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사랑했고, 모차르트 등 많은 예술가들을 키워낸 도시

2014년 8월 1일 프로이센의 상수시 궁전 견학을 마치고 다음 날인 2일에는 독일의 국경지역에 있는 작센주의 드레스덴을 찾았다. 이곳은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어서 과거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던 지역이다. 한때는 왕국이 들어서기도 하고, 신성로마제국 시절에는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선제후가 통치하기도 하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동독 지역의 영토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통일 독일의 한 주로 자립잡고 있는 역사의 우여곡절이 많은 작센주의 주도인 것이다.

2014년 동유럽 5개국 연수를 마치고 '베캄원정대'(다음 카페)에 연수 후기를 실었는데, 그것을 옮겨온 글과 사진이다.

▲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 앞 광장의 모습
▲ 궁전 마당에 치솟고 있는 네 개의 분수가 인상적이다.
▲ 왕궁의 규모와 아름다움으로 보아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 거대한 곳이 있을까 할 정도로 입을 딱 벌어지게 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었다는 츠빙거 궁전

해를 쫓는 사람들아

                      김 광 철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를 쫓아 날아가는 사람들아

그 옛날 해지지 않은 제국의 땅으로

그들도 해를 쫓아 동방으로 동방으로 몰려갔던 것처럼

동방의 풍부한 정신세계와 물산에 기죽어

온갖 망나니짓을 하였다지

소소한 물건을 뺏는 정도야 봐 주겠다만

건물까지도 헐고 뜯어다 전시하는 것을 보면

뻔뻔함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왜 그랬으며

오늘은 어찌하는지 보고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음악이며, 미술

어떻게 마을을 이루고 나라까지 이루어 살았는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의 혼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다

그 혼의 뿌리는 어디이며

그들이 만들고자 한 세상은 어떠한지

그 사유의 뿌리는 어디인지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연유에서 기인하는지

그들이 쫓던 해가 잠시

아메리카로 넘어가는가 했더니

오늘 다시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비치고 있음을 확인한다

경박스럽지 않고 두루 함께 하고자  하는 넉넉함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저 해는

이곳의 하늘에서만이 아닌

해 뜨는 동방

동아시아에서 더욱 우뚝 솟아오르리라

기대하면서

▲ 왕궁 밖으로 나오면 궁궐 벽에 저렇게 왕들이 말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들을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동하는 모습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지그라피트기법에 의하여 벽의 무늬를 새겨놓은 것들도 인상 깊게 볼 수 있었다.
▲ 대리석 석상들이 잘 장식되어 있는 작센 왕궁의 모습

독일 작센주의 주도이면서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베강의 피렌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이 도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히틀러도 참 좋아했다고 하고, 유럽의 발코니라고 부를 정도로 뷔렐의 테라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만큼 뷔렐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엘베강의 전망은 유럽에서는 으뜸이라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지만 제2차 대전의 막바지에 미국과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3만 5천 명이 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고 대부분 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것을 복구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번 여행 전에는 독일에 작센이라는 주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았지만 '드레스텐'이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은 몰랐던 무식함을 갖고 있었다. 지난봄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드레스텐 선언'을 하여 남북문제에 대한 원칙을 발표를 했는데, 그게 북한을 자극하여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까지 남북문제를 대화를 통하여 윈윈하겠다는 정책이 아니라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소리로 북한은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남북문제는 계속 꼬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 교회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엘베강의 아름다운 모습, 강 건너는 신시가지의 모습이다.
▲ 이곳에서 제일 높다는 푸라우엔교회 탑에 올라 드레스텐 시내를 둘러보고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많다고 한다. '드레스텐 진혼곡' 등이 여기에서 나온 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역시 유튜브를 통하여 들어보았더니 장중하다.

이곳 드레스텐은 작센 지방의 중심으로 체코의 프라하와 더불어 신성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신성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을 때도 있지만 이 지역에서 강력한 변경백이 나올 때는 신성로마제국의 통치력을 배격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고 권력의 중심에 섰던 곳으로 알고 있다.

▲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세워진 그 옛날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텐, 엘베강을 통하여 함부르크까지 내륙수운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다만...
▲ 우리 일행들은 엘베강의 야경을 본다며 건너편 강가로 나갔다. 강가에는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대하던 금불초가 만발하여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서식하지 않았던 가시박이라는 식물이 지금은 서울 난지도를 여름철에 다 뒤덮고 있었는데, 이곳 드레스텐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보는 가시박은 유럽에서 귀화된 식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사암을 이용하여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궁전 등 참으로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2차대전 때 연합국의 폭격에 의하여 대부분 파괴되었다는 말을 듣고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 드레스덴의 관광 안내소
▲ 드레스덴의 유명 관광지들을 안내하고 있는 안내지도

<퍼온 자료>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슈타츠오페른코어의 진혼곡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인 1951년 2월 13일,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수석지휘자였던 루돌프 켐페는 그로부터 6년 전인 1945년에 있었던 폭탄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수천 명의 사람과 파괴된 도시를 기리기 위하여 베르디의 「진혼미사」를 연주하였고, 이는 해마다 이날에 연주된 진혼곡의 시작이었습니다.

슈타츠극장 대공연장―현재의 슈타츠샤우스필―에서 연주된 베르디의 진혼곡은 많은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은 여전히 폭격이 드리운 공포를 즉각적으로 떠올렸지만, 이 공연은 지역사회가 서로 비탄을 나눔으로써 친한 친구와 친척을 잃어버린 고통을 참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니온 신문」은 다음날 이렇게 공연을 평하였습니다: “청중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만 그들이 느낀 감동과 감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공연 끝에 박수를 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평화의 송가: Lera Auerbach의 "드레스덴 진혼곡"
「드레스덴 진혼곡」은 상임작곡가 Lera Auerbach가 슈타츠카펠레와 성모교회 재단의 촉탁을 받아 작곡하였습니다. 이 곡은  그녀가 곡을 작곡할 때 가장 많은 영감을 받았던 드레스덴 성모교회에서 2012년 2월 11일 초연되었습니다.

「드레스덴 진혼곡」은 그녀의 장편 오페라 「고골」과 비견될만하며, 이제껏 슈타츠카펠레가 촉탁하였던 곡 중에서도 가장 장대합니다. 이를 위해 슈타츠카펠레는 성모교회 재단과 협업하였습니다. 이 협업의 목적은 드레스덴의 가장 중요한 교회이며, 죽음과 비통뿐만 아니라 희망과 재건을 상징하는 성모교회에서 새 곡을 초연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Auerbach의 「드레스덴 진혼곡」은 교회가 파괴되기 며칠 전이었던 2월 11일 성모교회에서 초연된 뒤, 2월 13과 14일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시청탑에서 바라본 드레스덴, 1945년>
< 드레스덴, 2012년>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 Lera Auerbach에게 「드레스덴 진혼곡」은 그녀의 진심 어린 바람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괴로, 드레스덴은 믿기 어려울 피해와 손상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도시는 평화의 재건과 혁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Auerbach는 가사를 붙이면서 이 작품의 부제를 "평화의 송가"로 지었습니다. 이 결정은 화해와 희망이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Auerbach는 일부가 드레스덴에서 작곡된 쉴러의 "환희의 송가"와 닮은 제목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진혼곡을 준비하며 Auerbach는 드레스덴의 역사를 철저히 탐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언어학과 신학의 지식도 쌓았습니다. 18번째 동기의 리브레또에서 Lera Auerbach는 라틴어 미사뿐만 아니라, 「Pater Noster」나 유대교 예배식과 같은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뉴욕시소방국의 목사이자 9/11의 첫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저지 신부의 기도와,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작가 크리슈티안 레너트가 성모교회 종(bell)의 세례를 위해 지은 시도 함께 넣었습니다. 흔히 「키리에」로 일컬어지는 부분은 20개가 넘는 언어로 불리며, Auerbach가 추구하였던 보편적인 접근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게다가 여러 고대의 기도와 현시대의 글을 함께 노래함으로써, 초교파적인 성격과 영속성도 나타냅니다.

이러한 점에서 Lera Auerbach의 「평화의 송시」는 도전입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다른 기념 공연과 비교하여 이 진혼곡은 특별한 위치를 갖습니다. 보통 모차르트나 브람스, 베르디,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전통적인" 진혼곡이 이 의식에서 연주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초연된 곡은 1956년에 연주된 것으로 쿠르트 슈트리글러는 1945년의 드레스덴 폭격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을 작곡하여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Lera Auerbach는 현재의 정치 사상적인 갈등을 마음속에 품고, 「국수주의의 모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이 진혼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출처] Lera Auerbach: 드레스덴 진혼곡 「평화의 송시」 (슈만과 클라라 (클래식음악 동호회)) |작성자 슈나벨

우리 베캄원정대는 드레스덴 견학을 마치고 다음 날 체코를 향해서 가면서 동부 독일의 바스타이 국립공원에 들러서 아름다운 계곡과 풍광에 푹 빠졌다. 사암 등 퇴적암과 지층, 엄청나게 높은 낭떠러지 밑에 흐르는 계곡 등에 빠져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아쉬운 발걸음 옮겨 체코로 향했다.

▲ 기기묘묘한 사암들의 형상이 눈길을 끌었다.
▲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도 보였다.
▲ 분홍바늘꽃, 이 꽃은 백두산 인근의 우리나라 북부지방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이곳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이 볼 수 있었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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