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 된 우당 이회영선생86주기 추모식을 보며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6주기 추모식 및 장학금 수여식

때 : 2018.11.17.11:00~12:30
곳 : 서울 중구 회현동 남대문 시장 내 상동교회
무엇 : 우당 이회영 선생 86주 추도식 및 우당장학금 전달식


대한민국을 지켜온 애국지사들

우리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의병들은 사실상 나라의 녹을 먹고 있던 벼슬아치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농민, 서민 심지어 머슴살이를 하던 <안담살장군> 같은 분을 비롯하여 양반집의 노비들까지도 나섰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애국지사들은 정말 순수한 시민들이었지 벼슬아치나 요즘 국가공무원 같은 신분의 높은 분들은 아니었으니, 다시 말해서 소위 말하여 노블레스들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니 노블레스들은 일본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일본의 손아귀에 놀아나기도 하고, 일본에 빌붙어서 남작, 백작의 벼슬을 받아 호의호식을 즐기면서 나라를 배신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블레스들에게 귀감이 될 훌륭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두 집안이 가장 모범적인 집안으로 존경을 받고 있으니, 그 첫 번째가 오늘 86주기를 맞아서 추도식을 가지는 우당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6형제분들이고, 순서를 매길 수는 없겠지만 또 한 분이 임청각의 주인이시던 석주 이상룡 선생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분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만주 벌판에서 우리 독립군들을 길러내어서 대한민국의 국군의 시초이자 독립군의 기틀을 마련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전력을 다한 분들이고, 자신은 물론 전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서 바쳤던 분들이기에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 할 것이다.

오늘은 바로 가장 우러러 받들어야 할 우당 이회영 선생의 86주기 추도식을 가지는 날이었다. 추도식이 열리는 남대문 상동교회는 우당 선생이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기시기 이전까지 다니시면서 권사로 활동을 하시던 교회이자, 3,1혁명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네 분이나 이 교회의 신도들이 포함이 될 정도로 만세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민족운동의 성지인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곳에서 86주년 추도식을 모시게 된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비록 넓고 환한 광장이 아니고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은 아닐지라도 그분의 넋이 깃들어 있고, 당신이 활동하던 무대인 이곳이기에 더 뜻이 깊다고 할 것이다.

제1부 추모 예식은 상동교회의 김성준 목사님의 주도로 진행됐다. 추모기도와 성경봉독, 설교, 찬송, 묵도 등 교회의 추도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2부 추모식과 장학금 전달식은 KBS의 대표 아나운서 김동건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아주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윤경로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상임대표님의 기념사가 있었다.

윤경로 상임대표는 “이 상동교회와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113년 전인 1905년 상동청년학원<사실은 애국 비밀결사>의 산실이자 신민회가 창립된 곳. 나중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무장 독립군 양성하는 독립군 기지 건설을 논의하고 실천에 옮긴 곳”이라고 확인해주었다.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장 모범적인 가문이다.”
“우당 선생은 1910년 8월에 직접 서간도 지역을 돌아보고 돌아와서 가족회의를 열어서 가문의 집단 망명 계획을 논의했다.“
“교목세신<喬木世臣(교목세신 : 집안 대대로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으로서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지언정, 집안이 왜놈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목숨을 구차하게 도모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6형제는 명동 YWCA 일대와 명동성당 일부가 그 형제분의 소유일 정도로 대단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재산을 처분하여 가지고 간 재산 40만 원의 거치는 이미 50년 전에 한국은행의 계산으로 무려 약 600억 원이나 되는 큰돈을 가지고 망명의 길에 올랐다. 이렇게 6형제가 팔고 간 그 땅은 현재의 공시지가로만 계산하여도 약 2조 원에 달하는 큰 재산이었다.

이런 6형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칭송은 “동서 역사상에 국가가 망해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 결의는 참으로 백세 청풍이 될 것이다. 우리 동포의 가장 모범이 되리라.”라고 하셨다.

우당 선생은 1932년 11월 8일 중국과 항일 공동전선 연락 기지와 지하 조직망을 구축하기 위해 몸소 나서겠다며 65세의 노령으로 상해를 출발하였다가 4층 제일 밑창 선실에 숨어가시던 우당 선생은 대련 수상경찰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뤼순감옥에 이송되어 11월 17일 순국하시었다. 따님이 확인하자 곧장 화장을 하여 유골분을 인계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2000년 1월 12일에는 중국정부에서 <혁명열사증서>를 수여받았다.

이어서 오진영<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광복회 회장(부회장이 대독)>, 서양호 <중구청장>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추모 편지 낭독 차상현<배재대학생>에 이어 추모가<한예총UK중창단>의 독립군가, 신흥무관학교 교가 등의 중창이 있은 다음에 장학금 전달이 있었다. 장학금은 보훈처 추천 10명, 광복회 추천 10명, 특별장학생 4명과 학술상의 우당, 신민회 연구교수에게 수여하는 장려금까지 25명에게(1인당 300만원) 전달되었다.

행사가 끝나고 식사접대까지 해주어서 행사가 적잖은 비용이 부담 되었을 것이라 싶으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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