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종각역에 위치한 <문화공간온>에서는 평화연방시민회의가 주최한 2018년 워크숍 "연방제 통일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열렸다. 이재봉 교수를 초빙해 한성 상임공동대표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 한성 상임공동대표가 이재봉 교수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연방제에 관한 이재봉 교수를 능가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서 단연코 없다고 말하였다.

주최한 여인철 평화연방시민회의 상임공동대표는 "<연방>을 목표로 새로운 발걸음을 뗀 시점에 연방제에 대한 인식 제고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과제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워크숍을 갖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고 말했다.

연사로 나선 이재봉 교수는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사회과학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이 교수는 강연에 앞서 기자에게 말했다.

▲ 여인철 평화연방시민회의 상임공동대표가 어렵게 이재봉 교수를 모셨다면서 큰 박수를 보냈다. '문화공간온'은 이재봉교수의 강연으로 수준 높은 문화공간이 되는 것이 분명한 듯 했다.

"국가연합은 분단을 영구화할 수 있고, 연방제는 북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남한과 북한이 서로 자신의 체제로 통일하기를 바라겠지만 어느 쪽이 양보하겠는가. 남이든 북이든 자신의 체제를 포기하고 상대의 체제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어느 한쪽이 스스로 붕괴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전쟁에 의해 양쪽이 불바다 되고 잿더미 되어 통일된다면 재앙이다.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며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길이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말고 있겠는가.....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수구정당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언론은 미국의 주류 정치세력과 군산복합체 못지않게 종전선언을 반대한다. 종전이나 평화협정이 한미동맹 약화 및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질까봐 우려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역할과 필요성을 짚어봐야 한다.

첫째, 북한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필요 없다. 9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공동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남과 북은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대치 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을 한반도 전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전쟁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관계 해소로 이어나가기로 하였다.” “한반도를 항구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남북 사이에 더 이상 전쟁을 없을 것이라고 한 터에 북한을 겨냥한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이 왜 필요하겠는가?

둘째, 중국을 겨냥하는 것이라도 바람직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하다. 남한과 중국의 경제적 관계는 1992년 국교정상화 이후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한중 교역량은 2003년부터 한일의 교역량을 넘어섰고, 2004년부터는 한미 교역량을 초과했다. 2009년부터는 한미 및 한일 교역량을 합친 것보다 많아졌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역의 내용이다. 일본에겐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단 한 해도 흑자를 기록해본 적이 없는 가운데 2017년 283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 미국에겐 1982년부터 흑자를 기록하면서 2017년 179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중국에겐 수교 다음해인 1993년부터 흑자를 기록해온 가운데 2017년 443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 세계에서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남한의 전체 교역량 가운데 약 1/4을 중국이 차지하고, 전체 무역흑자 가운데 거의 절반을 중국에서 거두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을 겨냥해 남한이 미국과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할까?  게다가 미국과 중국은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는 군사정책을 전개하고 중국은 미국의 접근을 거부하는 군사정책으로 맞서며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만에 하나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의 제1 폭격 지역과 대상은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평택 주한미군 기지 아니겠는가. 주한미군 때문에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로 남한의 안보가 불안해질 것을 우려한다면 미국과 중국이 포함되는 동북아시아나 동아시아 공동체를 추진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들이 보장하는 한반도 중립화를 구상해볼 수도 있다. 한반도 중립화는 미국이 과거 주한미군 철수를 고려하면서 구상하기도 했고, 북한이 지금까지 연방제 통일방안에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 연방제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설명하는 이재봉 교수이다. 이교수는 <이재봉의 법정증언>이라는 저서에서 친북과 종북을 가르는 법정에서 역사와 평화를 증언하고 있다.

이 교수는 법정에서 증언하면서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에 관해 얘기할 때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가장 큰 쾌감과 보람을 느낀다. 남한에서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면 '종북좌파 1등급'으로 매도당하며 '이적 행위'로 처벌받기 쉬운데, 판검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가장 많이 걸려드는 '3대 이적행위'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것 같다.

남한의 법에 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면 '반정부', 미국의 군대에 관해 부정적으로 외치면 '반미', 북한의 통일 방안에 관해 긍정적으로 얘기하면 '친북' 등, 모두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거 '한총련'이나 '범민련' 등의 통일운동단체들이 '불법 단체'나 '이적 단체'로 판정받은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연방제 통일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방제통일에 관해 언제 어디서든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선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할 텐데, 이보다 더 바람직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안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정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상대를 고려해야 하는 통일 방안은 적어도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바람직해야 한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람직하지만 이루기 어려운 방안은 환상이나 공상에 머무르기 쉽고, 실현하기 쉽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방안은 최악으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통일해야 한다는 남한과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 불패"라며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북한이 협상을 통해 체제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65년 이상 서로 다른 사상과 체제를 지켜온 남한과 북한 가운데 어느 쪽이 자신의 사상과 체제를 스스로 양보하겠는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의 통일은 남쪽엔 바람직할지라도 북쪽은 흡수통일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사회주의로의 통일은 북쪽엔 바람직할지라도 남쪽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체제 통일이 평화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북한의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터에, 실현 가능성만 놓고 본다면 전쟁에 의한 통일보다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전쟁은 어느 쪽이 이기든 양쪽 다 불바다와 잿더미로 만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반드시 피해야 할 최악의 선택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체제가 공존하는 연방제 말고 무슨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렇게 연방제통일을 지지하고 선전하면 판검사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듯한데, 가끔 깐깐하게 반대신문에 나서는 검사를 만나기도 한다.

"물론 통일이란 '하나로 합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는 것은 완전한 통일이 아니죠. 통일할 바에야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게 평화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같이 사는 게 분단된 채 으르렁거리는 것보다 백번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중시하는 민주주의도 목표를 향한 절차이듯이, 통일도 종점을 향한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연방제도 분명히 통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특히 나라 밖으로는 국경이 낮아지는 세계화가 진행되고 안으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이 분산되는 지방화가 추진되는 21세기에, 한울타리 안에 하나의 체제와 한 사람의 대통령만 고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이유로 연방제 통일을 분명히 지지합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러나 연방제 통일보다 더 바람직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안을 내놓고 감옥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적 통일을 원한다면 연방제 통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먼저 제안했다고 해서 금기하며 반대만 하라는 것은 억지요 횡포다.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비판하면서 더 이상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통일 방안을 모색하고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몇 차례 조금씩 수정하면서 1960년부터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주장해온 연방제 통일 방안을 소개한다.

▲ 이재봉 교수는 언제인가는 연방제가 끝난 후의 통일은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로 통일이 될 것으로 보는데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자에게 답변을 하고 있다.

1. 연방제의 의미와 배경

연방제는 연방정부 또는 중앙정부와 연방을 구성하는 지방정부들 사이의 권력이 분립된 정부 형태를 가리킨다. 가장 큰 특징은 각 정부가 서로에 대해 실질적이고 독립적인 권력을 가지며 인민에게 직접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저마다 배경과 성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구상엔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 독일, 캐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호주, 멕시코, 아르헨티나, 말레이시아 등 20여 개에 이른다.

물론 이들 국가들이 연방제를 취하고 있는 배경과 북한이 연방제를 제안해온 배경은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전후해 동부 13개 주가 각각 독립성을 지니고 우호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연합의 형태를 취하다 영국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독립된 주들이 하나의 국가로 뭉칠 필요성을 느끼고 1789년부터 연방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에 반해 북한은 남한과 사상 및 체제가 달라 하나의 국가로 합치기 어렵기 때문에, 남북이 안으로는 각각 체제가 다른 지방정부를 유지하면서 밖으로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합쳐 하나의 연방국가로 만들자고 제안해왔다.

미국은 똑같은 이념과 체제를 지닌 주들이 대내적으로 각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대외적으로 하나의 강력한 국가 체제를 이루기 위해 연방제를 택하였다면, 북한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가진 남북 정부가 일시에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연방제를 취하자는 것이다.

북한이 제안해온 연방제통일 방안의 배경은 중국이 대만에 제안해온 일국양제통일 방안의 배경과 비슷하다. '일국양제'는 '일개국가 양종제도 (一個國家 兩種制度)'를 줄인 말로 하나의 국가 안에 서로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 중국은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그리고 1999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환수해, 이들 지역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해주고 있다. 나아가 대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며 통일을 이루자고 제안해왔다.

여기서 북한의 연방제와 중국의 일국양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당장 하나로 합치기 어렵기 때문에 당분간 두 체제를 공존시키자는 배경과 내용이 같다. 그러나 북한의 연방제에서는 남쪽 자본주의 지방정부와 북쪽 사회주의 지방정부가 동등한 지위로 수평적 관계를 이루지만, 중국의 일국양제에서는 본토의 중앙정부에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의 지방정부가 종속되는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는 게 다르다.

2. 연방제통일 방안의 변화와 내용

(1) 1960년의 '남북련방제' 창설 제안

김일성은 1960년 8월 15일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 처음으로 연방제통일 방안을 제안했는데, 일종의 조건부였다.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추구하되, 만약 남쪽이 "공산주의화될까 두려워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인 대책으로" 연방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방제를 통해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서로 간에 협조하면서 불신이 사라질 때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국의 완전한 평화적 통일을" 이루자고 했다. 

지금은 물론 1960년대에도 북한이 남한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는데, 김일성이 이렇게 당당하게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거듭해서 강조했던 배경이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첫째, 그때는 북한이 거의 모든 면에서 남한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김일성이 위와 같은 제안을 했던 1960년 8월은 남한에서 4월 혁명이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난 때로, 정치가 불안한 데다 경제적으로도 북한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기에 김일성은 "오늘 남조선의 민족경제를 바로 잡으며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것은 가장 긴급한 문제"라며 연방제를 통해 "남북조선의 경제 문화 교류와 호상협조를 보장함으로써 남조선의 경제적 파국을 수습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조선의 수백만 실업자들과 빌어먹는 어린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우려하며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남조선 동포들의 내일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근심한다면 그 누구도 남북 사이의 경제교류와 경제적 협조를 반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치문제를 젖혀놓고라도 먼저 남조선 동포들을 굶주림과 가난에서 구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남북 사이의 경제교류와 함께 문화교류를 널리 실시하며 인민들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부터는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서있고 특히 경제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남한이 북한에 위와 비슷한 말을 하게 되었지만, 1960년대에는 북한이 남한에 위와 같이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교류를 주장할 만큼 체제에 대한 우월감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김일성은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면 남한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더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더 앞선 북한 체제를 선호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남한에서 흔히 평가해온 대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위해 일종의 기만전술 또는 음흉한 술책으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제안했을 수도 있다. '남북련방제'의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한반도 안의 외국 군대는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해방 직후 들어왔던 소련군이 1948년까지 철수했고 한국전쟁 중에 들어왔던 중국군은 1958년까지 철수했지만, 남쪽에서는 미국군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 그래서 김일성은 "미국군대를 내쫓고 나라를 평화적으로 통일"하자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남북이 서로 병력을 크게 감축할것을 제안했다.

"남북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며 특히 남조선의 경제생활을 정상화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군대를 줄이는 것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 방대한 군대의 유지는 인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군을 남조선에서 물러가게 하고 남북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일 것을 계속 주장합니다.(중략)우리나라에서 20만 군대만 가지면 민족보위 임무는 얼마든지 담당할 수 있습니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1954년 4~6월 개최된 제네바회의에서 북한 대표가 "남북 양쪽의 군대 수효를 축소시키되 각측 군대의 수효가 10만 명을 넘지 않게 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 무렵엔 북한이 남한보다 정치 경제 분야에서 앞섰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강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남북 양쪽이 병력을 감축하면 우세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공산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2) 1970년대의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

1971년 8월 김일성이 남한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 등과 아무 때나 접촉해 협상할 용의가 있다며 폭넓은 남북대화 방침을 제시함에 따라, 1971년 9월 남북 사이에 최초로 적십자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1972년 5월 박정희의 지시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남북 사이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통일과 관련된 합의를 이루어냈다. 두 달이 지난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흔히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불리는 남북 최초의 합의 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그리고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이 공동성명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남북 당국은 이를 정권 유지 및 강화에 악용함으로써 빛을 보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에 김일성은 1973년 6월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고 조국을 통일하자"는 연설에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5대 방침'을 제시하면서 1960년 8월 제안했던 '남북련방제'를 보완한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을 발표했다. 여기서 5대 방침이란 다음과 같다. ① 남북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와 긴장상태 완화. ② 남북 사이의 다양한 합작과 교류 실현. ③ 남북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 소집. ④ 고려 련방공화국의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련방제 실시. ⑤ 단일한 국호에 의한 유엔가입.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연방제 실시에 관한 김일성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오늘 나라의 통일을 앞당기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것입니다.(중략) 우리는 조성된 조건에서 대민족회의를 소집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룩한데 기초하여 북과 남에 현존하는 두 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두고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것이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로 된다고 인정합니다.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경우 련방국가의 국호는 우리나라의 판도 우에 존재하였던 통일국가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고려라는 이름을 살려 고려련방공화국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위 인용문을 통해 1960년 8월 제안한 '남북련방제' 통일 방안과 1973년 6월 내놓은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의 큰 차이점으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1960년엔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연방제를 발전시키자고 했는데, 1973년엔 "대민족회의를 소집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룩"하여 연방제를 실시하자고 했다. 당국자들만 참여하는 폐쇄적이고 협소한 기구보다는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이 두루 참여하는 개방적이고 광범위한 기구를 통해 통일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둘째, 연방국가의 국호를 '고려'라고 정하자는 것이다. 북한은 1973년부터 연방국가 또는 통일국가의 이름을 고려로 부르자고 제안해왔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고려는 오랫동안 존재해온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국가"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코리아'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북 어디에서든 잘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감정에도 맞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북한이 고려를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국가"라고 한 것은 남북의 역사 인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남한에서는 대개 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간주하는 반면, 북한에서는 고려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주장한다.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도 잘못이요, 그 결과 광대한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잃게 된 것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을 두고 '사대주의적 범죄행위'요 '반민족적 엄중한 죄과'로 비난한다. 신라는 당과 함께 타도됐어야 할 침략세력이요,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그에 맞서 투쟁한 주체세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참고로,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북한에서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다. 독립투사 및 역사학자로서 남한에서도 널리 존경받는 단재 신채호는 삼국통일에 대해 "반도적 통일은 결코 통일이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주도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다른 민족을 불러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것은 원수를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것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은 이러한 역사관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사대주의자"나 "반역자"로 평가하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고려를 최초의 통일국가라고 주장하며, 앞으로 연방제로 통일하면 통일국가의 이름을 북쪽이 쓰고 있는 조선이나 남쪽이 사용하는 한국이 아니라 제3의 국호인 고려로 정하자는 것이다. 남한은 궁극적으로 흡수통일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국호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지만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3) 1980년대의 '고려민주주의련방공화국 창립 방안'

김일성은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내놓았다. 1960년의 '남북련방제' 및 1973년의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을 구체적으로 보완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은 통일정책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 내용은 "북과 남에 있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북과 남이 련합하여 하나의 련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조국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방도"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남북이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면서 연방국가를 세운다. 둘째, 남북은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한다. 셋째, 남북의 대표들과 해외동포 대표들로 '최고 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서 조직한 '련방상설위원회'가 연방국가의 통일정부로서 나라와 민족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한다. 넷째, 통일국가의 국호는 '고려민주련방공화국'으로 정한다. 다섯째,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대외적으로 중립국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1980년의 통일 방안을 1960년 및 1973년의 통일 방안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1980년의 통일 방안은 이전의 통일 방안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 둘째, 이전의 연방제가 남북 총선거를 통해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한 과도적 대책이나 일시적 대안이었다면, 1980년의 연방제는 최종 단계 또는 궁극적 목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셋째, 국호와 관련하여 1960년에는 언급하지 않았고, 1973년에는 '고려련방공화국'이라고 했는데, 1980년에는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이라고 고쳤다. 넷째, 연방정부의 조직과 관련하여 1960년에는 '최고 민족회의'를, 1973년엔 '대민족회의'를, 1980년에는 '최고 민족련방회의'와 '련방상설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였다. 다섯째, 연방정부를 구성할 대표와 관련하여 1960년에는 당국 대표들로 국한하였지만, 1973년에는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도 포함했으며, 1980년에는 해외동포들에게까지 확대하였다. 여섯째, 연방국가의 외교강령 또는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1980년의 통일 방안에서는 중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중립화 통일은 1940년대부터 미국과 남한에서 먼저 논의되었으며, 2005년 2~3월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제기했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의 대안으로도 고려해볼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북한의 제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당국이 연방국가의 성격으로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국가"를 내세우는 데는 "내적 요인과 함께 외적 요인"을 바탕으로 "력사적 경험과 현실적 요구로부터" 그 당위성을 찾고 있다.

이렇듯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통일 방안으로 그 내용도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측면이 많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문제다. 남한이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여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한미군을 철수하여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이를 발표했던 1980년은 남한에서 광주민주항쟁이 무참하게 진압되고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절실한 때였다. 그러나 북한 역시 1인지배 또는 수령독재 체제를 이끌면서 남한의 민주화만 요구한 것은 분명히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또한 남한에서는 2014년 현재까지도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논의는 이른바 '금기의 성역'으로 남아있는데 그 무렵에는 더욱 심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의혹과 불안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남한의 보수계층이 북한의 통일 방안을 '음흉한 적화통일 전략'이라고 비난하는 가장 큰 배경이다.

▲ 신인식 평화통일신문 운영자(우)가 박용규 통일동지(옆), 리지윤 통일동지(좌), 권대섭 통일동지(뒤)와 같이 이재봉 교수의 강연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4) 1990년대의 '낮은 단계의 련방제' 통일 방안

김일성은 1989년 3월 평양을 방문한 남한의 문익환 목사와 만나 통일 방안에 관해 얘기하면서 연방제에 의한 통일은 "단번에 실현시킬 수도 있고 점차적인 방법으로 실현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단번에' 실현되는 연방제가 '높은 단계'라면 '점차적인 방법'으로 실현되는 연방제의 초기 단계가 '낮은 단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이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1991년 1월 신년사를 통해서다. 남북에 서로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하는 실정을 감안하여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에 기초한 련방제방식"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고려민주주의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련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련방제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여야 한다."

그는 나아가 1993년 4월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을 발표하면서 "북과 남은 현존하는 두 제도,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 수 있는 통일국가를 창립해야 한다고 했다.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의 제도와 사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공존공영을 도모하며 "우선 북과 남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면서" 평화통일을 지향해 나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낮은 단계의 련방제'는 남북이 각각 자치정부를 이끌면서 당장 군사권과 외교권을 합쳐 중앙정부 또는 연방정부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사와 외교 분야에서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지니면서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설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연방제를 '단번에' 실현하기 어렵다면 '점차적으로' 실현하자는 취지다.

위와 같은 1990년대의 통일 방안에는 남한의 흡수통일에 대한 경계나 두려움이 배어있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특히 동독의 붕괴에 따른 서독의 흡수통일 및 소련의 해체 등을 지켜보면서 북한 체제의 유지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1991년 1월 신년사에서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원칙에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나아가 1993년 4월의 '10대강령' 5번째 항목에서는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북한이 남한을 흡수하지 않겠다며 남한을 안심시키는 게 아니라 남한에게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마라는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1980년의 '고려민주주의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결코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것과 비교해보기 바란다.

또한 '10대강령'의 7번째 항목에서 "통일되기 전에는 물론 통일된 후에도 국가적 소유, 협동적 소유,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인 또는 단체의 자본과 재산, 외국자본과의 공동 리권을 보호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남쪽 자본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북녘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겠다는 불안감 섞인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1960~80년대의 통일 방안이 궁극적으로는 남한을 흡수하려는 '공세적 연방제'였다면, 1990년대부터의 통일 방안은 남한에 흡수당하지 않기 위한 '수세적 연방제'라고 해석하는 배경이다.

참고로, 1993년의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은 남한에서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불리는 1972년의 '조국통일 3대원칙' 및 1980년의 '고려민주주의련방공화국 창립 방안'과 함께 북한에서 '조국통일 3대헌장'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북한은 이를 "조국통일의 근본원칙과 방도들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조국통일의 3대헌장"으로 부르며, 2001년 평양의 관문으로 불리는 락랑구역 통일거리 입구에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이라고 이름 지은 거대한 조형물을 세웠다. 남한 당국은 공식적으로 연방제통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들르지 못하게 하는 곳이다.

▲ 이재봉 교수와 평화통일신문 리주한 이사장이 인사동에서 상단을 통해 '평양선언'을 고객들에게 선물하는 상단을 조직하고 있는 최명옥 여사에게 '평화통일상'을 수여하고 있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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