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장군의 맏며느리 차연순

최성주 주주통신원l승인2018.12.19l수정2019.01.07 20:28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최운산장군의 며느리 차연순

내 어머니의 고향은 연변의 도시 훈춘이다. 훈춘의 명망가 차정천(車正天)의 셋째 딸 차연순(車蓮順)은 올리베따노 베네딕또 수녀회가 훈춘에서 운영하던 해성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서 이해인 수녀님이 계신 곳으로 유명한 올리베따노 수녀회는 중국이 공산화되자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다. 덕분에 어머니는 친언니처럼 따랐던 고향의 수녀님들을 피난지 부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결혼 전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일하셨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수녀가 되고 싶었으나 집안끼리 정혼한 아버지와 혼인하셨다.

▲ 어머니의 학창시절

오래전부터 연변에서 터를 잡고 살던 두 집안, 연안 차씨 집안과 진산 최씨 집안은 인연이 깊다. 최운산장군의 누이인 고모할머니 최복실이 먼저 차씨 집안의 며느리로 시집갔고 큰이모와 어머니가 최씨 집안의 며느리로 왔으니 세대를 내려오는 겹사돈의 인연이었다. 고모할머니의 자식들이 어머니와 사촌이다. 외할아버지 차정천(車正天)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교육자로 신망이 두터운 분이었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정말 잘 생기고 인품이 좋은 분이라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외할머니(李基子)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도 무언으로 동의를 하시는 것 같았다.

큰외삼촌(차홍균, 차응균)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남쪽으로 내려와 우리 집에서 한동안 함께 지냈던 막내외삼촌(차상균)의 얼굴에서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짐작한다. 조카들과 잘 놀아주는 싹싹한 성품의 막내 외삼촌은 잘 생기고 키가 컸다. 조각 같은 외모에 언변도 좋아서 외삼촌이 배우가 되면 성공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예쁜 얼굴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우리 외갓집은 딸보다 아들이 더 잘 생긴 집안이라고 단정해버렸다. 해방 전에 결혼한 둘째 이모(차봉출)가 서울에 살고 있어 어머니 3남매는 6.25 후 남쪽에서 재회했다. 친척이 귀한 우리 형제들은 이종사촌들이 있는 서울로 가끔 방학 나들이를 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많은 젊은이들은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어머니의 두 오빠도 그러셨던 것 같다. 외삼촌들이 아주 멋진 젊은이들이었다는 부모님의 기억으로만 두 분을 만나곤 했다. 해방 전부터 평양에 사셨던 큰외숙부(차홍균)는 인민군 대좌로 우리 아버지가 만주에서 고문을 당하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평양에 정착할 때 도움을 주셨다. 언젠가 남북이 왕래하게 되면 외사촌들을 찾아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외숙부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보다 네 살 어린 어머니는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일본 유학생인 최봉우를 잘 알고 있었다. 정혼자 최봉우는 봉오동을 개간하고 독립군부대를 창설한 최운산장군을 닮은 강렬한 눈빛의 잘생긴 젊은이였다. 더구나 일본의 명문대학 와세다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촉망받는 청년이었다. 늦둥이였던 계순고모와 호석삼촌은 동경 유학생 봉우와 옥순 남매가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올 때면 봉오동 입구에서부터 온 동네가 훤해졌다고, 어린 나이에도 형님과 누나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고 기억하셨다.

최운산장군은 해방이 될 때까지 삼림지역인 대황구에 500명 규모의 무장독립군 부대를 비밀리에 운영하셨다. 1945년 초 아버지가 결혼할 당시, 만주 제일의 거부 최운산의 재산은 군자금으로 대부분 소진이 된 후였다. 40년 독립운동 기간 동안 만주와 연해주 등 여러 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대부분의 땅과 공장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해방 무렵 최운산장군에게 남은 재산은 봉오동 수남촌의 집과 그 주위의 땅이 전부였다. 당시 외할머니는 기울어진 집안이라며 혼인을 말리셨지만 어머니가 시집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단다. 어머니의 당차고 적극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 중 하나다.

신랑감인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이모와 함께 남편 될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래 훔쳐보러 가셨다.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키 큰 아가씨가 정혼자라는 걸 눈치 챘지만 짐짓 모른척하셨단다. 키큰 배우자를 원하셨던 아버지도 그렇게 어머니를 슬쩍 보시고 좋으셨다. 그렇게 두 청춘남녀는 동화 같은 설렘으로 결혼식을 치르셨다. 그러나 꿈같은 신혼은 며칠에 불과했다. 동경유학생이 일제의 학도병 징집을 피해 집으로 돌아오자 예의 주시하던 경찰이 간첩이란 누명으로 아버지를 잡아갔다. 신혼의 아버지는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며 생사를 넘나들다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 내가 좋아하는 엄마사진

어린 시절 할머니는 집안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일가친척이 많았고 이야기의 소재도 다양했다. 창극이 어미라고 불렸던 큰 이모도 가끔 등장했다. 며느리에 대한 신뢰가 깊었던 할머니는 가끔 엄마에 대한 칭찬으로 큰이모 이야기를 꺼내시곤 했다. 엄마의 큰언니가 넷째 할아버지(최명철)의 큰며느리였다. 아버지의 사촌형수가 어머니의 친언니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모가 그리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엄마가 시집오지 못할 뻔 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어머니는 할머니의 비밀스런 사전점검(?)을 통과한 후에야 아버지와 혼인할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인생의 환난을 함께 견디고 극복해낸 동지였다. 시집오자마자 고문을 당해 죽어가던 아들을 업고 두만강을 건넜고, 두만강변 움막에 숨어서 돌보아 살려낸 며느리였다. 딸 넷을 낳고서야 첫아들을 낳았던 당신의 마음고생을 아는 듯 귀한 아들을 첫손주로 낳아준 며느리였다. 그리고 1·4후퇴 때 손자를 업고 피난보따리를 이고 평양에서 거제도 피난민수용소까지 함께 걸어 내려온 동지였다. 빈손으로 타향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다져야 했던 아들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며느리, 운수업으로 기반을 다졌던 아들의 사업이 부도가 나자 팔을 걷어붙이고 남편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며느리였다. 할머니는 아들의 모든 상황을 사랑으로 품는 며느리 차연순을 깊이 신뢰하셨고 평생 의지하셨다.

어머니는 키가 참 크셨다. 농구선수처럼 어디서나 함께 있는 친구들이 어머니 어깨에 머물렀다. 그게 늘 불편하셨다는 어머니는 큰딸인 내가 당신을 닮을까봐 걱정하셨다. 그러나 중2에 성장이 멈춘 나는 아쉽게도 어머니의 큰 키를 물려받지 못했다. 기골이 장대한 최운산장군의 무인다운 풍모를 닮지 못한 것이 평생의 아쉬움이었던 아버지는 키큰 아내를 원하셨고, 자식들이라도 할아버지를 닮은 무인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우리 다섯 남매 중 아무도 군인이나 경찰이 되지 못했다.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남녀가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어머니 세대는 대부분 남편이 걸어가는 삶의 궤적에 따라 아내의 인생 여정도 결정되었다. 독립투사 남편을 따라 여성독립운동가로 거듭나신 할머니의 삶처럼 남편과 함께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어머니의 삶도 그랬다. 결혼하자마자 부모와 고향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우리 가족사의 중심에 당신의 삶을 두신 어머니는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품어 안으셨다.

어머니는 격동의 시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마지못해 그 길을 걸어가신 분이 아니었다. 항상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셨고 문제 해결의 주체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역할을 이해했고 그 어려운 길을 언제나 당당하게 걸어가셨다. 신혼의 남편이 감옥에서 반죽음의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생사를 넘나드는 남편을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날 밤 어머니의 결단으로 아버지는 살아날 수 있었고, 후일 평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지혜롭고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6·25 전쟁 당시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라는 안정된 삶을 버리고 남한으로 떠날 결심을 한 아버지가 돌이 갓 지난 아기와 할머니를 걱정하며 평양에 남아있으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단호하게 네 가족이 함께 피난길에 오를 것을 결정했다. 1·4 후퇴 때 걸어서 떠난 피난길이라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격으로 등 뒤에서 다리가 끊어지는 등의 위기상황이 매순간이었다. 어느 날 국군이 피난민의 앞을 막아섰을 때 젊은 어머니가 군인들과 담판을 지어 길을 열기도 했다. 아버지는 거제도까지의 피난길에서 겪은 위기의 순간에 어머니의 기지와 용기가 큰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전쟁 중에 가족이 해체되진 않았다고 자랑스러워 하셨다.

고향 훈춘에서 가까운 봉오동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어머니는 시대적 격변을 겪으며 평양에서 거제도로, 그리고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셨다. 예상치 못한 타향에서의 삶이 계속 되었지만 어머니는 매일의 새로운 생활에서 자신의 몫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가족들에게 사랑이 되고자 매순간 집중했고, 늘 최선의 선택을 하셨다. 어머니의 결단 덕분에 세상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던 우리 다섯 남매는 어머니가 만들어낸 평화롭고 성숙한 가족문화와 삶에 대한 긍정을 배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어쩌면 동경유학생 정혼자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사랑은 남편에게 자신의 온 일생을 기꺼이 내어주게 했다. 나는 놀거나 쉬는 모습의 어머니를 별로 기억하지 못한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 5남매, 모두 여덟 식구를 위해 늘 분주하셨던 어머니. 할머니가 직장생활을 하는 며느리를 도와주셨지만 어머니에겐 언제나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계신 일요일이 좋았다. 어머니가 이불을 꿰매실 때 이리저리 이불 아래로 굴러다니다 야단을 맞았던 추억도 소중하다. 일요일이면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다녀오는 것도 우리에겐 큰 기쁨이었다. 가끔은 냉면 등 외식의 기회도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잘생긴 우리 다섯 남매는 이웃들이 부러워하는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지금도 어머니가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고 믿는다. 믿음직한 큰아들이라서, 엄마 마음을 가장 잘 살피던 둘째라서, 큰딸이니까, 엄마를 닮았으니까, 막내니까, 등등 모두 당연한 이유를 당연하지 않다고 믿으며 자신만이 지닌 어머니와의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웃과 친척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어머니는 주변의 사람들 모두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까운 친척을 넘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가 자신의 어려움을 어떻게 살피고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자신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사랑 받았는지 오래도록 전해주었다.

▲ 내가 아기 때 오빠들과 함께 (함께 찍은 신부님이 누구신지....)

우리들은 어머니를 존경했다. 나는 학창시절,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 질문에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인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라고 썼다. 철이 들고 어머니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내게 늘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정답을 가지고 있었고, 최선을 다해 그 정답을 실현했고, 항상 기쁘게 사셨다. 그렇게 어머니로 인해 우리 집은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었다. 회사가 부도가 나고 아버지가 경제력을 잃은 뒤에도 우리 집은 언제나 할머니와 아버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어머니는 우리를 그렇게 기르셨다.

어머니의 삶에 늘 감사하면서도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되는 일은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완벽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철없는 딸이 내린 결론은 ‘나는 절대로 엄마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나는 좀 더 이기적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아들을 낳은 나는 엄마라고 다 완벽할 수 없다고, 나 같은 엄마도 있을 수 있다며 핑계를 찾았다.

그렇게 완벽하고 천사 같은 모습으로 깊고 진한 삶을 사셨던 어머니는 마흔아홉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3월에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8월 19일 여름방학 중이었다.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큰오빠, 군에 입대한 둘째오빠, 고3이던 나, 고1의 남동생, 초등학교 5학년이던 막내까지, 우리에게 어머니는 삶의 등대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가족 모두를 지켜주던 불빛이 꺼져버렸던 그날의 황망함은 지금도 돌아보기 어려운 기억이다. 모진 고문과 전쟁을 이겨냈던 아버지,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도 언제나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던 쉰셋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내고 무너지셨다.

그 시절 아버지는 자주 술에 의지하셨고, 술에 취한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와야 하는 날이 많았다. 큰오빠는 서울에, 작은오빠는 군대에 있던 시기라 큰딸인 내가 아버지를 돌봐드려야 했다. 집안 살림도 해야 했다. 아버지도 나도 처음 해보는 일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어머니가 안 계신 세상살이에 너무 서툴렀다. 늘 성적이 좋은 모범생이었지만 주부가 되어 고3 마지막 학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대학진학도 포기했다. 그러나 나는 캔디처럼 씩씩하게 굴었다. 세상에 지고 싶지 않았다.

2년 후인 1977년, 최운산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다. 그동안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으나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갈 수 있는 환경이 되자 마음이 바뀌었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대학에 보내주신 것이다. 고등학교 땐 역사학자를 꿈꾸었으나 빨리 취업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했다. 몇 달간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면서 인간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지지해주고 돌보는 간호사란 이타적인 직업에 경외감을 갖게 된 나는 간호대학에 진학했고 간호사가 되었다. 지금은 언론분야에서 시민운동가의 길을 가고 있지만 오래도록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 내가 중학생이 되어 단발머리를 하기 직전 한복을 차려입고 온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면 용두산공원에서 가족사진을 찍곤했다.

최운산장군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으로 우리 가족사를 다시 들여다본다. 아버지는 만주 무장독립전쟁을 이끈 최운산 장군의 역사를 제대로 밝혀드리지 못했다는 부채감에 많이 힘들어 하셨다. 사업의 실패와 정치적 좌절에 이어진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가장 힘든 순간에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어머니를 한해에 떠나보낸 일 등 피할 수 없는 삶의 굴레에서 넘어지고 절망하기도 했던 아버지, 당신이 가진 능력을 세상에 온전히 펼치지 못하고 떠나신 아버지의 일생을 돌아보면 지금도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려온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할 때는 마음이 많이 아프거나 그리 슬프지 않았다. 비록 길지 않은 삶을 사셨지만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셨기 때문이다. 주어지는 삶의 무게와 고통을 온전히 내면화하고 승화시킬 줄 아셨던 어머니는 한 번도 불행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일하시던 성분도병원의 수녀님들에게도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였다. 성당에서 병원에서 어머니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던 수녀님들을 보면서 나도 수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어머니는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늘 빛이 되셨다. 어려운 시절을 겪는 친척 모두를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셨고 이웃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그렇게 자신을 온전히 소모시키고 세상을 떠나 지금까지 모두의 기억 속에 사랑으로 남아있는 신기한 마법사 같았던 어머니의 삶은 길지 않았지만 완벽했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성주 주주통신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참여소통 데스크  |  전화 : 02)710-0093  |  등록일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23  |  발행인 : 양상우  |  편집인 : 김광호  |  에디터 : 이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광호
편집위원 : 김경애, 김동호, 박효삼, 서기철, 심창식, 안지애, 양성숙, 정혁준, 김국화  |  객원편집위원 : 김태평, 김혜성, 유원진, 이미진, 허익배
Copyright © 2019 한겨레: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