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환 칼럼] 국민교육헌장 선포 50주년! 한국 교육은 어디로 가는가

- 세월호 이후 한국교육은 변해야 한다 하성환 주주통신원l승인2018.11.19l수정2018.11.19 09:02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개발독재체제 아래 전체주의 교육사상을 교육지표로 천명한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장면(출처 : 한겨레신문사)

올해로 국민교육헌장 선포 50주년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개발독재체제 아래 1968년 전체주의 교육을 어린 학생들에게 강제한 내용이다. 그 당시 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기억할 것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도록 학교에선 암기를 강요했고 암기한 내용을 검사까지 했다. 그리고 교과서 첫 장을 펴면 태극기가 나오고 그 뒷면에 국민교육헌장이 예외 없이 실렸던 게 당시 풍경이다.

그러나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90년대엔 개인주의 문화가 우리의 의식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소리 소문 없이 교과서에서 국민교육헌장이 사라졌다. 공문 한 장 내려오지 않은 상태에서 조용히 학교교과서에서 사라진 것이다. 1994년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국민교육헌장이 정부기념일에서 전격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된 지 50년이 되는 오늘날 한국사회 학교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국민교육헌장이 실질적으로 폐기된 1994년부터 24년이 지나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 교육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학교사회는 여전히 수직적인 위계질서 속에서 지시와 통제 중심으로 돌아간다. 학교 바깥의 풍경은 개인주의 문화가 풍미하고 사회 각 방면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서로를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학교 내면의 풍경은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질 못한다. 학교장과 교사 사이 권위주의적인 교직문화가 여전히 존재하고 교사-학생 간 위아래 경직된 관계가 엄존한다. 실제로 학교구성원들 간 평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게 요원한 현실이다. 학교문제에 대해 교장, 교사, 학생 모두 1인 1표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수십 년 전 섬머힐 학교에서 성공한 동등한 인격적 관계를 한국사회에선 뿌리내리기 어렵다. 그렇게 된 연유에는 거대한 규모로 학생들을 수용하는 탁아소 개념으로 그리고 통제 중심으로 여전히 학교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과대학교, 과밀학급 문제는 도시학교의 경우 아직도 적잖이 목격된다. 교사와 학생, 학교장과 교사는 민주시민으로서 서로 동등한 시선으로 마주하는 게 교육적으로 옳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현실은 하드웨어 측면에서 통제 중심의 거대 수용소 개념으로 왜곡된 형상이다. 그런가하면 교육과정이라는 소프트웨어로 들어갔을 때 학교교육은 더욱 심각하게 굴절돼 있다. 학교교육과정 전체가 내신과 수능시험이라는 상대평가에 예속된 채 입시경쟁교육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 속에서 교사와 학생은 고통이 일상화되고 행복은 저만큼 떨어져 가물거린다. OECD 국가 가운데 청소년 행복지수가 부끄럽게도 꼴찌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지 오래이다. 지시와 통제가 일상화되고 공문과 잡무가 범람하는 학교사회에서 아이들의 꿈을 발견해 내고 그 재능을 길러내는 일 또한 요원한 일이다. 더구나 비판적 지성을 갖춘 건강한 시민성(citizenship)을 획득하기란 현존 학교사회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전국적으로 초중고 11,000개가 넘는 학교에서 수많은 교사들이 매일같이 교육을 담당함에도 학교사회 민주주의는 큰 진전이 없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지 않은 학교사회에서 민주시민을 길러내기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권위주의로 팽배한 학교문화와 입시경쟁으로 닫힌 교육환경 속에서는 건강한 민주시민을 길러내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학교교육이 아이들 인격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가를 굳이 측정하지 않아도 교사들은 경험칙으로 알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이 실질적으로 폐기된 지 24년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학교사회는 국민교육헌장의 낡은 틀 속에 갇혀 있다. 질서와 규칙에 대한 맹목적 순종을 강요한다. 아이들 스스로의 활동을 교육적으로 권장하기보다 앞서서 이끌어 가려 한다. 지식 중심 교육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고 그마저도 입시 중심으로 단편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할 뿐이다. 브라질 민중교육을 실천한 프레이리의 표현대로 아이들은 거대한 '지식저장고'로 규정될 뿐이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받고 사회적으로 승인받는다.

1968년 제정돼 학생들에게 강제한 국민교육헌장은 전체주의 사상과 맹목적인 가치관으로 덧칠돼 있다. 아련하지만 찬찬히 기억을 되살려 보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단의 소명을 위해 개인은 도구로 타고난 것뿐이다. 개인의 인간다운 삶과 행복 추구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철저히 개인을 배반한 교육이자 개인, 개성, 주체성 그리고, 다양성과 창의성을 외면한 교육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은 인간의 주체성을 말살한 전체주의 교육지표로 일관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추구가 없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공동선에 대한 정의감, 즉 공적 분노가 존재하지 않는다.

화려한 수사만 존재할 뿐 내용 전체를 일관하는 것은 개인을 희생한  집단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이다. 여기서 집단은 독재자 자신을 위장 은폐한 지배자의 언어이다. 한 마디로 신민(臣民)형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의 지향점이자 목표였다. 정치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었고 국민교육헌장이 전체 초중고 교과서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그럼에도 24년이 흐른 지금 학교사회는 여전히 국민교육헌장의 낡은 틀 속에 갇혀 제 갈 길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거기엔 관성적으로 교육을 통제해 온 교육 관료와 국가주의 교육을 관철시켜 왔던 관행인 권위주의 교육행정이 여전히 학교현장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구호일 뿐 학교사회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교직원회의조차 관행적으로 지시와 협조사항을 전달할 뿐 교사의 의견이 생성되고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자리가 아니다. 학생회조차 수동적이고 자주성이 결핍돼 있는 게 전국적 현상이다.

▲ 2016년 12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시위 장면(출처 : 하성환)

그러나 이젠 바꿔야 한다. 촛불시민혁명 이후 학교사회 문화 전반에 민주주의가 스며들어야 한다. 광장민주주의가 학교민주주의로 옮겨 붙어 점화돼야 한다. 학생들 일상생활 전반이 민주주의로 점철돼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의식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민주주의를 숨 쉬고 민주주의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지 않고선 학교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없고 민주시민교육을 논할 수도 없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권위주의적인 교육계 문화와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빚어낸 참극이다. 3층 일반 승객의 생존율이 70%가 넘었다. 반면에 오히려 더 안전한 4층 객실에 머물던 단원고 학생들의 생존율은 21%에 그쳤다. 이는 학생들의 자주성을 고양시키는 교육현실에선 나올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이다. '선생님들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아이들을 향해 선실 바깥으로 나가라고 외쳤던들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까?' 희생된 학생의 부모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을 담담히 그려낸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소개돼 나오는 어느 아버지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이다. 어떤 의미에선 세월호 참사는 질서에 대한 맹목적 순종, 순치된 인간형을 양산해 온 국민교육헌장이 낳은 비극인지도 모른다. 자주적인 판단과 지성의 힘으로 교육 받은 아이들이라면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교육헌장이 틀 지운 강고한 교육프레임 속에선 주체적인 학생보다 순종적인 학생을 발견하기 쉽다.

물론 희생된 분들 가운데 교사들의 희생이 가장 크고 무겁다. 무려 생존율이 14%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가장 희생이 컸다. 그리고 거센 파도가 선실로 들이쳐 오는 마지막 순간에도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고귀한 분들이 모두 선생님들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이들을 향해 선실 밖으로 빠져나가라고 온 힘을 다해 절규했던 분들이다. 실제로 바닷물이 들이쳤을 때 여럿 아이들을 선실 밖으로 구해 내고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못했던 분들이 바로 교사들이다. 남윤철 선생님, 이해봉 선생님, 고창석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박육근 선생님, 김응현 선생님들이 그분들이다.

심지어 5층 객실에서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다급히 4층으로 내려갔고 다시 3층 식당으로 내려갔던 분들도 교사들이다. 유니나 선생님, 전수영 선생님, 최혜정 선생님, 김초원 선생님, 이지혜 선생님들이 바로 그분들이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구명조끼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우리가 단원고 순직교사들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고 그분들의 숭고한 제자 사랑 앞에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더구나 교감 선생님은 너무나 참담한 현실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가!

▲ 목포 신항으로 옮겨진 세월호 선체. 미수습자 수습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5명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 중에 단원고 학생부장 고 양승진 선생님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출처 : 한겨레 신문사)

그럼에도 단원고 순직교사들의 거룩한 희생과는 별도로 한국교육의 근본 틀은 시급히 변화해야 한다. 수십 년이 넘도록 순치된 인간형을 양산해 온 전체주의 교육헌장인 국민교육헌장의 강고한 교육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학생 스스로 자존감을 안고 살아가도록 정교하게 학교교육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 자기 존중감을 지닌 학생은 타인을 존중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안다. 나아가 자율적인 사고와 비판적 지성을 간직한 자주적인 인간형으로 성장할 수 있다. 교육기본법 제2조에 나온 교육의 목표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자주적인 생활능력을 기르고 민주시민으로서 자질을 함양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민주시민으로서 민주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교육정책은 학생들의 자주성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크다. 핀란드는 국가 차원에서 그리고 지자체 차원에서 청소년들의 의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청소년의회, 청소년위원회 활동은 핀란드 학생들로 하여금 직접 정치현실에 뛰어들게 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현실이 변화하는 것을 체험하게 한다. 즉 학생 자신이 참여하는 만큼 자신을 둘러싼 사회현실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다. 그것이 핀란드 청소년위원회와 청소년의회 활동이다. 오늘날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의 총선투표율이 80% 안팎에서 높게 형성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학교교육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쟁점이 되는 논쟁적 현안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독일 정치교육에서 배우는 소중한 교훈이다. 독일은 1976년 좌우 학자들이 모여 논쟁적인 사안을 학교현장에서 교육자료로 다룰 수 있도록 합의를 보았다. 바로 「보이텔스바흐 합의」이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독일 정치교육의 규준이 된 협약이자 민주시민교육의 모델이 된 합의사항이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3원칙이 학교교육에서 지켜진다면 한국의 학교교육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단된 현실에서 더더욱 「보이텔스바흐 합의」 3원칙은 절실히 요청되고 긴급히 필요하다.

오랫동안 한국사회는 이념적 편향을 강요받았고 그렇게 편향된 이념교육을 시민교육으로 강제해 왔다. 하물며 진실에 입각한 정치사회적 논쟁 현안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쉽게 학교당국이나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왔다. 오늘날 계기교육을 학교차원에서 소극적으로 시행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주요한 배경이기도 하다. 하물며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왔던 게 한국사회 현실이었다. 교사 스스로 용기를 내어도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결국 위축된 속에서 민주시민교육은 제대로 수행되질 못한다.

그러나 이젠 변화해야 한다. 아이들의 지성을 기르고 비판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 교육자료들을 적극적으로 학교교실로 끌어와야 한다. 수업자료가 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현안들을 날 것 그대로 끌어들여 아이들로 하여금 토론하게 하고 생각을 넓혀 가도록 교육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토론과 독서를 통해 사고의 깊이가 더해지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정치사회적 현안만큼 자발성을 끌어 내오기 좋은 수업은 없다.

▲ 2018년 10월 27일 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된 민주시민교육 학술대회(출처 : 하성환)

다만 교사는 「보이텔스바흐 합의」 3원칙을 명심하고 지켜야 한다. 아이들에게 특정 가치관을 주입하거나 교화하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즉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생각주머니를 만들어가도록 논쟁적 수업을 도울 뿐 생각주머니에 특정 색깔을 칠하려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스스로 논쟁현안에서 이해당사자의 지향성을 인지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도록 지원을 하되 가치판단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3원칙은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독일 정치교육, 나아가 시민교육을 정착시키는 데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분단과 전쟁이라는 적대적 관계가 70년 넘게 지속된 우리의 현실에서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시급하고 또한 절실하다.

국민교육헌장 선포 50주년 되는 올해, 학교 교육은 낡은 틀을 걷어내고 민주시민교육을 뿌리내려야 한다. 학교사회 전반에 민주주의가 스며들도록 학교구성원 모두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주주통신원  hsh703@cho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하성환 주주통신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고은광순 2018-11-20 04:59:57

    좋은 글 감사.
    북의 사회주의 교육현장은 남과 같은 경쟁체제는 아닐 것. 분단해소, 군사주의 종식, 남북교류로 남의 천박한 자본주의 경쟁교육이 크게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신고 | 삭제

    • 유원진 2018-11-19 13:15:35

      잘 읽었습니다. 보이텔스바흐 3원칙 내용이 무엇인지도 쓰셨으면 좋았을걸 그랬습니다. 교육사안 문외한이라 . . .신고 | 삭제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참여소통 데스크  |  전화 : 02)710-0093  |  등록일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23  |  발행인 : 양상우  |  편집인 : 김광호  |  에디터 : 이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광호
      편집위원 : 김경애, 김미경, 박효삼, 서기철, 심창식, 안지애, 양성숙, 정혁준, 김국화  |  객원편집위원 : 김동호, 김태평, 김혜성,허익배
      Copyright © 2018 한겨레: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