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라는 지명은 고려 때부터 완도라고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왕을 찾아뵙고 군사 일만을 얻어 청해를 지켰다. 청해는 지금의 완도이다. [後歸國謁王 以卒萬人 鎭淸海(淸海今之莞島)]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출처 : 한겨레. 건강의 섬, 미소의 섬, 완도

완도라는 지명이 정사에 기록 된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 최초이다. 삼국사기가 저술된 해가 1145년으로 청해진이 혁파 된지 294년 후에 저술되었다.

294년 동안에는 청해진이라 부르다 완도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기록이 있기 전에 이미 완도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바다를 깨끗이 하여 청해(淸海)라고 부르게 되어 완도라는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완도라는 지명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완도라는 지명이 왕골이 많은 섬이라 왕골 완자라 하여 완도라고 했다는 설과, 원도(苑島-국원(國苑)라는 설로, 이 설은 완도가 나라의 정원으로 지정되면서 국원의 원자를 따다가 원도(苑島)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 완도에 왕골이 많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섬에 왕골이 많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어찌되었건 완도의 완자가 왕골 완자이면서 빙그레 웃을 완(莞)자이다. 빙그레 웃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웃음, 즉 미소(微笑)를 의미한다. 미소는 옛 선비들의 덕목으로 삼았던 웃는 모습이며 앞으로 허허하면서 더 크게 웃을 수 있는 철학적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또 하나는 청해진이 혁파된 후 벽골제에 강제이주 되었던 우리 조상들이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청해진 이야기만 나오면 천부의 구별 없이 평화롭게 살았던 고향을 생각하면서 빙그레 웃음 지었다는 설이 있다. 웃는다는 좋은 의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벽골제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우리조상들은 두 가지의 웃음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서로 모여서 청해진의 이야기에 심취되어 있으면서 청해진의 생활이 도연명의 이상과 꿈이었던 무릉도원을 연상하고 혼자서라도 빙그레 웃음 지웠을 것이다. 또 하나는 청해진을 모르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너희는 그런 세상을 살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비웃는 모습 이 두 가지 웃음으로 “벽골제의 청해진 노동자들은 언제나 웃는 모습 이다.” 라고 하여 완도라 했다는 설도 있다.

이는 그 시절 벽골제에서는 “청해진”이란 말만해도 처형을 당하는 억압 속에 살았기에 완도는 아무리 들어도 빙그레 웃는 그 모습에서 우리의 미래가 밝음을 예견할 수 있다.

공자가 제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연회 석상에서 무희들의 가야금 노래 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夫子莞 而爾笑) 라는 대목은 즐거워 자연스레 웃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웃음의 의미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웃음 그 자체만으로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되고 공동생활의 바탕을 만드는 긍정적 삶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지명이 이처럼 동사(動事)로 표현하는 지명은 거의 없다, 해남, 또는 진도의 명칭도 모두 명사를 주 어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완도의 동사 표현은 그야말로 장보고의 혼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복 받은 땅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완도인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완도가 군(郡)이 되기까지 완도군이 설립되는 데 가장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사람은 심재 이도재(李道宰)이다. 이도재는 조선후기 문신으로 1886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호군으로 재임하던 시절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하여 사대수구파의 배척을 받아 그해 4월 고금도에 유배 8년여를 고금도의 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섬사람들의 어려움을 알게 된다.

당시 섬 주민들은 각기 인근 육지에 배속되어있어 이중 삼중의 세금이 부과되어 주민의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실정을 보면서 섬사람들끼리만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산재되어있는 섬을 하나로 묶어 독립된 하나의 군(郡)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남에 따라 유배생활이 해배되어 다시 조정에 출사하게 되자 고종에게 전라도에 전출되기를 희망, 전라도 위무사 겸 순찰사(지금의 전라도지사)로 임명을 받고 전주 관하에 부임과 동시에 고금도 옛 선비들을 불러들여 설군(設郡)의 계획을 수립한다.

위와 같이 완도가 처음 만들어 지기까지는 심재 이도재(李道宰)의 역할이 제일 크게 작용하였으며 심재의 유배생활 8여년 지기인 김광선(金光善)의 설군에 대한 열정을 더하여 지금의 완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광선(金光善) 그는 누구인가?

이름은 상철(相轍, 初名) 규원((奎源, 改名)이며 字는 광선(光善)이고 號는 침천(枕泉)이다. 김광선의 할아버지인 김석근은 일찍이 신지에 유배된 원교 이광사(李匡師)의 후학으로 서예를 익히고 호남의 명필이라는 칭호를 받은 분이다, 광선은 13세에 고금도 박경진 스승을 만나 용지동(지금의 고금면 청용리)으로 이거하여 박경진과 박호진 두 형제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인 수학에 들어간다,

광선이 16세 되던 해 박호진의 승낙으로 호진의 딸 박신례 와 결혼하여 아들 여섯을 두게 된다. 후손으로 차남인 소남 김영현 선생이 있어 1955년에 완도에서 일어났던 민란을 청해비사라는 책으로 출판하여 오늘 우리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김광선이 남긴 기록으로는 1987년도에 출간된 “침천 자서행록”과 2008년에 출간한 국역 침천시고(枕泉詩稿) “샘물을 베고 누어”라는 시집이 있어 이를 근거로 완도의 설군(設郡)에 관한 자료와 완도가 설군 되어 행정의 기초를 다지는 많은 자료들이 실려 있다,

심제 이도재와 침천 김광선은 고금도에서 맺어진 정으로 완도의 설군이 이루어지기까지 동지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설군의 주역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는 심제 이도재가 고금도의 정을 잊지 못 하고 고종에게 청하여 전라감사를 지원하고 완도에 김광선과 유지를 초청 설군의 계획을 수립하여 조정에 올리게 되었다.

완도 하나만으로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판단에 돌산군과 지도군도 함께 올려 설군이 되었다. 그 후 돌산군과 지도군은 여수와 신안으로 합병되고 유일하게 완도군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 설군 계획은 1896년 2월 3일 고종의 승인으로 장흥에서 38개 섬, 영암에서 30개 섬, 강진에서 23개 섬, 해남에서 9개 섬을 합하여 100개 섬과 인근 무인도를 합하여 “莞島郡”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군이 신설되었다. 이어서 3월 7일 완도 초대군수에 이규승(李圭昇)이 부임하는 것으로 완도가 시작 된 것이다.

1896년 2월3일의 고종 승인은 정말로 아슬아슬한 절차를 거치게 된다. 고종황제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게 된다. 아관파전이 있기 7일전에 이도재는 완도의 설군 승인을 받게 된다. 며칠만 늦었어도 영원히 설군(設郡)이 되지 못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설 군이 된 완도는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이후 전국 최고의 부자 군으로 명성을 떨치었다. 이 모두가 김의 수출로 얻은 수입 때문이었다. 이제 빙그레 웃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앞으로는 소리소리 높여 웃는 날이 오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는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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