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4월부터 주택금융공사에서 주택연금 상담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그동안 많은 고객들과 만나고 상담을 진행하였는데 사람들마다 다른 성격과 품위의 다양한 면면을 접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반추하고 인간의 범주에서 각각의 품계가 층층이 존재하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다

오늘은 82세의 노모를 딸 두 분이 모시고 왔는데 상담 중에 50대로 보이는 큰딸이 "어머니가 1~2년 밖에 못살 것 같아 잠깐 은행대출을 받아쓰려다가 주택연금을 알아보려고 왔어요~" 하고 말하는데 나는 놀라 흠칫 어머니를 바라보았더니 어머니의 얼굴은 흙빛으로 굳어서 힘들고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요즘 백세시대 인데 언제 돌아가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1~2년 후에 대출금 떨어지고 어머님 생존하시면 어떻게 하실려고요?" 하면서 종신토록 연금을 보장하는 주택연금을 권유하였더니 큰딸은 "어머니가 고관절이 아파서 수술을 해야 해요" 하고 대답하는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실 것 같다는 걱정 어린 얼굴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다

"조선시대 세종임금 때 90세 드신 정승이 조카들로 부터 새해 세배를 받았는데 첫 번째 조카가 '백부님 백세까지 장수하세요' 하고 세배를 하니 본체만체 하고 내보내더니 두 번째 조카가 '백부님 이백세까지 만수무강 하세요' 하고 세배를 하니까 술상을 차려오라 하면서 손수 술을 따라 조카를 대접해 주었답니다"

내가 이야기를 끝내니 막내딸이 어머니 팔을 붙잡아 흔들면서 "엄마, 걱정 하지 마. 엄마는 오래 살 거야. 수술도 잘되고 오래 살 거니까 걱정 하지 마" 하고 달래고 있었다.

상담을 끝내고 딸들은 더 생각해 보고 온다며 어머니를 부축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어머니 면전에서 무신경 하게 말하는 딸들을 보면서 또 다른 일화가 생각났다.

세종임금 시절 유명한 황희 정승이 시골길을 가다가 황소와 흑우를 부리며 밭을 가는 농부를 보았는데 "황소와 흑우 중 어느 소가 더 일을 잘 합니까?" 하고 황희 정승이 큰 소리로 물어보니 농부가 밭을 갈다말고 길에 내려와서 황희 정승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황희 정승은 귓속말을 듣고 "그것을 꼭 귓속말로 할 것은 무엇이오?" 하고 반문하니 농부는 또 조용히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도 누가 일 못한다고 큰 소리로 말하면 기분이 좋겠소?" 하고 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천하의 황희 정승은 부끄러워 농부에게 큰 절을 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며 인생 공부를 통해 성찰하면서 성숙해지고 사려 깊어진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상갓집에 가서 "고인께서 장수하셨네요" 하고 철없는 인사를 곧잘 하였지만 고인이 들으면 얼마나 섭섭했을까 반성하면서 이제는 그런 말을 입에서 싹 떼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바위틈 콘크리트 틈새에서 질기게 자라나는 잡초를 보면서 생명의 강인함과 생존력에 우리는 경외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런 생명의 집념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우리는 발밑에 자라는 잡풀과 미물이라도 피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영원을 희구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러함에도 생명은 죽는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어쩔 수 없이 죽음 앞에 쓰러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겸손해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품위를 지키려는 고상한 인격을 발전시켜 왔다

장례식장의 하얀 소복처럼 내리는 눈발위에 고운 단풍이 내려앉는다.

길든 짧든 한 생을 살다가는 고귀한 모든 생명에게 경외의 예절을 올린다.

 

▲ [탁기형의 생각 있는 풍경] 가을의 끝에서 /찬란하던 단풍이 지고 나니 텅 빈 나뭇가지가 눈 내린 듯 하얗게 빛나고, 가는 계절이 아쉬워 가지에 남은 잎들은 미련인 듯 애잔하다. 시절이 아쉬운 것이 가을만은 아니겠으나 한 해의 마지막이 가깝다는 마음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더 스산하다. 이렇게 또 한 번의 가을이 깊다.(사진 글 출처 : 한겨레신문 / https://news.v.daum.net/v/20171110180604489)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조형식 주주통신원  july2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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