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말, 잊힌 말 주고받기

분단은 말을 파묻은 세월.

인민, 동포, 동무, 공산주의, 화해, 남새, 슬기틀, 똑똑전화, 거리나무, 곽밥, 손기척... . 몇몇은 남북에서 함께 읊조리던 말이었고 몇몇은 북에서 새로 태어난 말들이다. 말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 사람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생기고 오가며 자리 잡고 돌다가 사라진다.

내남없이 오가던 말 틀어막고 돌려세운 건 우리들 머리와 가슴 복판에 세운 분단 벽이다. 해방되기 전까지 남북에서 함께 써오던 말이 북에서 쓴다는 이유만으로 남쪽에선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북에서 역사 발전의 주체를 앞세운 말로 ‘인민’을 쓰자, 남에서도 여상스럽게 써오던 말이었지만 입을 닫고 더는 찾지 않게 되었다.

1948년 헌법기초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헌법학자 유진오는 남북대결 때문에 ‘인민’이란 용어를 못 쓰게 되자 ‘좋은 낱말을 북에 빼앗겼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북에서 쓰는 ‘동무’나 ‘손기척’이란 말도 남쪽에선 자취를 감추었고 친구나 노크로 바뀌었다.

학문에는 어떤 금기도 없어야 했지만 학자들은 ‘공산주의’를 파고들 수 없었고, ‘북녘 동포’나 ‘화해’ 같이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말은 시나브로 지워졌다. 북을 가리키거나 대표하는 말은 오로지 독재지배세력만이 정권유지 수단으로 주어 섬길 뿐, 시민들은 함부로 쓸 수 없는 고무 찬양죄가 되어 멀어졌다.

거리나무(가로수), 끌신(슬리퍼), 끌차(견인차), 난날(생일), 덧머리(가발)... 북한말은 토박이말이 많다. 토박이말은 남북 누구나 듣자말자 눈앞에 떠올리고 바로 뜻을 알 수 있으니. 북한말 ‘열내림약’은 남한 사람 누가 들어도 해열제를 떠올릴 터이고 ‘이야기그림’은 만화, ‘잊음증’은 건망증, ‘주름막’은 커튼, ‘손전화’는 휴대폰, ‘볶음머리’는 파마, ‘둥글파’는 양파, ‘꼬부랑국수’는 라면, ‘기다림 칸’은 대기실로 짐작하고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이 오가면 말들도 따라 오가고 말글살이는 훨씬 풍부해진다. 말이 풍성하면 삶도 풍요로워진다.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오는 말은 북한 살림살이와 문화를 담은 조각들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넘어오는 길은 남한 말이 넘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어우러지며 남북이 함께 공감하는 말은 그 길 위에 남고, 어느 한쪽에서 억지 부리는 말은 사라질 터이다. 남쪽으로 향하는 발길로 말길 트면 졸졸 걸어오는 이, 어찌 북녘 웃음과 눈물뿐일까. 남북이 오롯이 평화로운 나날과 반짝이는 살림살이란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 사진 : 한반도 평화번영의 새천년을 열어가는 해와 달 / 정병길 화백

휘둘리지 않고, 이치에 맞는 의심하기

강원도 산골 아홉 살 소년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죽임을 당했다. 전설 같은 이야기가 들려온 건 1968년 박정희 독재정권 때. 어린이는 낯선 사내들을 보자 말자 공산당인지 아닌지 바로 알아맞히는 신통력을 보였다. 어떻게 그랬을까? 나였다면 ‘강도는 싫어요’ ‘나쁜 아저씬 싫어요’(집에 함부로 쳐들어왔으니까)같은 말, 겁에 질려 겨우 입안에서만 맴돌았을 텐데.

2011년 5월 이명박 정권 때는 농협전산망 마비사건이 북한소행이라고 임시로 결론 내린 적 있고, 광주민주항쟁은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 짓이라고 떠드는 무리들 있다.

초등학교 배움터 마당마다 들어선 ‘이승복 소년상’은 이치에 맞는지 가늠하고 따지는 ‘합리’를 억압하고 짓누르는 냉전 상징물로 커갔다. 학교는 이치를 따지고 진리를 찾기는커녕 작은 질문조차 허용하지 않는 외우기 전당이 되어갔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라면 가야 하는, 줄 세우기 지옥으로 바뀌어갔다.

의심하고 묻고 따지는 말에 몸서리치는 독재자들은 진실을 찾는 요구를, 정당한 절차를, 마땅한 비판을, ‘말 많으면 빨갱이’ 라는 말로 아퀴 짓고 파묻어버리기 일쑤였다. 폭력으로 진실 잠재우고 억지와 가짜 뒤에 음험하게 도사렸다.

2019년을 발치 아래 맞은 우리들은 이제 합리를 갖춘 이성 되찾았을까. 북한을 붉은 장막 뒤에 가리고, 북한인민 모두를 전쟁광 ‘빨갱이’로만 몰아붙이는 한, 남한에서 이성은 발붙이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남쪽에 이성이 찾아오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낡아빠진 이데올로기 사립짝을 밀치고 남쪽으로 온다면, 그 길은 ‘빨갱이’가 아닌 북쪽 2천5백만 ‘대표’로 오는 길이다. 총구와 탱크가 아닌 말과 이성이 넘어오는 길이다. 선전과 선동이 아닌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사실이 오가는 길이다.

우리들 삶 속에 합리와 이성이 자리 잡자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남북 오가며 말 섞고, 땀 흘리고, 날 보내야 한다.

분단이 토막 내고 조각 낸 우리들 합리와 이성을 이어붙이고 맞추자면 억지로 감추고 일부러 버린 반쪽이 꼭 필요하다. 쪼개진 거울로는 우리 몸을 온전히 비출 수 없기에. 2019년,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너와 내 모습 비추는 거울로 와야 한다. (계속)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시열 시민통신원  abuk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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