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頭是岸(회두시안)의 직역은 ‘머리를 돌리니 바로 언덕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원래 원나라 때 불교소설인 ‘도유취(度柳翠)’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월명(月明) 나한이 기녀 유취(柳翠)를 불도로 이끄는 내용입니다.

‘속세의 인간들은 서로가 길다 짧다 다투고, 너 죽고 나 살자 싸움이 그치지 않는, 끝이 없는 고해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라. 하지만 지은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면 바로 피안이다.’라는 의미의 '고해무변(苦海無邊), 회두시안(回頭是岸)'이라는 글에서 따온 사자성어입니다.

▲ 대부분 아침 6시 전에 문을 여는 만두집. 이른 아침부터 힘들 텐데 밝은 표정으로 사진 요청에도 흔쾌히 응한다. 대만사람들 거의 다 이렇다.

젊은 날 난생 처음 말도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젊은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 대로변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살았지요. 대만은 난방 개념이 없습니다. 꽤 잘 지은 최신 집들도 이중 유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중충한 겨울 우기에는 집안이 더 춥지요. 대로변의 시도 때도 없는 자동차 소리에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기억으로 지금도 대로변 집은 싫어합니다. 집을 살 때 기피 1호로 나름 세운 원칙이지요.

학교에도 가지 않는 주말에는 온종일 말할 상대도 없으니 매일매일 원치 않는 면벽수행에 묵언수행을 겸해야 했습니다. 노래라도 잘했으면 혹시 모를 어느 집 처자의 심금을 울리게 한 곡조 뽑았을 것을,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한 명씩 앞에 나가 실기시험 볼 때, 야멸찼던 선생님 한 말씀 “너 책 읽냐?”

그 이후로 근거는 미약하나 음주와 가무를 멀리하게 된 원인으로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별로 재미없는 삶일망정,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도덕군자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하며 숙명과 시대를 한탄하기도 하고요.

하루하루가 참으로 길었습니다. 끝이 없는 바다 한 가운데 이리저리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처럼 기약 없는 허우적거림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해(苦海)는 무변(無邊)이어라!

엎친 데 덮친 격인지 입주한 지 얼마 안 되어 맞벌이 주인집 여자가 교통사고로 입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한 2주 정도 혼자 지내야 했지요. 매일 인근 식당으로 가서 만두와 따끈한 떠우장(두유)으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을 먹고 집에 와서 주머니를 뒤지는데 열쇠가 없는 겁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빠오즈(包子,포자). 만터우(饅頭,만두). 아침 한 끼 든든한 야채만두와 토란 고구마 말이. 커피 떠우장(두유) 나이차. 평균 가격이 14위엔. 개당 원화로 약 500원. 아침 한 끼 1,500원.

우두커니 대답 없는 자물쇠 구멍만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야 했지요. 오라는 곳은커녕 갈 곳도 없었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따뜻한 남쪽나라 겨울이 얼마나 고맙던지. 주변을 배회하다 가까운 곳에 공원이 있음도 처음 알았습니다. 한 30분 지났겠지 하고 시계를 보면 겨우 5분 10분 지나더군요.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서, 혹시 간병하는 남편이 집에 들르지는 않을까 기대를 하고 집에 와서 문을 두드려보지만 허망함만 안고 또다시 공원으로 가기를 수차례.

점심때가 다가오니 배가 먼저 알아차립니다. 없는 살림에도 10위엔(370원)짜리 동전 한 닢이 바지 주머니에 남아있었고요. 공원 리어카에서 몸에 있는 전 재산 동전 하나를 내미니 바나나를 물경 세 개나 줍니다.

10위엔 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대만은 참으로 아름다운(美麗, 포모사) 나라입니다. 오후 2~3시경인가 이층 대문에서 넋을 잃고 있는 나를 4층에 사는 할아버지가 올라오다가 보고 말을 겁니다. 마침 할아버지와 나의 영어 수준이 대화하기에 서로 감탄할 만큼 이해의 폭이 맞춤이었습니다.

미국에 살다가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할아버지가 나보고 기다리라며 자기가 열쇠를 가지고 와서 트라이해보자고 합니다. 자기 집 열쇠가 맞으면 그게 자물쇠냐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맙소사! 20센티는 족히 넘는 나무토막에 열쇠가 주렁주렁 수십 개 매달린 꾸러미를 들고 내려왔습니다. 두 꾸러미나! 그리고는 몸소 하나하나 열쇠를 맞추어보기 시작했습니다. 10개는 넘고, 20개는 안 되어 드디어 '찰칵'하고 문이 열렸습니다.

“문지방 하나가 고해와 피안의 경계로구나!” 내가 만약 원효대사나 의상대사와 동급이었으면 고승전 앞머리에 실릴 명언이고 사자후며 화두의 한 자리를 차지했으련만!

이런 할아버지가 대만에서 쉽게 만나는 사람이고, 3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웃에서 만나는 사람입니다.

원나라 소설에서 처음 쓰기 시작한 고해무변, 회두시안(苦海無邊, 回頭是岸)은 나중에 무협소설의 대가, 기독교의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팔렸다는 소설의 작가 김용이 고승의 입을 빌려 자주 사용합니다. 김용은 같은 뜻이라도 좀 더 시각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게 말을 바꾸었습니다. 사변고해(四邊苦海), 회두시안(回頭是岸).

다른 유학생들과는 달리 한국에서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대만에 갔기에, 대학교 1학년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중어중문과나, 역사학과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대만 사범대 어학원(정확한 이름은 師範大 國語中心)에 다니고 있었지만 석사 박사에 대한 꿈은 없었습니다. 그냥 중국어를 해보고 싶었지요.

희망도 길도 없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고해라 할지라도 하루하루 외우고 배운 중국어 한마디가 그날 저녁 티브이를 보다가 알아듣게 되면 그 또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그 자리가 바로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면서 저를 위로했습니다.

“회두시안(回頭是岸)!”

▲ 길거리에 이런 만두집이 아주 많다. 간판에 包子(포자)는 ‘빠오즈’라고 읽고 속에 고기나 야채소를 넣어 만든 왕만두. 饅頭(만두)는 ‘만터우’라 읽고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찐 빵이다.
▲ 대만은 대부분 부부가 맞벌이를 하므로 아침은 통상 이런 곳에서 사서 들고 사무실로 가거나 학생들은 교실로 가서 먹는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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