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의 농민항쟁

계미민요 마광남 주주통신원l승인2019.01.17l수정2019.01.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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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완도에서 있었던 농민항쟁을 후세대들에게 자세히 전해질 수 있도록 쓴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 완도 인들은 그 정신을 기리고자 사당을 짓고 그를 모시고 있다. 우리의 민중봉기를 계미년에 있었다 하여 계미민요(癸未民擾) 또는 농민항쟁이라 부르고 있다. 1882년 10월 7일 제 215대 가리포(완도) 첨사로 부임한 이상돈이라는 한 첨사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이곳 농어민들이 봉기를 한 것이다.

▲ 출처 : 한겨레, 완도농민항쟁도

이 소요는 동학보다 10년 앞서 일어났다.

대대로 아끼어 오던 황장목(참솔,홍송)으로 인하여 국원으로까지 지정된 곳의 나무를 첨사자신의 사욕을 위해 군민들을 수탈하고 인간백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극악무도한 첨사 때문에 농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에 인간백정이라 하였으며 당시에 그 엄한 법이 있었음에도 왜 봉기를 하였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도 3일에 불과하지만 혼란을 막으려 스스로 향도청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였고 허사겸은 최고 책임자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질서를 유지케 하였던 점에 대해서 우리는 그 뜻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막으려 모든 죄를 혼자서 저지른 일로 하고 그 죄 값을 치루고 혼자서 단두대의 이슬로 생을 마감한 그 뜻을 우리는 높이 사고 영원히 기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로운 정신은 장보고가 인본주의 사상으로 진의 백성을 다스렸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허사겸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고 다만 왕조실록에 조금 나와 있는 것이 고작이다. 다행스럽게도 김영현 선생이 쓴 청해비사가 있어 그나마 보다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1955년 당시 역사 선생이었던 소남 김영현 선생이 당시 소요에 참여했던 분들을 직접 찾아가 들은 것을 그대로 적어 청해비사라는 책으로 발간하여 오늘에 전해진 것을 바탕에 두고 쓰려고 한다. 청해비사를 토대로 하여 쓴 것이어서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있기 때문에 문맥이나 맞춤법에서 현재와 다른 점이 있으니 독자들은 이점을 이해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참고할 것은 허사겸의 겸자가 왕조실록에는 謙 또는 兼으로 표기 하였고, 청해비사에는 謙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이상돈의 돈 자도 실록에는 惇자로 되어있으나 청해비사에는 墩자로 되어 있어 참고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인 가리포진첨사선생안에는 墩자로 되어 있어 있다.

이 글은 수회에 걸쳐 연재를 할 것이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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