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우리는 희생된 젊은이들을 마주한다. 앳된 10대부터 혈기 넘치는 20대까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탄식을 낳게 한다. 국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앞에서 죄 없는 젊은이들이 어처구니없이 희생된 사례들은 극심한 분노감마저 안긴다. '왜 국가 공권력은 정당하게 행사되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자행되었던 것일까?' 로부터 시작하여 선하기 그지없는 청년들이 왜 그리 허망하게 죽어가야 했는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사실은 원통하게 희생된 젊은이들을 뒤이어 보통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어느 날 투사가 된다는 사실이다. 국가폭력과 구조적 모순의 선두에 서서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먼저 간 자녀의 뜻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어느 날 한 순간에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고통스러운 삶이 어머니와 아버지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하는 몇 분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처연하고 숙연하다.

1987년 9월 8일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84학번 최우혁 군은 군부대 내 쓰레기 소각장에서 분신 사망한다. 당시 전두환 5공 정권 군 헌병대는 평소 불우한 가정환경을 비관해 단순히 개인적 고민으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즉각적으로 1천명이 넘는 서울대생들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였다. 최 군의 어머니 강연임 씨와 아버지 최봉규 씨 등 유가족들은 민가협(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의 약칭) 회원 30여 명과 함께 민주학생장을 치렀다. 그리고 군 헌병대 발표에 항의하며 의문의 죽음을 당한 최우혁 군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 1987년 9월14일 서울대에서 군 입대 뒤 의문사한 최우혁씨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왼쪽). 최씨의 부모 최봉규(오른쪽)·강연임씨는 89년 5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찾아와 <의문사 진상규명> 농성에 합류했다. 어머니 강씨는 자책감 끝에 91년 봄 끝내 한강물에 투신함으로써 아들을 뒤따랐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최우혁 군이 군대에 간 것은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다. 공부 잘하고 착했던 막내아들이 어느 날 서울대 입학 후 매일 같이 데모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곤 했다. 그리하여 부모님은 학생 운동하던 아들이 감옥에 갈까봐 차라리 군대에 보내면 학교와 떨어져 있으니까 데모생각을 그만할 거라 믿었다. 정작 최우혁 군은 군대에 가길 원치 않았지만 부모님의 강권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병무청을 찾아가 군 입대 날짜를 앞당겨 달라고 간청했고 아버지는 친척을 동원해 입대 일에 아들을 집에 붙잡아 두었다. 최 군은 입대를 거부하면서 엄마에게 저항했다. "저 군대 끌려가면 저는 죽어요. 지금 못 보면 다시는 저를 못 보실 거예요."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안치된 최우혁 열사(출처 : 하성환)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안치된 최우혁 열사(출처 : 하성환)

최우혁 군이 죽은 지 3년 뒤 그 유명한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사찰 양심선언이 있었다. 최우혁 군이 보안사 사찰 대상이었다. 따라서 전두환 5공 정권이 저지른 군대 내 반인권적인 녹화사업의 실상이 폭로되었다. 나중에 노무현 정부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최우혁 군은 보안사의 관찰 공작과 군부대 내 구타와 가혹행위로 사망한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이 입대한 지 133일 만에 죽자 가슴을 치며 자책했다.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 아들을 억지로 군대에 보내 의문의 죽음을 맞은 어미의 심정은 극심한 자책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최 군이 죽은 지 두 달 후 어머니는 아들의 사망에 따른 충격과 자책감 속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한 쪽 눈을 실명했다.

그러나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던 어머니는 우뚝 서서 머리띠를 질끈 묶었다. 그리고 거리 시위 현장에서 그리고 군부대 앞에서 진실규명을 촉구하며 투사가 되어 싸웠다. '차라리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으면 지금 살아 있을 텐데'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그러면서 막둥이를 내가 죽였다며 극심한 자책감에 휩싸이곤 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 우혁이가 죽은 지 4년째 되던 1991년에 '내가 아들을 죽였다'며 한강에 투신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 또한 아들과 아내의 연이은 죽음 앞에 충격이 너무 컸다. 그렇지만 죽은 아내가 목숨을 내던지며 남긴 한을 풀어주기 위해 그리고 아들의 원통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유가협(전국 민주화운동 유가족 협의회의 약칭) 총무 활동에 열정을 다 바쳤다.

전두환 노태우를 처벌하기 위한 5・18특별법 제정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해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천막 농성을 감당했다. 70이 넘은 노구에도 고 이소선 여사, 고 박정기 어르신과 함께 한겨울 노숙농성을 이어가며 기어이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아들이 국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게 만들었다.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죽음이 이어지는 극한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아버지는 투사로 거듭나고 단련되었다. 『최우혁 열사 추모집』에 실린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에 실린 아버지의 독백이다.

"나는 이제 네가 죽은 것에 대하여 그리 슬퍼하지 않으련다. 네가 남긴 뜻을 위하여 나의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부디 나에게 힘을 주어 너의 비참한 죽음을 알리게 하고 너와 같이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들이 죽어 자빠지게 만드는 부조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이제부터는 너와 나 사이에 가로 놓인 차가운 강은 없어도 좋을 법 하구나."

아버지 최봉규 씨는 아들을 대신해 민주화운동과 인권 운동 투사로 치열하게 사셨다. 그리고 2016년 한 많은 80평생을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군부대에서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수천수만의 신체 강건한 젊은 장정들이 원통하게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한국사회는 정말 비정상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엔 매년 1000명씩 죽었다. 1980년대엔 매년 6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 돌아오질 못했다. 1990년대엔 매년 300명씩 죽었다. 민주화된 2000년대 이후에도 매년 100명씩 죽었고 오늘날 100명 밑으로 줄어들었다. 한국전쟁 종전 이후 무려 6만 명이 군대에서 죽었다. 전투상황이 아닌데도 너무 많은 죽음의 행렬이 이어져 온 것이다.

1984년 4월 2일 제7사단 폐 유류 창고에서 가슴과 머리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죽은 허원근 일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부대는 군대생활 염증에 따른 자살이라고 판에 박힌 내용을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조사결과였다. 허원근 일병은 광주항쟁 당시 고교생 신분이지만 시민군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대학 재학 중 지도휴학을 당해 군대에 간 것이다. 아버지 허영춘 씨는 유가협 의문사 지회장이 되어 단식과 삭발농성, 청원 등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아들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했다.

▲ 2016년 12월 29일 대법원의 재심 청구 기각 뒤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왼쪽에서 세 번째)씨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출처 : 한겨레 신문)

7-80년대와 90년대 초반 군사정권 시절 의문의 죽임을 당한 사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철로 변에서 아니면 야산 깊은 산속에서 그것도 아니면 바다 속에서 청년들의 처참한 주검이 발견된 경우가 허다하다. 한결같이 적법한 절차나 수사를 받지 못한 채 사건이 자살 내지 사고사로 종결되곤 했다. 국가폭력이 일상적으로 난무하던 극악한 시절이었으니까! 허원근 일병의 의문사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 조사를 하였다.

두 차례 결론은 모두 상관에 의한 총기 타살이었다. 1심 법원에서도 타살로 판결났다. 상관이 죽였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2심에선 자살로 판결이 뒤집어졌고 2015년 대법원 판결에선 사인 진상 규명 불능으로 끝났다. 2017년 국방부에선 순직처리 결정을 내리면서 대표적인 군의문사 사건은 그렇게 종결됐다. 영화 『JSA』의 배경이 된 1998년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도 그렇다. 법의학적으로 타살가능성이 짙었으나 20년 가까운 논란 끝에 2017년 순직 처리되면서 종결되었다.

2011년 논산훈련소 노우빈 훈련병의 죽음은 군 인권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뇌수막염을 앓아 40도 고열이었음에도 노우빈 훈련병은 20km 행군을 끝냈다. 그리고 탈진한 상태에서 민간병원은커녕 군의무관의 진료조차 받지 못한 채 타이레놀 두 알로 죽어간 끔찍한 사건이었다. 어머니 공복순 씨는 2016년 1월 군 피해치유센터 『함께』를 사비를 털어 만들었다. 군대에서 죽거나 다친 피해가족의 치유를 위해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임에도 국가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슬픔과 절망, 그리고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피해자 가족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일에 개인이 발 벗고 나선 모양새이다.

▲ 공복순 <군피해치유센터 함께> 대표가 15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사무실에서 개소식을 준비하고 있다. 평소에 파란색과 백합을 좋아했던 아들 노우빈 군을 생각하여 디자인을 그렇게 하였다.(사진 한겨레 신문 김미향 기자)

노우빈 훈련병 어머니는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원통하게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군 당국의 무성의와 거짓, 그리고 반복되는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결의를 밝힌 적이 있다.

"외쳐야 해요. 억울하게 당했는데 원래 군에서 우빈이 부검도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애 두 번 죽일 거냐고. 얼마나 부드럽게 말하는지 몰라요. 장례부터 치를 게 아니라 죽음의 원인을 밝혀야죠."

물론 이 일에 2014년 윤승주 일병 어머니 안미자 씨도 함께 하고 있다. 공복순 씨가 윤일병 어머니를 설득한 것이다. "어머니, 이제는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전태일에게는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은 전태일 엄마가 있었어요." 그러자 윤 일병 어머니도 결연히 응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죠." 윤 일병은 자대배치 받은 지 한 달 동안 극심한 구타와 가래침 핥기, 그리고 잠 안 재우기 고통 속에 죽어간 끔찍하고 잔혹한 군대 내 범죄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국방부 앞에서 군의문사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시위도 한다. 다시는 이 땅에서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아들과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빌면서 말이다.

영화 『1987』에서 강동원이 열연한 연세대 경영학과 이한열 군의 최루탄 피격사건은 평범한 시골 출신 어머니 배은심 씨를 민주화 투사로 만들었다. 한열이가 최루탄에 피격되기 전까지 어머니는 아이들 빨래하고 밥 해 주고 가족들 건강을 생각하는 게 전부인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한열이를 무지막지하게 직격탄을 쏘아 죽였다. 그렇게 어머니를 고통과 절망에 빠트렸고 그 고통과 절망을 딛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이어가며 30년을 넘게 싸우며 살아오셨다.

박종철 군의 물고문 사망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사건 이후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라고 울면서 임진강에 아들의 유골을 흩뿌렸다. 이후 아버지 박정기 어르신은 아들의 뜻을 이어 유가협 활동을 하면서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셨다. 농성과 거리집회, 경찰서 연행과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2017년 1월 박근혜 탄핵을 촉구하면서 90세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한겨울 땅바닥에서 촛불을 들었다. 아버지 박정기 어르신은 1994년 4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막내야, 다음에도 나는, 이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을 할 거야. 역사에 없어도 나는 네가 하다간 그것을 할 거야!"

▲ 박종철씨 고문치사 및 범인 은폐조작사건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판결을 계기로 1990년 8월 22일 서울 홍제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길에서 시위를 벌이던 박씨의 아버지 박정기씨(오른쪽)와 어머니 정차순씨가 다른 재야단체 회원들과 함께 경찰에 의해 강제로 전경버스에 태워지고 있다. 출처 :<한겨레> 자료사진

아들의 죽음과 6월 항쟁은 박정기 어르신의 삶을 180도 변화시켰다. 평범한 아버지였으나 아들의 죽음 이후 가장 치열하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며 헌신하셨다. 늘상 아버지는 그렇게 읊조렸다.

"아들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오직 부끄럽게 살았던 내 과거의 모습을 씻어버리고 종철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아버지가 되었다. …종철이를 본격적인 동지로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2018년 올해 박정기 어르신은 아들 곁으로 영원히 떠났다.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이 실종된 참사, 세월호 부모님들은 참사 이후 의식적으로 크게 변모하였다. 박근혜 정권 시절! 그 무서운 저항과 지칠 줄 모르는 투쟁 동력은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2016년 12월과 2017년 1월 광화문 광장 무대에 선 부모님들의 가슴 아픈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태안 화력 발전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고 김용균 님 분향소(출처 하성환)

마찬가지로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김용균 님의 어머니 김미숙 씨도 금쪽같은 아들을 잃고 절망으로 탄식할 때 세월호 부모님과 고교생 현장 실습 도중 원통하게 죽은 이민호 군 아버지를 만나면서 살아갈 목표와 힘을 얻으셨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들이 원했던 세상! 아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아들이 생전에 들었던 피켓 그대로 노동악법 철폐하고 불법 파견 혼내주고 비정규직 직접 고용을 위해 노동운동에 성큼 발을 내디딘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주주통신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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