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소란 배를 만드는 곳인데 여기에서는 배를 만들었던 곳이나 매어뒀던 곳을 의미한다. 그럼 이러한 배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밝혀진 것부터 하나씩 풀어보자. 오늘날의 조선소들을 보면 대부분 옛날에 조선소가 있었던 곳이나 그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곳을 보면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 진남관 앞 중앙동 사거리의 선소(지금은 매립됨)와 돌산읍 군내리 서외마을의 방탑진 선소 등이 있다. 여천 선소유적지는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들었던 곳이라고 하며, 임진전쟁 때는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선소, 부안의 진안리 조선소 터, 완도의 부추언 두 곳, 완도의 정도리 구계등도 옛 지명은 부추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이곳에서도 배를 만들었거나 수리를 했던 곳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광양시 진월면의 선소, 장흥의 죽청리 선소 등 이 밖에도 알려지지 않는 곳이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보성의 비봉리 선소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무기를 만들었던(대장간) 곳으로 추정하는 이곳에서는 쇠붙이가 많이 나왔다고 하고, (김성열 씨의 집터) 선착장 밑에는 아름드리 통나무가 묻혀있다고 한다.

또한 장흥의 죽청리 선소 자리는(장흥군 관산읍 죽청리 산 26-1번지 일대) 여몽 연합군의 전함을 만들었던 곳(장흥문화원)이고 조선소 터 위에 도목수의 묘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완도의 부추언(艀堰) 두 곳은 지금도 부추언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청해진 장도의 좌우에 있어 확실한 조선소의 터라고 여겨진다. 또 다른 선소로 추측되는 곳은 완도의 정도리 구계등(구경짝지, 九境汋地)이 옛날에는 부추라고 불렀으며 정도리 마을 회의 때 부추림(艀林)에 관한 의안이 상정돼 그곳의 나무관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황정주 씨의 말)

이 부추림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즉 부추라는 뜻이 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부추림이란 배를 만드는 나무가 있는 곳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도 당시에 배를 만들었던 소나무가(紅松)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둑을 쌓아서 논으로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바닷물이 들어온 곳이고 지세가 안쪽으로 구부러져서 바깥 바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적선의 눈을 피하여 전선을 만들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을 수도 있다.

더구나 인근 마을인 대구미란 마을에는 가마터가 있고, 화흥리에 대절터(大)라고만 전해오는 곳에서는 후 신라 때의 어골문양의 기와 편들이 나오고 화장터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선소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더 늦기 전에 이러한 곳들을 찾고 발굴해야 한다.

남해선소

▲ 남해 선소(제공: 남해문화원)

위 사진은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192-9번지에 있는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를 보여준다. 이 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1972년 2월 12일에 지정됐다.

임진전쟁과 정유전쟁이 끝나는 선조31년(1598)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일본 패잔병 500여명은 관음포를 통해 육지로 올라와 일본군이 주둔했던 선소의 왜성으로 갔다. 그러나 왜성의 주둔군이 도망하고 없자 패잔병들은 주민들의 선박을 탈취해 일본으로 도주했다.

명나라군은 이곳에 도착해 왜군을 찾았으나 이미 떠나고 없어 다음해인 선조32년(1599)에 왜성 아래에 있는 자연바위(自然岩)에다 유격대장(遊擊大將) 장량상이 각자(刻字)한 것이다. 명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남해까지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명나라의 위대함을 암각(岩刻)한 전승시비(戰勝詩碑)이며, 12행(行) 종서(縱書)로 돼 있다. 주록(周綠)에는 당초문(唐草文)으로 띠를 돌려 새겼다. 비문 말미에 만력(萬曆) 二十六年 계추(季秋) 국가복유(國家復有) 간동제(干東弟) 유시(維時) 조선수왜환지시(朝鮮受倭患至是) 육칠년의(六七年矣) 아사구지(我師救之) 황명(皇命) 만력(萬曆) 二十七年 양월상완길조일건(陽月上浣吉兆日乾)이라 새겨져 있다.(남해문화원 제공)

남해선소는 뒤편이 급박한 언덕이라 만조 시에는 공간이 없어 이곳에서 배를 만들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냥 배를 메어 두었던 곳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대굴포 선소
함평문화원에 의하면 또 하나의 새로운 선소가 있었다고 한다. 2006년 함평군 문화원의 향토문화 논단에 의하면 세종14년(1432) 10월 20일 전라도 순찰사 정흠지(鄭欽之)가 본도의 대굴포(함평군)에 있던 수영을 목포에 설치하고 목포의 전라도 수영을 해남의 황원으로 옮겼다.

또한 함평군 향토문화지 창간호와(1989) 한국 향토사 전국협의회지 1집(1989)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맹사성, 윤희 등이 찬진한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관방수어항에 수군처치사영이 무안의 대굴포(당시는 무안군이었으나 지금은 함평군에 속함)에 있고 대선8척, 중선18척, 수군 1895명, 초공(梢工) 21명이 있었다고 했다. 또 무안현의 관방항에 대굴포 수군처치사영에 병선이 정박해 있다고 했다.
 

▲ 대굴포(출전: 우리 배 고기잡이)


위 그림의 O표가 대굴포다. 지금이야 모두 농경지로 쓰고 있지만 당시에 대굴포가 있었던 곳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한편 2003년 7월 10일부터 전남매일(광주소재, 정철기자)신문에 연재된 기사 중에는 이런 내용을 다루는 글도 있다. 거북선이 대굴포에서 처음으로 제작됐으며, 태종 15년에 병조의 좌대언으로 있던 나주 출신 탁신(卓愼)의 상소에 의해 그 성능이 강화되고 외형이 개조됐다고 한다. 나주 노안 출신 신숙주가 중국, 일본, 유구국 등에서 사용하는 선박의 장점을 살려 거북선을 개량했다는 설명도 있다. 이는 몽충에서 본을 떠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설과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다.

왜구의 소멸로 인해 그 효용이 떨어진 거북선은 200여 년이 흐른 뒤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과 그의 문도인 송재문, 오익공, 나덕신, 나덕영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 박만천, 나치용, 이설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함대곡마을)에서 다시 건조됐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재민의 해광집, 오익장의 사호집과 번앙집, 의병장 김천일의 종사관 임환의 습정유고, 임전의 명고집, 나대용, 박만천의 문집에 수록돼 있다.

대굴포는 고려 말 나주 문평 출신 정지와 부안 위도 출신 이희가 왜구 방어책 10조를 통해 배 제작의 최적지로 지목한 곳이기도 하다. 바다에 인접한 선소보다 내륙에 있는 대굴포의 선소가 왜적의 급습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고려 말에 제작된 거북선이 200여년이 지나 나대용, 손재민 등에 의해 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전함 제작과 해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정지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광산 탁씨, 홍주 송씨, 예안 이씨, 광산 김씨, 나주 나씨, 금성 나씨, 담양 김씨, 무안 박씨, 함평 이씨, 함양 오씨, 양성 이씨, 고령 신씨 등을 통해 거북선의 설계도나 제작기술이 전승된 덕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주장을 고려하면 이순신이 어느 날 갑자기 짧은 기간 안에 거북선을 창제했다고 하는 설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당시 무안 출신 선무원종공신 1등 훈이었던 구암 김충수(龜巖 金忠秀)는 정유전쟁이 일어나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 천 여 명을 규합하여 관군을 돕고자 길을 떠났다. 1597년 9월 5일 적의 배가 몽탄강을 거슬러 올라오니 그는 부인 금성 나 씨(나덕원(羅德元)의 누이)와 두 어린 아들을 대굴산에 은신케 하였다. 그는 병졸을 사포나루에 모이게 해 준비된 배에 올라 적을 맞아 고전했다. 결국 그는 중과부적으로 대굴산으로 후퇴해 진을 치고 싸웠으나 사로잡혔다. 그는 적이 항복을 권유했으나 조선의 신하인데 어찌 항복할 수 있느냐며 굽히지 않았다. 적은 공의 몸을 쳐서 죽게 했고, 부인 금성 나 씨도 함께 순절했다고 한다.
 

▲ 조선조 전라수영 및 병영이동경로(출전: 함평군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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