스승인 주시경 선생의 뜻, 바로 언어-민족 일체관을 받든 것이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우리말글 생활에서 평생을 '한글로만 쓰기'에 목이 쉬도록 외쳤던 분이다. 창씨개명과 조선어학회 활동 탄압에 항거하다 통분 끝에 자결한 신명균 선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강도 같은 일본 제국주의 탄압 아래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숱한 고난을 감내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 결정판이 1942-1943년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특히 배재고보 제자인 김석묵(창씨 명 시바타)은 취조를 맡은 고등계 형사였는데 스승인 이윤재를 고문할 때 '이 선생님', '이놈의 자식아!'라고 채찍과 몽둥이로 내리치면서 희롱을 일삼았다. 이윤재 선생은 6번의 물고문과 매일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물고문, 비행기태우기, 화롯불 속 뜨거운 쇠 젓가락으로 지지기, 펄펄 끓는 물 몸에 붓기, 추운 겨울날 얼음물 끼얹기 등 고문과 악형은 참혹하여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 한징 선생과 이윤재 선생 두 분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옥사한다.

해방이 되고 이틀째인 8월 17일 들것에 실려 나온 분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지도자인 고루 이극로 선생이다. 징역형을 6년으로 가장 세게 받았던 분이다. 다음으로 징역형을 세게 받은 분이 외솔 최현배 선생이다. 역시 8월 17일 함흥형무소에서 출감한다. 출감 직후 외솔 선생은 상한 몸을 돌보거나 연희전문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한글전용과 한글 보급, 그리고 한글교과서 편찬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국장이 되어 일상적인 우리말글 생활에 한글이 뿌리 내리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조선어학회 장지영, 이병기 등과 함께 한글교과서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 남과 북에서 한글세계로 문자세계가 통일되고 우리 말글생활이 하나로 통일된 것에는 주시경 학파의 언어민족주의 한글학자들의 피어린 수고의 결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화계사(서울시 성북구 수유동 소재) 일제강점기에는 최현배, 이희승 등 국어학자 9명이 기거하며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출처 : 한겨레신문사)  

바로 김일성 대학 초대 학장을 지내고 『조선말본』을 쓴 김두봉 선생, 이극로, 이만규, 정열모 등 주시경의 직계 제자 내지 한글전용에 온 힘을 기울였던 국어학자들이다. 남쪽 역시 주시경의 직계 제자인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등이 한글전용을 부르짖었다. 일제강점기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외국어 표기법', 조선어 표준어 사정 등 우리말글을 통일시키기 위한 수고의 결실이 오늘날 분단된 지 73년이 지나도 남북이 같은 언어를 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오롯이 주시경 학파의 한글학자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물을 우리 후손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처음 만난 두 정상들이 통역 없이 의사소통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시경 학파의 피어린 노력의 결실 때문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져온 '과학적' 국어학은 어떤 모습일까? 이희승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재학 당시 오구라 신페이의 제자였다. 오구라 신페이는 도쿄제대에서 근대 부루주아 언어학인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언어학자는 언어의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그 특징을 비교하고 해석하는 사람이지 언어에 가치를 부여하여 언어생활을 창조하고 말글운동을 하는 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소쉬르의 언어의 사회성을 강조하여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에 학자들이 우리말글을 만들어 내고 말 다듬기 운동을 하는 것은 학자 본연의 할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희승 역시 자신에게 '은사', '좋은 스승'이었던 오구라 신페이의 학설을 그대로 신봉했다. 그리하여 간간히 주시경 학파, 특히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 토박이말 살리기나 외국어를 우리말로 만들어 내는 활동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희승은 일제 강점기 시절엔 최현배 선생과 직접적으로 대결하거나 긴장관계를 드러낸 적은 없다. 1930년 조선어학회 가입 당시 최현배의 권유로 가입했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어학회 회원 다수가 이희승의 가입을 싫어했음에도 최현배 선생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가 '한글전용 촉진회'를 만들었을 때도 이희승은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한자를 점진적으로 폐지하고 한글전용을 부르짖었다.

그러던 그가 1949년 우리말본(최현배), 국어문법(이희승) 파동을 겪으면서 밑으로부터 갈라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국회에서 통과된 한글전용법 폐기를 주장하고 한자 섞어 쓰기를 강조한다. 심지어 한글학회와 대립하는 '한국어문 교육연구회'를 만들어 19년 동안 회장을 역임한다. 그 '한국어문 교육연구회'를 중심으로 1984년 전두환 정권에 청원하여 학술원 산하 임의단체로 '국어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리고 이후 꾸준히 국어학계, 국어교육학계, 국문학계와 연대하면서 정치력을 발휘해 1991년 '국립국어연구원'(오늘날 국립국어원)을 설립한다. 한편으로 '한국어문 교육연구회'는 자매기관인 '한국어문회'를 1991년 설립한다. 초대 회장은 이희승의 제자이자 '한국어문 교육연구회'회장 출신인 남광우가 맡았다. 한글전용 폐기 청원 및 관련 소송을 내는 등 한자 섞어 쓰기에 열광했다. 그리하여 『어문생활』, 『어문연구』, 『어문교육교재』 등 기관 매체들을 통해 '한자교육이 국어교육을 바로 잡는 지름길'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주관하는 한 단체이기도 하다.

이희승의 과학적 국어학의 학풍은 일제강점기 오구라 신페이의 제국대학 식민관학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오구라 신페이의 언어학은 가치중립적인 학문을 지향한다. 언어학자는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다듬는 존재가 아니다. 주어진 실증적인 언어 자료를 비교 분석해서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중립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경성제대 출신들인 이희승, 방종현, 이숭녕, 조윤제 등이 모두 그러한 일제강점기 학문의 영향 하에 놓인 인물들이다. 이는 마치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쓰다 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정설로 받아들여 우리 역사학계에 식민학문을 널리 퍼뜨린 것과 대동소이하다.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관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한사군 통치, 임나일본부설, 삼국사기 초기 기록 조작설 등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주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타율적 역사관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을 정신적으로 마비시키기 위한 학문적 왜곡이자 고도의 식민통치술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해방 이후에도 일제 식민 관학자들이 퍼뜨린 학설들을 정설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주시경 학파의 언어 민족주의는 당대 한글학자들이 걸어갔던 올바른 길이다. 우리말글을 지킴으로써 우리 민족을 살리는 길이었음은 명약관화하다. 문제는 오늘날 국어학계 전반을 이희승, 이숭녕의 관학아카데미즘이 학문 권력을 장악했다는 데 있다. 심지어 민족학회인 한글학회조차 한 때 한글운동을 부정하며 국어학자들의 일개 학술단체로 전락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적이 있다. 2015년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움직임은 한글학회의 반대운동으로 좌절되었지만 바로 이희승, 이숭녕의 '과학적'국어학의 후예들이 도발한 반격으로 볼 수 있다. 국어학계 학문 권력에서 이희승의 '과학적'국어학으로 기울어진 측면을 생각하면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움직임은 또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크다. 추후에 이를 막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한자 병기 반대 운동'이 처한 고민이자 위기적 상황이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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