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때 독일의 패전 처리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던 포츠담 선언의 장소

▲ 궁이라 하기에는 초라한 모습이다. 지금은 회담이 열렸던 장소 등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나머지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중,고등학교 때 세계사, 국민윤리 등의 시간에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패망, 남북 분단 등의 현대사와 반공 관련 내용을 공부할 때 '포츠담 선언', '얄타회담', '카이로 선언' 등은 그 지리적 위치가 어디인지도 잘 모르면서 많이 들었던 지명들이다.

2014년 8월 1일 전교조 동유럽 연수팀인 '베캄원정대' 1기 팀은 베를린 교외에 있는 포츠담의 세실리엔궁을 찾았다. 포츠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내용의 연합국 대표들의 모여 회담을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 궁전에서 승전국 정상들이 모여 회담을 함으로써 갖는 상징성이 큰 곳으로 지금도 가끔 이런 커다란 국제적인 회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 보는 바와 같이 세실리에 궁의 정원에는 온갖 꽃들과 사무들이 잘 손질되어 있었다.
▲ 궁이라 하기에는 초라한 모습이다. 지금은 회담이 열렸던 장소 등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나머지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포츠담은 베를린 남서쪽에 맞닿아 있는 도시로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주의 주도이다. 동서독으로 갈라져 있을 때는 동독에 속해 있었다. 베를린 남서쪽 끝단에서 하벨(Havel)강을 넘어서는 글리니케(Glienicke)철교를 지나면 바로 포츠담으로 이어진다. 포츠담 시내에서 표지판을 보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영국식 저택풍의 세실리엔 궁이 나온다. 이 궁은 응접실 등 공동 공간 외에 방이 150여개나 된다고 한다.

세실리엔 궁전은 1913/1917년에 빌헬름 황제 2세가 그의 첫째아들(빌헬름)과 부인 세실리아를 위해 지었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정원과 호수가 아주 낭만적이다.' 빌헬름 왕자는 1차대전에서 많은 전쟁을 겪었고 1926년에 다시 세실리엔 궁전에 정착하지만  독일의  바이마르 정부가 무너지고 나치 정부가 들어서면에 그는 정치에서 물러나 1945년에 세시리엔호프를 떠나 괴핑엔(Göppingen) 호엔절런 성에서 1951년에 세상을 떠났다.

▲ 세실리엔 궁은 단층과 2층 규모의 저택이었다.

포츠담 지역은 넓은 호수로 둘러싸고 있는 지역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상수시 궁궐(Schloss Sanssouci)이 있었던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베를린 외곽에 있는 작은 도시로 세실리엔궁을 찾아가는 길은 왕복 4차선도로를 지나 2차선의 한적한 도로로 주변은 크고 작은 호수들이 드리워 있고 야트막한 산과 크고 작은 숲으로 뒤덮인 전형적인 전원도시였다.

베를린은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변변한 건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 영, 소 삼국 정상이 회담을 할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곳 세실리엔궁이 비교적 온전하게 잘 보전이 되어, 이곳을 회담장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이곳 세실리엔궁에는 당시 회담 때 사용했던 탁자, 의자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당시 급하게 소련에서 가져와서 회담장을 꾸몄다고 한다. 소련은 당시 회담을 자신들이 주도하면서 급하게 붉은 별을 상징하는 제라늄으로 정원을 꾸몄다고 한다. 그 붉은 별 모양을 한 제랴늄 화단이 지금도 그렇게 보전되고 있다고 한다.

포츠담회담에 참석한 3국 수뇌는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과 애틀리,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그리고 각국의 외무장관과 수행원들이 동행했다. 이들은 2주일여를 이곳에 머물면서 전후 질서를 논의했다. 그전에 열렸던 회담보다 기간이 길었고 그만큼 난항을 겪었음을 뜻한다.

▲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장소로서 탁자라든가 의자 등 원형 그대로 보전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4월 12일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어 회담에 참석했다. 그는 7월 7일 선박편으로 미국을 떠나 15일 벨기에 앤트워프에 도착했는데 열흘간의 여정을 거쳐 오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처칠수상이 참석했는데 애틀리(C. Attlee) 야당 당수도 함께 왔다. 7월 3일에 영국에서 총선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회담 중간인 26일에나 발표되게 되어 있었다. 국가에 중대사를 다루는 일에 자국 정치의 지속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영국측의 주장으로 같이 참석한 것이다. 애틀리는 옵서버 자격으로 회담에 참석했고 총선결과를 보기 위해 같이 귀국했다가 총선에서 진 처칠은 빠지고 그가 정식 대표로 28일 속개된 회담에 참석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은 7월 26일에 나왔다.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은 8월 6일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일본은 나가사키에 9일 원폭이 떨어진 직후에야 항복 의사를 밝혔다. 스탈린은 전황이 급변하자 8월 7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소련군은 만주로 진격하고 13일에는 청진에 상륙해 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포츠담회담에서 한국 문제는 주요 의제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한국을 '적절한 절차'에 따라 독립하게 한다는 카이로회담을 재확인하는 데에 그쳤다.

▲ 세실리엔궁 앞의 넒은 정원 마당을 지나면 넓은 호소가 나온다. 호수 주변의 갈대 숲도 아름답고, 나무 숲과 함께 떠 있는 쪽배도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미·소가 회담 과정에서 밀약을 통해 38선을 남북으로 가르는 군사 점령 분할선을 정했다는 '포츠담 밀약설'이 최근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적절한 선에서 소련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고 여겼다. 냉전과 한반도 분단의 씨앗은 포츠담에서 이미 뿌려지고 있었다.

▲ 한국의 곰딸기와 비슷한 이 딸기를 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많이 만났다. 많이 따 먹기도 하였다. 이 딸기가 세릴리엔 궁 앞의 호숫가에서도 야생하고 있었다.

이런 세세한 포츠담 회담의 내막을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확인하면서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수박 겉핥기식 공부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역사적 사실들도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노력은 늘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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