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의 종식을 알리는 민중서사

조선어학회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말모이』가 지난 1월 9일 개봉됐다. 개봉된 지 2주가 지난 지금 25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쓴 엄유나 작가가 직접 이번에도 각본을 썼고 영화감독으로 첫 선을 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두 작품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비슷하다. 이름 없는 민중들의 서사로서 영화스토리를 전개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영화 『말모이』에서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무명의 택시기사 김만섭(송강호 분)이 열연한다. 둘 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과 광주민중항쟁(1980)의 주역들이자 당대 역사가 민중들의 서사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말모이> 포스터 (사진 : 하성환) <말모이>는 사전의 순 우리말이다. 전국 8도 토박이말을 수집하기 위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과 조선어학회 회원들 그리고 민중을 상징하는 캐릭터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의 연기가 감동적이다. 실제로 1940년대 일제 말기 조선인의 문맹률은 80%를 넘었다.
▲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말모이> 포스터 (사진 : 하성환) <말모이>는 사전의 순 우리말이다. 전국 8도 토박이말을 수집하기 위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과 조선어학회 회원들 그리고 민중을 상징하는 캐릭터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의 연기가 감동적이다. 실제로 1940년대 일제 말기 조선인의 문맹률은 80%를 넘었다.

당대 민중 서사로서 영화 『말모이』에는 명장면이 등장한다. 전국 8도 각지의 토박이말을 모으기 위해 판수(유해진 분)는 이름 없이 떠도는 밑바닥 인생들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전국 8도 사투리 어휘가 수집되고 우리말 큰 사전인 『말모이』가 탄생된다. 극 중 판수(유해진 분)는 이런 분위기를 이해한 듯 명대사를 읊조린다.

"한 사람이 열 걸음을 걷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함께 한 걸음을 걷는 게 역사의 발전이다"

그러나 영화 『말모이』에는 더 큰 의미가 함축돼 있다. 남쪽 사회에서 금기시했던 인물 한글학자 '이극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극로를 암시하는 인물 류정환(윤계상 분)은 조선어학회 대표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독일 유학길에 만주에서 이극로는 주시경의 수제자이자 한글학자인 김두봉 선생을 만난다. 그리고 인생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독일유학 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지만 평생 국어를 연구한 한글학자이자 한글운동가로 살아간다. 1931년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장(오늘날 이사장)이자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던 리더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극로 선생은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을 위해 스스로 무직을 택했고 조선어학회 살림과 운영을 모두 떠안았다.

그런 점에서 1930년대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 사정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은 상당 부분 이극로의 헌신과 수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극로 선생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데 있다. 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을 시대 배경으로 하는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세간에 '이극로'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극로 선생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월북자로 분류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남쪽 대한민국 사회에선 매우 생경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국어 교사들조차 이극로를 모르는 형편이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극로 선생이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진 이유는 한반도 분단과 관련이 깊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 3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이극로 선생이지만 냉전과 분단은 우리들 기억에서 '이극로' 이름 석 자를 망각시켰다.

▲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 고루 이극로 박사.(출처 : 박용규 박사 ) 이극로 선생은 독일 유학 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평생 국어를 연구한 한글학자이자 한글운동가로 살았다. 해방공간 좌우 합작운동에 매진했고 북쪽에 잔류한 이후 북쪽 언어정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 남과 북이 통역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도 주시경 학파의 제자들과 그 정신을 잇는 학자들 덕분이다. 남과 북 모두 큰 틀에서 한글전용이라는 같은 언어정책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 고루 이극로 박사.(출처 : 박용규 박사 ) 이극로 선생은 독일 유학 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평생 국어를 연구한 한글학자이자 한글운동가로 살았다. 해방공간 좌우 합작운동에 매진했고 북쪽에 잔류한 이후 북쪽 언어정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 남과 북이 통역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도 주시경 학파의 제자들과 그 정신을 잇는 학자들 덕분이다. 남과 북 모두 큰 틀에서 한글전용이라는 같은 언어정책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말기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제했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치욕을 감수했고 통분했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에도 나오듯이 창씨개명에 치욕을 느껴 자결한 분도 있었다. 민족시인 윤동주조차 일본 유학길 도항증을 만들기 위해 부득불 창씨개명을 한 직후 너무 부끄러워 「참회록」을 쓰지 않았던가! 개명된 창씨계를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에 제출하고 5일 지난 후 윤동주는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고 살아왔던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며 참회했다.

이극로 선생은 일제의 조선말 탄압에 맞서 우리말 모으기와 우리말 사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던 분이다. 따라서 1940년대 일제 식민지 시절 우리말을 연구하고 지키기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저항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항일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언어독립투쟁인 이유이다.

영화 『말모이』 극 중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의 대사에 나오듯이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표현은 조선어학회 사건이 당대 항일투쟁의 성격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제국주의 일본 역시 조선어학회 사건을 혹독하게 취급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글학자 한징, 이윤재 두 분이 극악한 고문 끝에 예심 판결이 열리기도 전에 옥사했다.

▲ 조선어학회 항일기념탑(광화문 광장 부근)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7월 광화문 광장 근처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세웠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고초를 겪었던 33인의 명단과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진 : 하성환)

이극로 선생은 조선어학회 핵심으로 지목돼 극악한 고문과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고문 도중 7번이나 혼절을 했고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 33인 가운데 가장 센 징역형인 6년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감옥생활 도중 해방되어 함흥형무소에서 해방 이틀 뒤인 8월 17일 들것에 실려 나왔다. 출옥 후 이극로 선생은 상한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바로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13대 간사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조선말 큰 사전 편찬에 다시 힘을 쏟아 붓는다.

그리하여 1929년 사전편찬 작업을 시작한 지 18년째가 되던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 사전 1권이 출간된다. 나아가 일제가 물러간 공백기에 13대 간사인 외솔 최현배 선생과 함께 한글교과서 편찬과 한글전용정책을 추진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16만 어휘를 수록한 우리말 큰 사전 6권이 완간된 것은 1957년 10월 9일이다.

이극로 선생은 해방 공간 통일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1948년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 차 북한에 갔다가 북에 잔류한다.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북에 잔류하는 것은 당시 미군정 치하 역사 청산이 좌절되면서 친일반민족 세력이 활개 치던 시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한글학자 정열모, 이만규의 북행이나 의열단장 김원봉 그리고 김원봉의 친구 김약수, 이여성 모두 북행길을 택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거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이들은 왜 북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악질 고문경찰 노덕술 등 친일세력들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수모를 겪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이 도래한 탓이다. 좌우합작운동에 혼신을 다했던 김규식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에 대한 테러가 빈번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말모이』는 '이극로'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널리 회자될 수 있도록 알린 영화이자 항일독립지사 이극로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킨 대중서사인 셈이다. 한 마디로 영화 『말모이』는 대중예술을 통해 냉전의 마지막 걸림돌을 해체시킨 선구적인 작품이다. 이제 남은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통 크게 이극로 등 항일독립지사들에게 뒤늦게라도 독립장이든 애족장이든 서훈을 추서하는 일이 남았다. 단순히 월북자로 분류해 보훈을 거부하는 것은 아직도 냉전의 낡은 틀에 스스로를 가둬두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보훈 치고는 매우 옹졸한 모양새이자 좁쌀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주주통신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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