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 62] 재승덕박(才勝德薄)

수년전 극심한 허리통증으로 자리에 누웠던 적이 있습니다. 신경협착으로 오른쪽 종아리까지 통증이 오면서 힘들게 일어나 벽을 붙잡고 화장실에 가야하는 암울한 시기였지요. ‘이대로 가벼운 산행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좋아하는 운동이나 맛집을 떠올리지 않은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약 2년 동안 이런저런 치료와 민간요법을 하던 중, 중국 심천의 어떤 중의원(中醫院,한방병원)에 가서 한달 정도 치료를 받았습니다. 꽤 규모가 큰 병원으로 현대적인 물리치료도 받고, 20여개의 안마 침대가 있어 중의학을 전공한 중의 치료사에게 허리 안마도 받았습니다.

그 병원의 실내 한쪽 벽에 건강과 장수(長壽)에 좋은 20(?) 가지가 나열되어있고 간단한 설명이 있었지요. 아래 순번부터 흥미 있게 읽어 가는데,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약이 생각보다 아래 순번에 있고 운동과 음식이 상위 순번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1번을 보고 너무 의외라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앞에 본 내용을 다 잊었지요.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1번에는 덕(德)이라는 글자가 선명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건강, 장수를 위해 덕을 강조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덕의 사전적 의미는,

1. 도덕적, 윤리적 이상 실현을 위한 사려 깊고 인간적인 성품.

2.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

3. 착한 일로 쌓은 어진 품성. 이라고 나왔습니다.

의미가 더 헷갈리네요. 누구나 많이 쓰고 알고 있지만 애매합니다. 그러나 재주라는 단어와 함께 쓰면 그 의미가 더 가깝게 옵니다. 널리 쓰이는 사자성어에 ‘재주가 많으면 덕이 부족하다’는 의미의 재승덕박(才勝德薄)이 있습니다. 재주가 많으면 반드시 덕이 없다는 의미인지, 재주는 많으나 덕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표현인지 확실한 출처는 중국문헌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단지 자치통감에 德勝才 謂之君子, 才勝德 謂之小人(덕승재 위지군자, 재승덕 위지소인)이라는 글이 보입니다. ‘덕이 재주를 앞서면 군자요, 재주가 덕을 이기면 소인이다’는 의미입니다.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추면 성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둘은 함께하기 어렵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재승덕박’한 인물로 널리 언급되는 이가 있습니다. 물론 헤아릴 수 없지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삼국지 조조의 ‘계륵’이란 고사에 나오는 양수(楊脩)입니다.

▲ 양수(175년~219년) : 후한 말기의 관료. 어머니가 원술의 누이동생이다. 사진 : 위키피디아

재주가 많은 양수는 특히 조조의 마음을 읽는데 뛰어났지요. 한 번은 조조가 정원을 만들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정원이 완성되자 참관을 하고는 아무 말 없이 문에다 활(活)자를 써놓고 가버립니다. 신하들이 말만 무성하지 그 뜻을 몰라 허둥댈 때, 양수가 나섭니다. '승상이 문(門)에다 활(活)자를 쓴 것은 정원이 너무 넓다(闊, 활)고 나무라니 정원의 크기를 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고사는 조조가 술을 한 병 가져와 먼저 한 잔 마시고는 술병에 일합(一合)이라고 써서 신하들에게 내립니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양수가 술병을 들어 한 잔 따라 마십니다. 그리고 설명을 합니다. '一合을 풀어보면 일인(一人) 일구(一口)이니, 한 명씩 한 모금 마시라'는 뜻입니다.

조조는 아들 조비와 조식을 놓고 후계자로 누구를 낙점할지 고민하였습니다. 한 번은 두 아들에게 밖으로 나갔다가 궁궐을 통과하라고 시키고, 궁궐 문지기에게는 절대로 자기 아들들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을 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조비는 궁궐 문지기가 막자 되돌아갑니다. 조식은 문지기가 문을 막자, ‘나는 승상의 명령으로 지나가는데 누가 감히 막느냐’며 문지기의 목을 치고 지나갑니다. 조식을 후계자로 지지했던 양수의 가르침이었지요. 여담이지만 조식은 술이 빌미기 되어 후계자가 되지 못합니다. 조비가 후계자가 되고 위나라 초대 황제가 됩니다.

다음으로 양수를 널리 알린, 가장 잘 알려진 고사가 계륵(鷄肋)입니다. 조조는 한중(漢中)을 놓고 유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번번이 패하고, 식량도 떨어져 초조해진 상태였습니다. 저녁에 닭갈비탕을 먹고 있는데 하후돈이 들어와 오늘 밤 암호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조조는 ‘계륵(鷄肋, 닭갈비)’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밤 양수는 짐을 꾸립니다. 양수는 ‘계륵이란 버리기는 아까우나 먹을 것이 없는 것으로, 유비에게 주기는 아깝지만 별 이득이 없으니 철수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속마음을 들킨 조조가 양수를 죽였다고 하고, 정사에서는 군기를 누설한 죄를 물어 조조가 양수를 죽였다고 합니다. 뛰어난 재주가 오히려 화가 된 경우이지요. 중국에서는 덕을 쌓으면 화가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좋은 약을 먹어도 화가 미치면 피할 수가 없지요.

재승덕박과 관련하여 중국의 양수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잘 어울리는 인물이 우리 주변에 살아있습니다. 참으로 재주가 많은 한 사람! 안 해본 일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 굳이 이름을 대지 않아도 모두 압니다. 언변도 청산유수입니다. 똑같은 입으로 자기가 만들었다고 했으면서도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색이 안 변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지요.

이분의 엄청난 재주와 능력을 의심치 않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에까지 올랐으니까요. 모든 국민이 그의 범법행위를 인지하고 고발을 해도 법리상 처벌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시각이었지요. 하지만 수족처럼 부렸던 가신의 입에서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고 합니다. 이익 앞에 철두철미했지만 정작 돌보고 챙겼어야 할 아랫사람에게 한 없이 야박했던 그 사람. 아무리 보아도 덕은 없어 보입니다. 그가 만약 다른 대통령만큼의 아량으로 아랫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면 지금도 건강하게 테니스를 치고, 필드에도 나갔을 것을. ‘才勝德 謂之小人’의 사례임을 후대에도 기억할 것입니다

▲ 이명박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건강 백세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의술의 발전은 눈이 부십니다. 하지만 의외의 재앙인 화를 모면할 수는 없지요. 우리 모두 덕에 관심을 갖아야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필자 주: ‘재승덕박’보다는 덕이 없다는 의미의 한국식 한자어 박덕(薄德)을 함께 사용하여 ‘재승박덕’이라는 말이 좀 더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박덕하다, 박복하다, 박명하다 등이 있지요. 미인박명이라는 말도 재승박덕과 같이 한자 성어로 보기에는 어색합니다. 아마도 일본식 한자거나 한국식 한자성어로 봐야겠지요.

꾸미는 말(형용사)은 앞에 오고, 술어는 뒤에 오는 것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 마찬가지입니다. 미인이나 미녀를 인미(人美)나 여미(女美)로 사용하면 어색합니다. 의미 전달에 전혀 이상이 없고,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미 우리글이 된 단어를 쓰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주가 승하면 덕이 박하다‘는 의미라면, 재승덕박과 재승박덕이 혼용되는 상황을 고려하여 어법에 충실해서 재승덕박을 사용했습니다.

그동안 사마천의 사기 열전을 중심으로 써왔던 ’대만이야기‘는 앞으로 사자성어를 중심으로 쓰려고 합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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